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좋아하는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공통적으로 아이들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 ‘꽂히는’ 시기가 있다. 그래서인지 어린이 출판사에게 그리스 로마신화 시리즈는 효자 상품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 로마신화에 빠진 아이들과 국립 중앙 박물관 상설 전시(2027년 5월 30일까지) <그리스가 로마에게, 로마가 그리스에게> 전시를 다녀왔다.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박물관 소장품 중 176점이 전시되고 있으며,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상설전시다.
유물 수는 많지 않으나 국립 중앙 박물관의 섬세하고 퀄리티 있는 전시기획, 미디어 아트를 다채롭게 활용한 현대적 해석, 그리고 하루 세 번 운영되는 도슨트 설명으로 전시된 미술품 하나하나가 의미 있게 다가오는 전시다. 제우스, 아테네, 에우로페, 파리스 등 아이들이 책으로만 보던 주요 신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스인들에게 신화는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자연을 이해하고자 하는 수단이었다. 왜 비가 내리는지, 왜 바다가 성을 내는지 인간은 나름의 답을 찾아야 했다.
인간은 신들의 세계를 창조해 각각의 영역을 관장하는 신들을 섬기고, 그들의 형상을 만들면서 많은 한계를 가진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했다.
그렇게 때문에 그리스인들이 믿는 신들의 세계를 보여주는 그리스 조각, 미술 작품들은 이러한 믿음을 더 강화하는 역할을 해야 했다.
본래 화려한 색으로 채색되어 있었던 거대한 그리스 조각들은 그리스 인들에게 보는 것 자체가 숭배와 동경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신들의 형상은 평범한 인간의 모습과는 구별되는, 이상적이며 위대한 인간의 모습이어야 했다. 나아가 아름다움은 신성 그 자체이기에, 신들의 상은 아름다워야 했다.
그리스 인들이 신만을 조각한 것은 아니었다.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청년의 토르소 상>, <소년의 두상>처럼 인간을 조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각상도 실제를 모사했다기보다는, 이상적 인간의 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봐야 한다.
특히 그리스인들의 운동 경기에서 우승자들의 조각상을 만들었는데, 그들의 조각상도 이상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고 마침내 신이 된 인간 헤라클레스처럼, 그리스 시민권자 중에서도 귀족자제들만 참석할 수 있는 운동 경기를 통과한 우승자들의 조각은 신들의 몸짓과 닮아 있다. 이는 여신 이시스의 형상을 하고 있는 클레오파트라 2세의 조각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미술사학자 나이즐 스피비는 그리스신화가 실제와 상상의 세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호메로스는 아폴론이나 아프로디테와 같은 신들의 말씀을 지어내면서 주저하지 않고 직접 인용을 사용했다. 그는 트로이와 올림포스가 교차해 만든 세계를 직접 ‘목격’하게 하는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기원전 5세기 중반에 활동한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는 마치 신화를 최근의 현실 세계에서 일어난 일처럼 만들어, 실제의 세계와 상상의 세계 사이의 간격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좁혀버렸다.
이렇게 일상이 된 신화의 세계 고대 그리스에서, 미술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채색된 조각과 그리스 신들이 3D현실처럼 장식된 벽화는 상상과 현실을 뒤섞는 시각적 경험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폼페이 벽화를 디스플레이로 재현했는데, 벽화에 친숙하지 않은 현대인이 봐도 신비로운 공간감을 자아낸다. (그리스 벽화는 전해지지 않으나 로마가 그리스 조각뿐 아니라 회화도 적극 모방했다고 알려진다).
인간의 상상을 일상적 공간에서 재현한 그리스 예술을 알면 알 수록, 아이들 뿐 아니라 나도 고대 그리스의 세계에 매혹된다. 신화라는 상상의 세계를 예술을 통해 일상으로 가지고 오고자 했던 그리스 인들. 어쩌면 그것이 상상의 세계에 머물기 좋아하는 아이들이 그리스 로마신화에 빠지는 이유인지 모른다.
참고자료
나이즐 스피비, <그리스 미술>, 한길아트, 2001.
양정무, <미술이야기>, 사회평론, 2016.
아놀드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창작과 비평사,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