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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자본가 Jan 03. 2018

회사와 당신은 윈윈 게임을 하고 있습니까

내가 잘되는 것이 회사에도 이로운 것인가



  ‘윈윈’이라는 말이 있다. 서로 다른 협상주체가 그 협상을 통해 한쪽만 이익을 보는 것이 아닌 양쪽 모두가 이익을 볼 때 쓰는 말이다. 상호 간에 서로 이익이 된다는 뜻에서 win-win이라고 한다. ‘윈윈’이라는 것은 어찌보면 협상을 하는데 너무 당연한 원칙 중 하나이다. 어느 한 쪽이 불이익만 보게 된다면 불이익을 보는 주체는 그 협상을 하지 않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협상이라는 것은 이론과는 달라서 서로 각기 다른 생각과 계산을 가지고 협상테이블에 앉기 때문에 협상결과는 한쪽에 불리한 결과를 낫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누군가와 협상을 할 때에는 내 이익은 물론이고 상대방의 이익까지 나는 결과가 가장 좋은 것이고 내가 손해보는 것이 가장 나쁜 결과이다. 둘다 나쁜 결과가 나오는 경우는 아예 협상이 깨질테니 고려할 필요가 없다. 









  이는 국가, 기업, 개인 누구를 협상의 대상으로 하든 마찬가지이다. 상대방이 지닌 협상력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테지만 기본적으로 그 협상은 상대방과 나 모두에게 이익이 되어야하는 것은 분명하다. 









역사적으로 근로관계는 착취관계였다



  그런데 우리는 불합리한 협상을 종종 하곤 한다. 특히 기업과 개인이 근로계약을 맺을 때 그렇다. 기업과 개인 간의 고용계약은 기본적으로 윈윈이 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기업과 개인의 이해관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기업은 원칙적으로 조금이라도 더 싼 임금을 지급하고자 하고 개인은 조금이라도 임금을 더 높게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용계약에선 개인보다는 기업의 협상력이 더 세다. 그래서 고용계약의 당사자인 개인들은 불리한 계약을 맺을 조건이 크다. 이는 역사적으로도 그러하였다. 




  19세기 초 대영제국의 자본가들은 여성과 아동들을 산업현장에 근로자로 이용하기 시작한다. 갑작스런 산업의 발전으로 공장에서 일 할 노동자들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고임금을 주어야 했던 남성노동자를 고용하는 것보다는 여성과 아동들에게 일을 시키는 것이 자본가의 입장에서 더 나았다. 당시 여성과 아동들은 하루 노동시간이 12시간에서 16시간에 이를정도로 많은 시간동안 일을 하였고 급여나 식사도 열악하였다. 게다가 일 역시도 작은 몸을 이용해서 할 수 있는 위험한 일들을 많이 하였다. 이렇게 노동현장에 내몰린 아이들의 건강상태는 매우 나빴고 성장 역시 제대로 이뤄질 수 없었다. 




  이렇게 열악한 노동환경에 내몰린 여성과 아동 노동자들은 생각보다 많았는데, 엥겔스가 쓴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에 그 수치가 잘 나와있다. 엥겔스가 쓴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에 따르면, 1839년 공장노동자 42만 명 가운데 거의 절반이 18세 이하의 노동자였으며, 또한 그 중에서 여성 노동자는 24만 명으로 전체 공장노동자의 약 60%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영국 산업사회에서 여성과 아동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이런 희생으로 당시 사람들은 저렴한 가격으로 양질의 상품을 소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비교적 산업화의 역사가 짧은 우리나라에서도 대영제국과 같은 노동자의 열악한 근로환경이 문제가 되었었다. 1960년대 청계천 평화시장 인근은 의류 상가와 제조업체들이 밀집되어 있었다. 1층은 주로 상가로 이용되고 2-3층은 제조업체들이 이용하고 있었는데 공장들은 대부분 영세하였다. 2평 남짓한 공간에 13명의 노동자들이 일을 하는 곳도 있었고, 13평정도의 공간에 50명이 일하는 공장도 있었다. 이처럼 좁은 공간에 많은 수의 노동자들을 모아놓고 일을 시키다보니 노동환경은 매우 열악하였다. 햇빛도 비치지 않는 다락방에서 하루 14시간 이상씩 일을 하였다. 게다가 공장 내부에는 환기 장치도 잘 되어있지 않아 건강상태 역시 좋지 않았다. 특히 봉제 공장에서 일을 하는 노동자들을 대부분 13-17세의 어린 여성들이 많았는데 초과근무수당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장시간 저임금 노동을 하고 있었다. 




