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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자본가 Dec 28. 2017

극한경쟁에서 나를 살리는 힘, 대체불가능성

나를 대체할수 없어야 내가 살아남는다

대체불가능성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을 잘 풍자하여 제작된지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영화가 있다. 바로 『 모던타임즈 』이다. 영화 모던타임즈에서 찰리채플린은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인간의 모습을 잘 나타내어 산업사회를 풍자하였다. 동그란 것만 보이면 무엇이든 조이려고 하는 그의 모습은 몸 뿐 아니라 정신까지도 노동에 찌들고만 노동자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생산과정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소외현상은 찰리 채플린만 주목한 것은 아니었다. 자본론의 저자 칼 마르크스 역시 생산과정에서의 인간소외 현상을 우려했다. 그는 자본론 1권에서 노동 소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진정한 매뉴팩처는 이전에는 독립적이었던 노동자를
자본의 지휘와 규율에 복종시킬 뿐만 아니라,
노동자 자신들 사이에 등급적 계층을 만들어 낸다.
단순 협업은 개개인들의 노동 방식을 대체로 변경시키지 않지만,
매뉴팩처는 그것을 철저히 변혁시키며 개별 노동력을 완전히 장악한다.
매뉴팩처는 노동자의 일체의 생산적인 능력과 소질을 억압하면서
특수한 기능만을 촉진함으로써 노동자를 기형적인 불구로 만든다




  산업사회의 생산시스템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작업은 세분화되고 그 과정 속에서 노동자는 일부 기능만을 담당하게 된다. 생산과정을 전체적으로 총괄하는 것이 아닌 어느 한 부분의 생산 노동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숙련도를 극대화하여 노동 생산성을 높이는 효과가 있지만 노동자에게는 자신이 지닌 재능과 창조성을 살릴 기회를 박탈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산업시스템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더 발전해가면서 ‘테일러리즘’으로 요약되는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기법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테일러는 근로자의 창의성과 자율성에 의존하던 작업현장을 과학적 과업설정이라는 계획적 관리로 전환시켜서 노동생산성을 높이고 조직적 태업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작업에 필요한 공정을 하나하나 분해하여 구분하고 통제하기 시작했다.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기법은 생산량을 극대화시켜 노동자에게는 고임금을 주고 회사에게는 비용을 절감시켜 상호쌍방이 이익이 되는 좋은 목적에서 시작했지만 노동자를 태만한 존재로 보고 최대한 많은 작업량을 부여하여 그것을 완수하거나 혹은 직장을 그만두게 하는 문제가 생기면서 노동자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에 막스 베버는 권위를 바탕으로 한 조직의 관리운영체제를 이야기하였다. ‘관료제’는 엄격한 권한의 위임과 전문화된 직무의 체계를 바탕으로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는 시스템인데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기법과 마찬가지로 인간소외의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조직의 효율성을 위한 규칙과 절차가 지나치게 강조되고 업무가 테일러리즘에서와 같이 세분화되면서 근로자 자신이 일과 다른 구성원으로부터 소외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기법이나 막스 베버의 관료제는 우리에게 ‘풍요’를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인간성의 상실을 함께 가져다 주었다. 노동에서 소외되는 인간은 기계의 부품과 다름없이 생산에 이용당하고 쓸모가 없어지면 버려졌다. 지금은 각종 제도적 보완이나 법의 정비를 통해서 노동자들을 보호하고 있지만 지금도 여전히 노동소외현상은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소외를 당하지 않기위해 노동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그 답은 과학적 관리기법과 관료제의 창시자인 테일러와 베버에게서 찾을 수 있다.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기법이나 베버의 관료제가 운영되기 위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표준화’이다. 생산작업이 표준화되지 않으면 노동자들에게 작업을 가르칠 수도 평가할 수도 없다. 관료제 역시 제각각인 업무지침으로는 하나의 시스템을 유지할 수가 없다. 다시말해, 노동자가 표준화되지 않고 조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 노동자는 노동소외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이 노동소외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요소는 무엇일까? 성실성, 열정, 끈기, 인내, 결단력, 추진력, 리더십 등 다양한 능력들이 있지만 여기 나열된 그 어떤 덕목들보다도 중요한 것이 하나있다. 바로 ‘대체불가능성’이다.



