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와 이해 사이, 우리 관계의 초상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을 본 건 얼마 전이었다. 모든 에피소드를 다 보고 난 뒤 '은중과 상연'은 내 마음에 오래 남아있다. 사람들은 상연이를 욕했지만 나는 이상하게...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를 욕할수록 내가 대신 욕을 먹는 기분이었다. 그 마음이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나는 다섯 살 때 만난 ‘그 애’와 30년 넘게 친구로 지내고 있다. 내 좁은 인간관계 속에서 그 애는 몇 안 되는 친구이자 가장 오래되고 가장 나를 이해하고 받아준 사람이다. 하지만 요즘은 그 애 이름만 들어도 마음 한편이 묘하게 쿡 하고 아린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우리는 처음으로 멀어졌다. 나는 서울로, 그 애는 전주로 대학을 갔다. 물리적으로는 멀어졌지만, 마음은 쉽게 멀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애가 내 삶에서 멀어질수록, 나는 더 자주 그 애를 생각했다. 내가 전주로 내려가기도 했고 그 애가 서울에 올라와 나를 포함한 여러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다. 직장을 가진 이후에도 그랬다. 나는 서울, 그 애는 여전히 전주에서 일했다. 고향 부산에서 가끔 보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만남은 서울에서였다.
나는 그 애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이해와 서운함은 언제나 나란히 찾아왔다. 그 애는 3년 전 결혼을 했다. 남편은 대전에서 근무 중이라 신혼집도 대전에 있다.
그리고 지금, 그 애는 아이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임신이 쉽지 않았던 터라 벌써 2년 넘게 모든 시간을 그 목표에 맞춰 살아왔다. 일도 잠시 멈추고 매일의 리듬이 몸의 상태와 병원의 일정에 맞춰 돌아가는 삶. 나는 그 애의 전화와 카톡 메시지 속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우리’를 느꼈다.
두 달 전, 오랜만에 그 애가 금요일에 서울에 오기로 했고 나는 금요일의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그 애를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목요일 저녁 무렵 도착한 카톡 한 줄이 마음을 흔들었다. 그 애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지만 내 마음 어딘가에서는 자꾸 서운함이 피어올랐다.
“토요일 오전 병원에 가야 돼서 내일 못 갈 수도 있을 것 같아.”
병원은 언제나 그 애의 몸의 시간에 맞춰 갑작스럽게 방문을 요구했고 같이 병원에 동행한 적도 있는 나는 그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알면서도 마음이 무너졌다. 그 애는 진심으로 노력 중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 짧은 문장이 우리 관계의 균열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 애는 “나도 서운하다... 하지만 내 몸이 지금 그렇게 움직여서 어쩔 수가 없어.”라며 미안함을 담아 말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이렇게 답하고 말았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잖아.
결국 너의 스케줄 속에서 나는 항상 예외가 되잖아.
그날의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그 이후로, 우리는 연락하지 않았다.
그 애는 지금 자신의 세계 속에서 너무나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남편과, 병원과, 같은 시간을 견디는 친구들과 함께. 나는 그 세계 밖에서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머리로는 그 애의 현실을 이해하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따라가지 못했다. 그 애는 삶의 방향을 찾아가고 있었고, 나는 그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로부터 한 달쯤 뒤, 나는 ‘은중과 상연’을 보았다. 그리고 드라마 속 상연이가 말하던 그 한 문장에 오래 머물렀다.
매번 이런 식이야.
고집을 부리고 반대로 가는 건 난데 모두 제자리에 있기를 바라는 거.
그 대사를 듣는 순간 이상하게 그 애와의 마지막 대화가 떠올랐다. 나 역시 늘 그런 식이었다. 스스로 어지럽히고 흔들면서도 결국 모든 게 제자리이길 바라는 마음. 떠나고 싶어 하면서도 버려지긴 싫고, 자유를 원하면서도 안정된 관계를 꿈꾸는 모순. 그 애와의 관계에서도, 내 삶 전체에서도, 그런 마음이 나를 잠식하고 있었다.
그 애는 두 달 전 대화의 끝에서 말했다. “나도 널 보고 싶어. 근데 내 몸의 리듬에 맞춰야 해서 네 일정에 맞추기가 어려워. 내가 널 후순위로 두는 게 아니라,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시기야.”
나는 그 말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론 그 진심이 너무 서늘하게 느껴졌다. 관계에는 언제나 ‘의도’보다 ‘느낌’이 더 큰 무게로 남는다. 그 애에게 나는 여전히 소중한 친구일지 몰라도 내 마음속에서는 이미 ‘둘만의 세계’가 균열 나고 있었다.
나는 은중이의 세계를 가진 그 애를 바라보며 상연이처럼 외로워했다. 그 애가 주변의 사랑 속에 점점 깊이 스며드는 동안 나는 그 곁에서 점점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결국, 내가 먼저 멀어졌다. 철저히 외로워지는 걸 감수하면서도.
아마 그게 내 방식의 사랑이자 관계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권태는 움직이지 않음에서 오는 게 아니라, 방향을 잃은 움직임 속에서 자란다. 나는 여전히 어딘가로 가고 있지만 마음 한편에선 제자리를 바란다. 그 모순 속에서 사랑은 언제나 나를 닮은 얼굴로 무너진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 애는 나를 떠난 게 아니라 자기의 삶을 살아간 것이었다. 나는 그걸 인정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상연이처럼, 나도 결국 그걸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했다. 사랑과 우정, 집착과 이해의 경계에서 비틀거리더라도...
어쩌면 그게 오래된 인연을 사랑하는 가장 인간적인 방법인지도 모른다.
사이의 고양이 '사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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