  이런 노동 환경을 참다못한 전태일이라는 청년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분신자살을 하면서 노동자들의 처우와 권리 등이 많이 개선되긴 했지만 지금까지도 미흡한 부분이 많다.










  이런 노동자의 처우와 권리에 대한 문제는 그들을 고용하는 자본가들과 이해관계가 다른데서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앞서 말한대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가급적 임금을 적게주는 것이 유리하다. 그래야 생산 비용을 줄일 수 있고 자신의 이윤은 더 커질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노동자는 임금을 많이 받을수록 유리하다. 보다 많은 돈은 삶을 더 윤택하게 해줄 테니 말이다. 자본가와 노동자는 이처럼 이해의 방향이 서로 상반되기 때문에 타협하고 협력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자본가와 노동자는 보통 대립을 하게 되는데 자본을 많이 소유한 자본가를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가 이기기란 쉽지 않다. 일부 노동자들은 강력한 노동조합을 만들어 그들끼리 똘똘 뭉쳐서 그들의 몫을 잘 쟁취해내기도 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소수의 이야기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자본가에게 대항할 힘조차도 지니고 있지 않다.










회사가 직원들에게 이익을 충분히 나누고 있는가





  그래서 계약을 하기 전에 나의 이해관계와 기업의 이해관계를 잘 따져보는 것이 중요하다. 다양한 산업이 존재하는 오늘날에는 반드시 기업과 개인의 이해관계가 상반되는 비즈니스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TV에서 자주 보는 연예인을 떠올려보자. 송중기, 송혜교, 박신혜, 전도연, 이종석 등 그 누구라도 좋다. 그리고 연예 산업의 비즈니스 구조를 생각해보자. 1인 소속사로 활동을 하는 연예인들도 있지만 보통의 경우 대부분의 연예인들은 소속사와 계약을 해서 활동을 한다. 아직 방송출연 경험이 하나도 없는 신인들도 그러하고, 이름만 대면 알만한 톱스타들도 그렇게 한다. 연예인들은 연기자면 연기, 가수면 노래 등 연예활동에 필요한 레슨과 피부관리, 코디, 패션 등 다양한 관리를 받게 된다. 당장 활동할 곳이 없는 신인들은 일단 소속사에서 비용을 지불하고 추후 활동을 통해 벌어들이는 수입을 받는 계약이 있고,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스타들의 경우에는 수입의 일정비율을 정해서 연예인과 소속사가 나눠 갖는다.




  이런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의 구조를 놓고 연예인과 기획사의 이해관계에 대해서 따져보자. 일단 연예인들은 자기가 많은 작품에 활동하는 것이 좋다. 다양한 작품활동을 통해서 출연료는 물론 명예와 인기까지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들의 쏟아지는 관심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연예인의 수입은 높아지게 된다.




  기획사 역시 높아져가는 소속 연예인의 인기가 나쁘지 않다. 소속 연예인이 왕성한 활동을 해서 벌어들이는 수익이 높아지면 그 수익을 연예인과 나누기 때문에 기획사 역시도 이득이 된다. 기획사에서는 오히려 연예인이 연예활동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매니저는 물론 차량, 피부관리, 건강관리, 평판관리 등 많은 일들을 대신 해준다.




  이처럼 엔터테인먼트 사업의 경우 자본가인 기획사와 노동자인 연예인의 이해 방향이 서로 같기 때문에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는다. 노동자 역시 무작정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보상을 정당하고 정확하게 받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데뷔 후 몇년간 소속사에서 연예인에게 과한 노동을 시키는 경우가 있긴하지만 그 계약기간이 끝나면 갑을관계가 완전히 뒤집힌다. 인기있는 연예인이 갑, 소속사가 을이 된다. 그래서 연예인 걱정은 하지 말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런 이야기는 엔터테인먼트 사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보험판매원의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보험판매원은 보험사로부터 고용계약을 맺고 보험상품을 소비자들에게 소개하고 판매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여기서 보험사는 보험판매원을 고용한 자본가가 되고, 보험판매원은 보험사에게 고용된 노동자가 된다. 보험사와 보험판매원의 이해관계를 따져보도록 하자.



