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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상상한다, 시에나에서의 한 달살이를

히샴 마티르, <시에나에서의 한 달> 리뷰

by the cobalt



여행을 다니다 보면 조용한 유럽의 중소도시에서 몇 달은 있고 싶었던 곳이 있었다. 그중 하나의 도시였던 이탈리아 중북부 토스카나 지방의 도시 시에나(Siena)였다. 그래서였을까. <시에나에서의 한 달>을 보자마자 집어 들었다.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작가의 여행기도, 혹은 요즘 유행하는 세계 각지에서의 ‘한 달 살이’를 다룬 책들에서 흥미를 찾을 수 없는 이유는 대부분 여행기의 잡다한 일정이나 여행에서의 사건 사고를 다루는데 많은 부분이 치중되어 있고(직접 하는 여행에서도 스킵하고 싶은 여행일정을 책에서까지 볼 이유가 없는데 말이다), 필자가 여행하는 도시의 공간성을 글로 표현해 내는 것은 일반적인 에세이의 영역에서 벗어난 대단히 문학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9788930107853.jpg 히샴 마타르의 <시에나 에서의 한 달> 표지.

그럼에도 한 손에 잡히는 중편 소설 정도의 크기의 책에, 시에나를 배경으로 한 그림 암브로조 로렌체티의 <도시에서의 좋은 정치의 결과>의 일부분으로 장식된 표지가 미적으로 나의 마음을 잡아끌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리비아계 영국 작가 하샴 마타르의 ‘시에나 에서의 한 달 살기’의 기록은 읽는 내내 끝내기 아까운 여운이 깊은 노벨라를 읽는 듯한 선물 같은 책으로 다가왔다.

IMG_2292.jpeg 시에나 푸블리코 궁전

1300년대의 중세모습 그대로를 가진 이 작은 산간도시는 피렌체나 로마에서 관광객이 휩쓸려 다니던 피로를 잠시 잊고 중세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을만한 여유를 선사하는 고즈넉한 도시다. 도시가 중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옛 시청, 성당 등에서도 시에나 화파의 독특한 회화들도 그대로 남아 있다. 히샴 마타르는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가서 시에나 화파의 그림들에 매료되어 몇 달은 기본이고 일 년 동안 한 그림을 매일 가서 바라보았다고 한다.


"1990년, 내가 아직 런던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던 열아홉 살 때, 불가사의하게도 십삼 세기부터 십사, 십오 세기에 걸쳐 활동한 시에나 화파에 매료되었다. 나는 그해에 아버지를 잃어버렸다.... 내가 매일 점심시간에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가기 시작한 것이 그 직후였다. 가면 대체로 한 그림만 보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매주 새로 그림을 골랐다. 나는 그림이 시간을 요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금은 다른 그림으로 옮겨 가기까지 서너 달은 기본이고 일 년이 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동안 그 그림은 내 삶의 물리적인 거처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거처가 된다."


작가가 카다피 정권에 맞서다 카이로에서 납치된 아버지를 좇는 회고록 <귀환, (The Return)>(2016)에서 밝혔듯이, 그는 아버지가 실종되고 난 뒤부터 하나의 그림을 오랜 시간 보는 습관이 생겼다고 고백한다. 아버지를 잃어버리는 경험은 고향, 혹은 정신적 지지를 잃어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이 시기 작가는 시에나 화파의 그림을 보며 갑자기 사라진 자신의 존재의 일부분을, 혹은 정신적 거처를 시각적으로 더듬어가며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800px-Ambrogio_Lorenzetti_-_Effects_of_Good_Government_on_the_City_Life_(detail)_-_WGA13489.jpg 암브로조 로렌체티, <도시에서의 좋은 정치의 결과>, 1338-1340.


"그 그림들의 색, 섬세한 형태, 정지된 드라마가 점차 내게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되었다. (...) 그 그림들은 나중에 지배할,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감상자의 주관적인 삶을 요구하는, 그런 예술의 초기 사례이다."


시에나 화파의 그림이 보는 이의 시선뿐만 아니라 시간을 사로잡는 것은 색채와 형태뿐 아니라, 공간을 여는 그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1300년대 그려진 로렌체티의 프레스코화에서 화가는 도시국가로서의 시에나를 그림에 녹여내었다. 프레스코 채색화 특유의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가볍고 부드러운 색채로 채색된 도시가 공간감을 확장시키면서, 관람객을 중세 도시로 이끈다. 그들의 정지된 드라마 속에 빨려 들어가 인물 한 명 한 명을, 그들의 시선과 표정을 읽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그래서일까. 시에나에서의 시간은 일상의 시간과는 다르게 흘러간다.


"그곳에서 보낸 한 달 내내 나는 시간 속에 있다고 느꼈다. 나는 딱 적절한 시간에 일어나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것을 만나기에 더없이 완벽한 시점에 숙소를 나섰다. (...) 내가 경험한 모든 일이 딱 그래야만 하는 속도로 일어나고 있었다. 매일 하루가 끝날 때는 내가 걸은 길고 구불구불하고 계획되지 않은 산책의 기억이 생생하게 새겨진 채 남았다."


작가의 말처럼 고즈넉한 중세 도시에서의 공간, 그리고 그 도시 곳곳을 채워주고 있는 로렌체티의 프레스코 와 두초의 패널화. 그 작품들이 실제 그려진 곳에서, 작품들의 그려진 시기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는 공간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은 현대인으로서는 경험하기 힘든 잔잔한 시간의 흐름을 경험하게 한다. 아마 그, "내가 경험한 모든 일이 딱 그래야만 하는 속도로"일어나고 있는 마법 같은 시간의 흐름을, 그리고 시에나의 다채로운 빛깔을 나의 어딘가에 새기기 위해, 시에나에서의 한 달 살기를 꿈꾸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뉴욕에 돌아와 흑사병이 일어나고 100년 후 조반니 디 파올로가 1445년 경 그린 <낙원>을 보기 위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찾는 것으로 이 짧은 여정을 끝맺는다.


"그 그림은 이걸 안다. 그 그림은 우리가 제일 바라는 것, 낙원보다 더 바라는 것이 알아봐 지는 것임을 안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아무리 형태가 변하고 바뀌어도, 우리의 어떤 것이 우리가 그토록 오래 사랑했던 이들에게 지각될 수 있도록 견디어 남는 것 말이다. 아마도 예술사 전체가 이런 야심에 전개이리라."


<시에나에서 한 달>은 책의 처음과 끝에 등장하는 그의 아내 다이애나에게 지각되기를 염원하는 러브레터 같기도 하고, <귀환>에 이어 아버지를 애도하고 추모하는 글 같기도 하다. 그러나 많은 독자에게 이 책은 은은한 색채로 밝게 빛나는 시에나를 담은, 그 도시가 불러일으킨 감각이 그리울 때마다 펼쳐봐야 하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책이 될 것이다.



참고:


https://www.theguardian.com/books/2019/nov/09/a-month-in-siena-by-hisham-matar-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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