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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자본가 Nov 03. 2017

땀의 시대에서 피의 시대로의 회귀

피의 시대 땀의 시대

피의 시대  땀의 시대





  인류의 역사는 피로 이어져 온 역사였다. 지금이야 『모든 국민은 법앞에 평등하다』 라고 헌법 제11조에 규정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역사는 평등하지 못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살펴보면, 단군 할아버지가 세우셨다는 고조선 시대부터 이미 신분제도가 존재하고 있었다. 8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8조 금법’이라고 하는 고조선 시대의 법률을 보면 “남의 물건을 훔친자는 데려다 노비로 삼는다”라는 조항이 있다. 이 조항으로 미루어 짐작하면 이미 고조선 시대부터 신분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쉽게 이야기하면, 할아버지가 왕이었으면 아버지도 왕이었고, 아버지가 왕이면 나도 왕이라는 얘기다. 반대로 할아버지가 노비이면 아버지도 노비였고, 아버지가 노비면 나도 노비인 것이다. 이 시대만 하더라도 태어남과 동시에, 아니 어쩌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정해져있는 사실이라 그 누구도 여기에 문제의식을 갖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라서 그 누구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게 자연스러웠다. 마치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이야기 할 때, 모두가 그를 비웃었듯이 아버지의 신분에 따라 나의 신분이 정해지는 건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었다.







  물론 인류의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에 분노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멀리 돌아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의 경우만 보더라도 1198년 최충헌의 사노비 만적이 있었다.




“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찌 원래부터 씨가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주인의 매질 밑에서 근골(筋骨)의 고통만을 당할 수는 없다. 최충헌을 비롯하여 각기 자기 상전을 죽이고 노비의 문적(文籍)을 불질러, 우리 나라로 하여금 노비가 없는 곳으로 만들면 우리도 공경대부 같은 높은 벼슬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최충헌의 사노비 만적이 자신과 같은 노비들에게 한 연설의 내용 일부이다. 만적의 민란은 비록 실패로 돌아가지만 그의 시도는 이렇게 역사에 남았다. 만적의 민란은 기득권 세력의 입장에서는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반란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내가 보기엔 굉장히 의미있고 진보적인 계급운동이다. 










  어찌되었든 이렇게 내 몸에 흐르는 피가 누구의 피냐의 따라 내가 누구인지 정해진 시대가 끝난 것은 불과 백년정도이다. 1894년 갑오개혁을 기점으로 신분제도가 철폐되었으므로 정확히는 123년이 되었다. 123년 전만해도 우리나라에서도 신분제도가 있었고 아버지가 양반이면 나도 양반, 아버지가 노비이면 나도 노비가 되는 사회였다.



  갑오개혁 이후 피로 이어졌던 신분제도는 사라지고 땀의 시대가 열렸다. 누구나 평등한 위치에서 열심히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는 사회가 된 것이다. 거기다가 우리나라는 근대화 이후에 일본의 식민지를 거치고 1950년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6.25 전쟁을 겪으면서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사회였다. 정말 완전하게 평등한 출발이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낸 탓에 잘 살고자 하는 욕망이 그 어떤 국민들보다도 강했고, 교육에 대한 뜨거운 열망은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선 유례없는 세계사를 거침없이 써내려갔다. 조선소도 없이 배를 수주 받은 이야기나 포항 영일만에 세계적인 철강소를 세운 이야기도 바로 이 시기의 이야기다.




   땀을 흘린 양에 따라 나의 계층이 결정되는 이 시대는 그야말로 모두에게 열심히 살아갈 이유가 되었고 희망이었다. 그렇게 땀을 흘린 세대들이 국가 경제를 발전시키고, 가정을 꾸리고 자산을 축적해나가면서 다음 세대를 출산하였고 그들의 무대는 그렇게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세대들의 출발선은 매우 평등했다. 그래서 그들은 열심히 땀을 흘렸고 그 땀의 댓가를 보상받아 자산을 축적했다. 그러나 출발은 평등했을지라도 과정에서 흘린 땀의 양은 결코 같을 수 없었고 그 양의 차이는 빈부의 차이로 벌어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빈부의 차이는 그 자신들의 다음세대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서울은 강남과 강북으로 나뉜다. 강남과 강북은 한강을 기준으로 지리적으로 나뉘는 지역이 아니라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를 강남이라고 하고 나머지 지역을 강북으로 본다. 강북의 학부모들은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고 보통 한 군데 정도의 학원을 보낸다. 대부분의 학원들이 종합반으로 되어 있어서 1주일 스케줄이 짜여있기 때문에 학교 수업과 학원 1군데 정도면 자녀들의 스케줄도 꽉 차게 된다. 그래서 강북의 학생들은 보통 1학교 1학원을 다니게 된다. 물론 여기서 학원 대신에 과외를 하는 집도 있지만 학원과 과외를 동시에 하는 학생들은 드물다. 