  일단 보험판매원은 보험을 많이 판매할수록 좋다. 보통 보험사와 보험판매원간의 고용계약은 ‘기본수당 + @’의 형태로 근로계약을 맺게 되는데 보험 판매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급여가 높아지는 구조이기 때문에 보험판매원 입장에서는 많이 파는 것이 본인의 수익 증가에 도움이 된다. 보험사의 입장에서도 보험판매원이 보험을 많이 파는 것이 좋다. 판매량이 증가할수록 보험판매원에게 지급해야 하는 급여가 증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급여로 나갈 비용보다 상품의 판매로 벌어들이는 수익이 더 크기 때문에 보험사의 입장에서도 보험판매원이 자사의 보험을 많이 팔수록 유리하다. 즉, 보험사와 보험판매원의 이해관계는 서로 일치한다. 그래서 보험사에서는 일정한 기준에 도달해야만 이름을 올릴 수 있는 ‘명예의 전당’과 같은 제도를 두어 보험판매원들에게 동기부여를 해주고 있다. 




연예기획사와 보험회사의 인사제도가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직원들의 우수한 성과에 대해 이익을 나누는 구조를 주목하자고 말하고 싶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직원들이 야근을 하든 말든 정해진 월급만을 주고만다. 엄청난 성과를 내어도 늘 위기를 강조하며 허리띠를 졸라맨다.  정해진 월급만 주고 직원들을 무제한으로 부려먹는다. 기업의 이익은 오너의 주머니로 들어가고, 직원들의 주머니는 늘 비어있다. 기업은 자꾸 커지고 부유해지는데 직원들의 삶은 나아지지가 않는다. 세계적인 경쟁력은 갖춘 기업은 늘어났는데 중산층으로 오히려 줄고 있다. 









  자본가와 노동자는 계약을 통해서 근로계약을 맺는다. 그리고 계약의 내용에 따라 두 사람의 이해관계가 정립된다. 그 계약 내용이 한쪽에게만 이득이 되는 구조라면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는 대립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반대로 계약의 당사자들이 잘되어야 모두 이득이 되는 구조라면 자본가도 노동자를 착취할 이유가 없고 노동자도 자본가로부터 자신의 정당한 몫을 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런 계약내용을 조율해서 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일부 직종을 중심으로 인센티브제와 같은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 윈윈할 수 있는 계약 내용이 만들어지고 있다. 



  아직은 보편화 된 것은 아니다. 인센티브의 비율도 아직은 부족하다. 다만, 여기서 이야기하고자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회사에 들어가서 일을 하기로 할 때 무조건 당장의 월급이 높다고, 복지가 좋다고, 근무지가 가깝다고, 회사의 이름이 유명하다고 해서 선택하는 것이 아닌 진정으로 나의 삶에 도움이 되는 선택을 하자는 것이다. 아무리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대기업에 들어가서 6천이 넘는 연봉을 받는다할지라도 ‘월, 화, 수, 목, 금, 금, 금’ 일만 한다면? 연봉은 많은데 시급으로 따져보니 다른 직장에 비해 오히려 적었다면? 그렇게 많이 벌어놓은 돈을 쓸 시간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낼 시간이 없다면?  나의 삶은 노동 빼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대체 그런 삶이 바람직한 삶인가? 그런 삶을 바래왔다면 괜찮지만 그런 삶을 꿈 꿔온 것이 아니라면 한번쯤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삶을 자신이 아닌 회사를 위해서 쓰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당한 대우와 합당한 보상도 받지 못한채 말이다.









기업이 성장하면 나도 성장하는가




  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회사에 들어가서 근로자로 근무하는 것은 대단히 일반적인 선택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근로자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만은 않는다. 가정보다 회사가 먼저인 삶,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업무, 느닷없이 쏟아지는 상사의 잔소리 등. 근로자로서의 나만 남고, 원래의 나는 찾아볼 수 없다. 




  일본에서는 이런 직장인의 모습을 두고 ‘사축’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가정이나 사생활도 없이 회사 일에 매진하는 직장인들이 자신들의 신세를 두고 ‘회사에서 기르는 동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해관계로 얽혀있는 상황에서 이해의 방향성이 다르면 힘이 강한 쪽으로 이(利)가 쏠리고 힘이 약한 쪽에는 해(害)가 몰리게 된다. 회사와 근로자라는 이해관계에서는 일반적으로 회사가 근로자보다 힘이 쎈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축이 아닌 나 자신으로서 존재하며 회사에 근무하기를 원한다면 나와 회사 간에 이해관계의 방향성에 대해서 꼭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 방향성이 서로 일치한다면 회사는 나를 착취의 대상이 아닌 든든한 지원군으로서 나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동반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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