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라는 이름의 다른 것

권태와 빈자리 사이

by 사이의 고양이

권태를 말하고 있었다


내가 브런치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한 순간 나는 내가 심한 권태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라고 생각했다.


권태가 나를 무기력하고 재미를 느끼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나의 상태를 글로 쏟아내고 정리하고, 나에 대해서 나의 권태에 대해서 그 실체를 좀 더 잘 알기 위해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브런치 첫 글인 <사이의 고양이, 첫인사>와 두 번째 글 <가벼움이 가장 무겁다>를 썼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권태에 대해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권태'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이나 상태에 시들해져서 생기는 피로감이나 싫증이다. 심심함과 지루함으로 좀 더 단순하게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던 것들을 글로 정리해 쓰고 나니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게 정말 지루함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생겼다.


나는 내가 인생의 권태기를 겪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권태는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지 않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어떻게 다른 건지 설명을 못하겠다.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게 권태가 아니라면 뭘까? 권태로 표현하긴 적절치 않다는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파동이 느껴지긴 하는데 권태가 아닌 어떤 단어로 감정에 이름 붙여야 할지는 전혀 모르겠다.


지금은 그저 뭔가 빠져있는 느낌이다.




권태가 아니었다


원래 나는 주변 사람들이 '왜 저렇게까지 일하지?'라고 말할 정도의 워커홀릭이다. 취미도 일이라고 스스로 생각할 정도로, 평일 주말 가리지 않고 일에 대한 생각을 24시간 멈출 수가 없었다. 일을 하면서 만들어내는 성과 그리고 그로 인한 성취가 나의 도파민이었고, 짧고 강렬한 그 도파민을 계속 찾기 위해서 끊임없이 일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일의 강도가 높디높고 워라밸 같은 건 기대할 수 없는 초기 스타트업들 위주로 이직도 지속해서 해왔다.


그런데 올해 6월부터 개인적인 사연으로 일을 쉬게 되었다.


한 달 정도는 그저 쉬면서 게으름을 피고 소위 핫플이라고 하는 맛집, 카페 등을 찾아다니며 신이 났던 것 같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없어지면서 일로 증명하던 나의 쓸모도 함께 사라지는 것 같았고, 나는 무의미하게 내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는 생각에 조급증이 일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을 할 때만큼의 도파민이 나오지 않아 감정의 파동도, 자극도 없어서 심심함을 느꼈다.


그래서 자극이 될 수 있는 것들을 생각나는 대로 이것저것 해보려고 했다. 명품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나에게 선물을 준다는 합리화를 하며 명품 가방을 사보았다. 꾸준히 하는 취미를 만들고자 도자기 만들기, 피아노 레슨 등과 같은 원데이 클래스 등을 체험하며 내가 계속 '하고 싶다'라고 느끼는 '거리'를 찾아 헤맸다. 주식과 코인에도 손을 댔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위해 소모임, 문토, 플립 등과 같은 플랫폼을 깔고 책 읽고 토론하기 모임, 그룹 사진 클래스도 나갔다.


정말 몇 달을 바쁘게 쉬었다. 백수 주제에 과로로 입병이 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바쁘게 열심히 해내는 동안에도 여전히 뭔가 충족되지 않는 기분이 계속되었다. 이상하다고 느꼈다.


이런 고민을 정말 친한 몇 없는 친구들에게 얘기하자 정말 이상하게도 공통적으로 친구들이 내게 남자를 만나보는 건 어떠냐고 말을 했다. 여러 명이 동시에 같은 답을 주니 뭔가 이유가 있겠지 싶어서 일단 수용해 보기로 했고, 평생 나는 안 쓸 거라며 질색하던 소개팅 앱을 깔았다.


처음엔 재밌었다. 소개말 쓰고 사진 고르고 실제로 사람들을 만나는 게 새로웠다. 왠지 모를 승부욕도 불탔다.

그러나 몇 번의 만남 이후 나는 깨달았다.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아니, 오히려 더 심해졌다.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충족되지 않는 무언가...
이게 권태는 아닌 것 같다.




이름 없는 빈자리


권태라면 자극으로 채워질 텐데, 나는 계속 자극을 찾아다녔다. 그런데도 사라지지 않았다. 지루함이라면 뭔가를 하면 해소될 텐데, 나는 정말 많은 걸 했다. 그런데도 여전했다.


그럼 이건 뭘까.


어쩌면 이건 '있어야 할 무언가가 없는' 상태인 것 같다.

채워야 하는데 뭘 채워야 하는지 모르는 빈자리.

나는 그 빈자리에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다만 확실한 건, 그게 권태는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빈자리가 점점 선명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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