  하지만 강남의 경우는 다르다. 강남의 학부모들은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고 보통 3개 이상의 학원을 보낸다. 학원의 시스템도 강북처럼 주요과목을 다 가르치는 종합반이 아니라 단과학원 시스템이다. 그래서 과목별로 전문화된 학원을 1개씩만 보내도 3개가 기본이다. 물론 학원을 보내는 비용도 더 많이 들 뿐만 아니라 학원에 다닐 시간도 빠듯하다. 그래서 강남의 학부모들은 차를 가지고 학교와 학원 앞에서 자녀들을 기다린다. 자녀의 스케줄이 하나 끝나면 바로 다음 스케줄로 이동하기 위해서이다. 숨 쉴틈 없이 짜여진 학원 스케줄은 자녀들을 공부밖에 할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들고, 이런 환경은 자연스럽게 강북보다는 강남학생들의 성적을 높게 만든다. 학생 본인들의 행복도는 강북의 학생들이 강남의 학생들보다 높을지 모르겠지만 명문대학 진학률은 강남의 학생들이 확실히 높다. 서울대 경제학부 김세직 교수가 2015년 서울대 경제연구소 학술지 경제논집에 내놓은 ‘경제성장과 교육의 공정경쟁 학생 잠재력인가? 부모 경제력인가?’ 논문에 따르면 강북과 강남의 서울대 진학률 차이는 최대 21배까지 나는 것으로 조사됐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낸 것일까? 강북의 학부모나 강남의 학부모나 모두 교육열이 뜨겁다. 교육열로만 따지자면 강북의 학부모들도 강남의 학부모에게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강북의 학부모가 강남의 학부모처럼 학원을 보낼 수 없는 이유는 대부분 경제력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학원의 인프라 자체가 강남과 강북이 완전히 다르기도 하지만, 그들이 강남이 아닌 강북에 거주한다는 것 사실 자체가 이미 소득의 차이로 인해 어느정도 거주지가 정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거주지라는 것은 직장과의 거리 등을 고려한 여러 가지 요인들이 관여하게 되지만 강남의 아파트 값이 강북의 아파트 값보다 몇 배 더 비싸다는 점을 고려하면 일부 사례를 제외하고는 경제적 소득의 차이로 인해 거주지가 강남이냐 강북이냐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부모 세대의 경제력에 차이에 따라 자식 세대들의 출발선이 달라진다. 여기서 한 군데 더 특별한 곳을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강남과 강북 외에도 동부 이촌동이라는 동네가 있다. 한강을 남향으로 바라보는 곳으로 풍수지리학적으로도 부가 모이는 동네라고 한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 동네는 교육열이 으뜸인 동네는 아니지만 경제력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동네이다. 이런 동부 이촌동과 강남의 학부모들을 비교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강남의 학부모들은 대부분 의사나 변호사와 같은 전문직종에 종사하면서 경제소득이 높은 계층이다. 본인들도 열심히 공부해서 경제적 소득이 높은 직업을 가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자식들에게도 교육을 강조하고, 교육을 통해서 자신들의 지위를 물려주려고 한다. 하지만 동부 이촌동의 학부모들은 다르다고 한다. 동부 이촌동의 학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얘야 공부하기 싫으면 공부하지마라. 나중에 미국으로 유학가고, 건물하나 물려줄게”라는 말을 한다고 한다. 부모세대들이 소유한 부가 막대하다보니 굳이 자식들이 먹고 살기 위해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다. 강남과 강북 간의 차이도 큰데, 그보다 더 큰 차이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달라진 출발선은 땀의 가치를 희석시킨다. 강북에서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강남의 사교육으로 무장된 학생들을 앞서기 어려워지다보니 경쟁자체가 이뤄지지 않게 된다. 실제로 강남에서는 유치원부터 영어유치원을 가고, 조기유학을 다녀와서 중학교만 가더라도 학교 영어선생님보다 영어를 잘하는 경우가 많다. 강북에서는 수능시험 이전까지 영어 한 과목을 공부하느라 낑낑대는데 강남의 학생들은 이미 영어 한과목을 다 끝내고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격차가 점점 커지면 따라가는 쪽은 경쟁하기를 포기하게 된다. 해도 안된다는 생각에 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다. 노력의 시도조차 포기하게 되면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현재의 상황은 점점 고착화되고 그 격차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될 뿐이다. 그리고 벌어지는 격차만큼 한탄만 늘어날 뿐이다.




  ‘금수저 흙수저’의 맥락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태어날 때부터 물고나온 수저의 색깔에 다라 이미 나의 삶이 어느정도 정해진다는 것이다.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신은 금수저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어차피 해도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게 된다. 노력해봐야 내 형편은 나아지지 않으니까 말이다.




  사회과학에서는 이러한 사회를 ‘세습자본주의’사회라고 부른다. 자본이 대를 이어 세습되어서 이러한 계층구조가 고착화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는 계급이 사라져서 핏줄로 신분을 물려주지는 않지만 이제는 피가 아닌 자본으로 신분을 물려주는 것이다.





  실제로 몇 년 전부터 도입된 로스쿨의 경우, 국회의원을 비롯한 상당수의 유력 자제들이 입학한 것으로 파악되었고 실제로 어느 한 국회의원은 자식을 자신의 인턴으로 고용한 뒤 로스쿨에 진학한 것으로 밝혀져 사회적 논란이 되기도 했다. 자본이 단순히 부를 물려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업과 지위까지도 만들어내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피케티가 『 21세기 자본론 』에서 이야기한 것도 이런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피케티는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통해서 경제성장률보다 자본의 성장률이 높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곧 자본을 가진 자가 더 많은 자본을 모은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말하면, 지금 자본을 가진 자와 자본을 가지지 못한 자의 차이는 더 벌어질 것이며, 이것을 극복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층간 이동이 고착화된다는 측면에서 우리의 역사는 다시 피의 시대로 회귀하고 있다. 단지 그게 정말 새 빨간 피가 아닐 뿐이지, 자본이라는 파란색 피로 다시금 할아버지가 누구냐에 따라 아버지가 누군지 결정되고, 아버지가 누구냐에 따라 내가 누군지 결정되는 사회로 가고 있다. 





  계층간 이동이 고착화되면 계층은 계급이 된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계급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뉘게 될 것이다. 지배계급은 끊임없이 피지배계급을 착취하기위해 변화를 원치 않을 것이고 여러 가지 지배논리를 내세워 자신들의 지위를 정당화시키려는 노력을 할 것이다.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던 그런 사회가 또 다시 점점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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