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서평. 작은 아씨들 2, 루이자 메이 올컷

by 카멜레온

‘작은 아씨들’ 2부 (1869)보다 1부가 (1868) 더 재밌었다. 1부와 2부 사이에 읽은 올콧의 단편소설 두 편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어둠 속의 속삭임 (1877)'과 ‘가면 뒤에서 (1866)'는 인간의 본성의 어두운 면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돈과 명예에 대한 욕망으로 추악해질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을 보면서 황당하면서 재밌었다. 두 단편 소설이 마치 떡볶이와 쫄면같았다고 하면 ‘작은 아씨들’은 마치 죽을 먹는 것같았다. 너무 밍밍했다. 너무나 밝고 발랄한 소설이라 앞서 말한 어둡고 추악한 소설을 쓴 작가가 정말 동일 인물인가 의아할 정도였다. 작가가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작은 아씨들'은 상업성을 목적으로 독자와 출판사의 압력이 있어서 착하고 예쁜 소설을 썼나 싶을 정도로 대비가 됐다.


조보다 에이미


다시 읽어보니 좋아하는 캐릭터가 바뀌었다. 어릴 적 읽었을 때는 조가 좋았다. 조는 글도 잘 쓰고,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말하고, 호불호가 정확해 좋았다. 반면 에이미는 깊이가 없고, 여성성과 친절함을 주고 이쁨을 받고, 허세가 있어 싫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다시 보니 에이미처럼 사는게 실용적이고 현실적이었다. 나이 들어서 다시 읽어보니 이제 에이미가 현명한 듯하다. 예전에는 조가 똑똑하다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철없는 이상주의자였던 것이다. 둘이 다른 것만은 아니다. 공통점도 있다. 둘 다 주제파악을 잘한다. 조는 로리를 선택하지 않았다. 로리는 당시 모든 여성의 로망이었던 부자 집안 남자다. 그런데 로리가 조에게 청혼하자 조는 “나는 자유를 좋아하고, 고집도 세고, 너는 나랑 너무 비슷해서 우린 맞지 않을거야"라며 거절한다. 에이미도 주제 파악을 잘한다. 나는 “이 시대에 여성으로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결혼밖에 없어. 그래서 결혼을 잘해야 해"라고 한다. 결국 둘 다 자기 성격대로 배우자를 잘 선택했다. 근데 자기 의견을 표출하면 조처럼 가난하게 살게 되는건가? 반대로 의견을 숨기면 에이미처럼 부자로 살 수 있나? 그런 이분법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 부분 외에는 네 명의 여성을 통해 다양한 가치관과 성격을 잘 보여줬다. 물론 약 200년 전 소설이기 때문에 지금과 동떨어지고 남여차별적이지만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김홍도의 풍속화처럼 19세기 중반 시대상을 잘 반영한 풍속소설이었다.


결혼은 답이 아니다


‘작은 아씨들’ 결말은 작가 올콧이 그 시대에 할 수 있었던 최대의 반항인 듯하다. 결론에 대해 독자들의 논란이 많다. 네 자매 중 한 명은 - 가장 선한 셋째 베스가 - 죽고, 나머지 세 자매는 결혼을 함으로써 모두 자기 꿈을 포기하게 된다. 가정을 중시했던 첫째 메그는 결혼 후 독박 육아를 한다. 약 200년이 지난 지금도 육아 및 가사 노동 분담이 논란거리인 현실에 한숨이 나왔다. 마치 200년 전 노예제도가 현재에도 있는 광경을 보는 기분이었다. 둘째 조의 꿈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에르 교수와 결혼하면서 조 역시 꿈을 포기한다. 조는 작가 올콧처럼 싱글로 살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쓰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들은 바에 의하면 출판사에서 조를 결혼시키라는 압박이 있었다고 한다. 넷째 에이미 역시 부자인 로리와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화가의 꿈을 포기한다. 세 자매 모두 기-승-전-결혼으로 끝나지만 결국 셋 다 꿈을 포기한다. 1부 13장 ‘공상의 성'에서 “나는 작가가 될거야”, “나는 화가가 될거야" 라고 말하는 자매들이 반짝이는 꿈에 대해 말하는 초반과 극렬하게 대비되는 결말이다. 해피엔딩이 아닌 이런 우울한 결론은 작가의 의도였던 것같다.


일반적으로 작가는 책에서 쓴 글을 통해 의견을 말하는데, 루이자 메이 올콧은 책에서 말하지 않은 것을 통해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책에서 전혀 나오지 않은 “결혼은 답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물론 “결혼, 출산, 육아하며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해피엔딩으로 끝낼 수 있지만 그건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이야기고, 올콧은 그런 결론을 내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시대에서조차 다수는 아직도 결혼을 통해 답을 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짐작한 작가의 의도가 맞다면, 결혼은 답이 아니다. 그 때는 그리고 많은 경우 지금도 결혼, 출산, 육아를 통해 여성은 남성을 내조하고 아이를 돌보기 위해 하루종일 가사노동을 해야 하고, 그 노동의 가치는 인정받지 못하며, 행복한 가정에는 메그처럼 독박 육아 등 큰 희생이 따르고, 조처럼 작가든 에이미처럼 화가든 자신의 꿈을 포기했어야 했다. 나를 키우기 위해 엄마가 포기해야 했던 꿈은 무엇이었을까. 마음이 먹먹하다. 작가가 말하지 않음으로써 의도를 드러낸 신기한 소설이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서평. 열정은 쓰레기다, 스콧 아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