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무게 사이
최근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었는데 책을 읽는 내내 불편했다. 누군가 내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피하고 싶었던 질문들을 계속 던지는 기분이었다.
토마시와 테레자 그리고 사비나의 관계는 오래도록 머릿속을 맴돌았다. 외과 의사인 토마시는 여자들과의 가벼운 만남을 즐기지만 한편으론 테레자를 사랑한다. 테레자는 그런 토마시의 불륜에 괴로워하면서도 그를 떠나지 못한다. 화가 사비나는 어떤 관계에도 얽매이지 않으려 하며 끊임없이 배신과 자유를 선택한다.
나는 이들 중 누구일까? 아니, 누구와 닮았을까.
밀란 쿤데라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지만 깊다. 인생이 단 한 번 뿐이라면 우리의 선택은 얼마나 무게를 가질까? "한 번뿐인 것은 없는 것과 같다." 반복할 수 없는 삶이라면 우리가 내리는 결정은 결국 무의미한 걸까?
책을 읽으며 이상하게도 위로받은 건 권태가 사라져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권태를 '없애야 할 것'이 아니라 '마주해야 할 것'으로 바라보게 된 점이었다. 그동안 나는 권태를 털어내야 할 감정으로 여겼지만, 작가는 그걸 삶의 본질적인 질문으로 끌어올렸다.
그래서 요즘은 권태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다. 이 감정은 어디서 오는 걸까? 반복되는 일상 때문일까, 아니면 방향을 잃어서일까? 어쩌면 애초에 '방향' 같은 건 없는데 억지로 찾으려 해서 생기는 피로감일지도 모르겠다.
니체의 '영원회귀'를 떠올리면 더 복잡해진다. 만약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그것은 무겁고, 단 한 번 뿐이라면 가볍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가벼움이 가장 버겁다.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게,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게, 오히려 견디기 힘들다.
토마시는 관계로 권태를 잊으려 했고, 테레자는 사랑의 짐을 견뎠으며, 사비나는 끝없이 떠났다. 그들은 모두 존재의 가벼움과 싸웠지만 누구도 완벽한 답을 찾지 못했다.
나 또한 그렇다. 자유롭고 싶으면서도 불안하다. 묶이지 않았는데 오히려 더 답답하다. 관계가 깊어지면 먼저 멀어지고, 일이 지루해지면 새로운 자극을 찾는다. 어딘가로 가고는 있지만,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다.
토마시는 테레자를 사랑했지만, 동시에 다른 여자들을 만났다. 그에게 성과 사랑은 완전히 분리된 것이었다. 반면 테레자에게 사랑은 전부를 주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의 불륜은 배신이었다.
사비나는 또 달랐다. 누구에게도 전부를 주지 않았다. 관계는 가벼워야 했고, 얽히는 순간 떠났다. 자유가 가장 중요했고, 그 자유를 위해 고독도 감수했다.
나는 테레자처럼 전부를 주고 싶으면서도, 사비나처럼 자유롭고 싶다. 깊은 관계를 원하면서도 얽매이기 싫어하고, 사랑받고 싶으면서도 버려질까 봐 먼저 떠난다. 이 모순 속에서 나는 결국 어떤 사랑도 완전히 하지 못한다.
책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는데도, 상대방에게 하나의 지옥을 선사했다.
사랑의 방식이 다르면 사랑한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하다. 토마시와 테레자가 그랬고,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렇다.
가장 불편했던 질문이다. 나는 정말 누군가와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 결혼 같은 안정된 관계가 가능한 사람일까?
토마시처럼 여러 사람을 동시에 만나고 싶은 건 아니다. 하지만 한 사람에게 전부를 걸기엔 너무 불안하다. 사비나처럼 자유롭고 싶지만 혼자 남겨지는 게 두렵다. 테레자처럼 전적으로 사랑하고 싶지만 그 의존이 초라해 보일까 봐 겁난다.
결국 나는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아니, 모두를 조금씩 닮았다. 그래서 늘 어정쩡한 자리에 머무른다. 가벼움과 무게 사이, 자유와 불안 사이.
가벼움은 때로 도피처다. 무게를 견딜 자신이 없을 때 우리는 가벼운 관계로 도망친다. 한 번뿐인 인생에서 잘못된 선택을 되돌릴 수 없으니 차라리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가볍게, 더 가볍게.
하지만 작가는 보여주었다, 가벼움만으로는 견딜 수 없다는 것을. 사비나는 자유를 얻었지만 공허했고 토마시는 테레자 없인 살 수 없었다. 가벼움은 무게의 부재가 아니라, 무게를 회피하는 방식일 뿐이다.
책의 마지막에서 토마시와 테레자는 차 사고로 갑자기 죽는다. 그들의 사랑과 갈등이 한순간에 끝나버린다. 결국 모든 건 우연이고, 모든 건 가볍다고 작가가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가벼움 속에서도 그들은 사랑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끝내 함께였다. 어쩌면 그것이 답인지도 모른다. 존재가 가볍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나름의 무게를 만들어가는 것.
나는 여전히 확신이 없다. 어떤 사랑을 원하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하지만 이 책을 덮으며 하나는 알았다. 권태를 느끼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권태를 어떻게 다루느냐가 결국 내 삶을 만든다는 것.
토마시처럼 도망칠 수도 있고, 테레자처럼 견딜 수도 있고, 사비나처럼 떠날 수도 있다. 정답은 없다. 다만 어떤 선택이든 감당해야 하는 건 나 자신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내게 답 대신 질문을 남겼다.
내가 무엇을 감당할 수 있는지.
사이의 고양이 '사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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