  대체불가능성은 표준화랑 반대되는 개념이다. 표준화가 A, B, C를 모두 A, A, A로 만드는 것이라면 대체불가능성은 A, B, C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A가 A로서 존재하게되면 B, C를 대체할 수 없다. ‘B’ed가 ‘A’ed가 될수 없고, ‘C’at이 ‘A’at가 될수 없듯이 말이다. 노동자가 대체불가능성을 지니게 되면 노동자는 자신의 창조성과 자율성을 지켜나갈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불가능성을 지니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교육의 힘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의무교육을 받아왔다. 학교에서 다양한 과목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기도 하지만 학교 안의 규칙에 따라 순응하며 지내오기도 했다. 학교 안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학교의 규칙을 잘 지키면 상을 받고, 어기면 벌을 받아왔다. 그래서 규칙은 지켜야한다는 생각이 내재화되었고 규칙을 어기면 나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그 규칙의 정당성 여부를 따지기도 전에 말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규칙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규칙의 의미와 정당성 여부도 따져보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지켜야하는 것은 아니다.


 

   대체불가능성을 추구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두려움이다. 남과 다른 것을 한다는 것은 안전하지 못하다. 애쉬의 동조실험을 보면 인간이 남과 다르게 하는 것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다. 



  애쉬의 실험은 다음과 같다. 우선 피실험자에게 실험의 목적을 시력검사라고 알려준다. 그리고 실험장소로 이동하는데 거기에는 사람들이 반원을 그리고 앉아있고 피실험자는 맨 끝자리에 앉게 된다. 실험 장소에 이미 와 있는 사람들은 실험 협조자로 사전에 연구자에게 실험의 본래 목적과 해야 할 일에 대해 고지를 받은 상태이다. 그러나 피실험자는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며, 자신과 같은 피실험자라고 알고 있다. 



  실험은 간단하다. 실험장소에 있는 사람들에게 아래 그림과 같은 표준선을 보여주고 A, B, C와 같이 서로 길이가 다른 세 선을 연속해서 보여준다. 그리고 그 A, B, C 중에서 표준선과 길이가 같은 선을 고르는 것이 과제이다.










  과제의 답은 명백하고 매우 쉽기 때문에 피실험자가 단독으로 과제를 풀었을때는 틀리는 경우가 없었다. 진짜 실험은 여기서부터이다. 첫 번째 문제와 두 번째 문제에서는 실험협조자와 피실험자 모두 정답을 말한다. 그리고 세 번째 문제에서 실험협조자들이 모두 틀린답을 말한다. 가장 끝 쪽에 앉아있는 피실험자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틀린 답을 말한 상태에서 자신이 정답을 말해야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실험 결과는 놀라웠다. 총 18번의 시행에서, 실험 협조자들이 정답을 말한 6번의 시행을 제외한 12번의 시행에서 123명의 피험자들 중 76.4%가 적어도 한 번은 동조 반응을 보였으며, 평균적으로 검사 시행의 36.8%에서 동조를 했다. 다시 말해, 정답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답을 바꿔 대답한 것이다. 실험에 주어진 과제는 전혀 어렵지 않았고, 그 과정이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피험자가 답을 말하기 전에 만장일치를 이룬 다수 집단을 보고, 거기에 공개적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답을 말해야 했던 상황들이 피험자로 하여금 집단의 영향에 동조하게 만든 것이다.



  애쉬의 실험은 한 개인이 다수의 집단에 얼마나 영향을 받는지를 보여준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A라는 행위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선뜻 나만 B라는 행위를 하는 것은 A가 틀리고 B가 옳다하더라도 두려움과 불편함이 생기는 것이다. 



  교육과 두려움은 이처럼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길을 가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그리고 나와 같은 선택, 생각, 행동을 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안심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하게끔 만들어왔다. 하지만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동조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안전하고 안심할만한 것인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레밍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나그네쥐’라고 불리는 레밍이라는 쥐과 동물이 있다. 이 동물이 유명해진데는 ‘집단 자살’처럼 보이는 현상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레밍의 이러한 ‘집단 자살’현상에 대해서 조사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현상은 레밍의 습성때문으로 밝혀졌다. 레밍은 집단으로 이동하는 특성이 있어서 어떤 한 마리가 막연히 어떤 방향으로 뛰어가면 다른 녀석들도 무조건 달라붙어 뛰어가게 된다. 그렇게 무작정 뛰다가 낭떠러지에 이르게 되면 낭떠러지 앞에서 미처 멈추지 못하고 떼죽음을 당한다는 것이다.



  사회는 계속 변화한다. 사회의 변화 속도는 빠르지만 사람들의 변화인식은 변화의 속도보다 늦고, 규칙이나 법은 변화의 인식보다 더 늦다. 부족과 결핍의 시대에 표준화를 통한 대량생산은 사람들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하는데 큰 기여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젠 부족과 결핍의 시대는 막을 내려가고 풍요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더 이상 표준화를 통한 균등하고 균일한 가격이 저렴한 상품에 대한 수요보다는 독창적이고 획기적인 상품에 대한 수요가 더 큰 시기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규칙에 사로잡혀 레밍처럼 무조건 열심히 달리고만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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