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을 분해해보자
내 인생에서 내세울 것이 있다면 (그런 거 없어도 되지만)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꾸준히 하고 있다는 것- 정도 되겠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고 당연히 미대에 갔고 평생 디자이너로 살 거라고 생각했지만 짧은 일생에 걸쳤던, 치우친 경험에 기반한 목표는 쉽게 무너졌다. 이후 몇 가지 자발적인 과정 끝에 인터뷰라는 업에 발을 들였고, 그 흔한 잡지사 에디터 같은 것 한번 안 해보고 여태껏 인터뷰를 하며 살고 있다.
이럴 거면 디자인 공부는 왜 했나 싶을 때가 있었다. 미술이라는 건 돈도 많이 들고 에너지 소모도 많다. 내가 갓마흔에 이렇게 골골대는 건 2-30대에 자만하여 체력을 펑펑 써버린 게 원인이 아닌가 싶을 정도니. 에디터라는 직업을 진작에 찾았더라면 (30대 초반에 시작함) 경력도 더 많이 쌓고 자원 낭비도 안 했을 텐데 말이다.
물론 이 생각 역시 몇 년 가지 않아 뒤집혔다. 세상에 쎄고 쎈 게 에디터인데 (디자이너도 마찬가지) 그 틈에서 '나여야만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하면 뒤늦게 찾은 일의 수명마저도 장담할 수 없다. 글을 기똥차게 쓰는 에디터도 있을 거고, 섭외를 잘하는 에디터, 편집을 잘하는 에디터, 사진을 잘 찍는 에디터 등등 100명의 에디터가 있다면 100가지의 에디터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중 디자이너 출신 에디터였다 (내용상 에디터라는 직업명이 간단해서 쓰고 있지만 스스로 에디터라고 소개하진 않는다. 더 다양한 일들을 하고 있기 때문). 내가 섭외하는 브랜드의 결, 내가 콘텐츠를 보여주는 방식, 내가 나를 보여주는 방식 등 모든 것에서 디자이너 냄새가 물씬 난다. 플러스, 사진도 웬만큼 찍고 컴퓨터 프로그램도 기본은 한다. 나는 내 아이가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하면 매우 웰컴일 것 같다. 큰돈은 몰라도 굶어 죽진 않거든.
디자인에서 인터뷰로 넘어온 가장 큰 이유는 '예쁜 쓰레기'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죄책감이었고, 그다음은 내 역량이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대단히 내세울 만한 것이 아니라는 걸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디자인에도 여러 가지 프로세스가 있는데 간단하게 말하면 기획을 하고, 그다음 디자인을 하고, 제작과 유통을 한다. 그중 제일 못하는 게 유통이었고 제일 잘하는 게 기획이었다. 그래서 제조의 단계를 없애고 스토리텔링에 집중하자고 선택한 것이 인터뷰였던 것이다. (파워 E라는 것도 한 몫했다)
처음엔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게 그거다. 제품 디자인이나 콘텐츠나. 똑같이 기획을 하고, 제작을 하고, 마케팅을 하고, 유통을 하고, 소비자의 손길을 기다린다. 중요한 점은 그래도 나에게 더 맞는 일이 있다는 것이고 내가 속한 곳을 잘 파헤쳐보면 그 안에 답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디자인을 할 때 더 뜨거웠지만 그만큼 고통스러웠다. 에디터의 일은 그보다는 뜨뜻하지만 더 쉽게 즐겁다. 더 오래 할 수 있는 쪽을 택하라면 당연히 후자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나에게 알맞은 옷이 아니라면, 분명히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발을 담갔는데 영 아니라면,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계속 잘 되지 않는다면, 어쩐지 즐거움보다 스트레스가 더 크다면, 그 일을 작게 작게 잘라서 분석해보자. 어떤 조각이 제일 좋고 어떤 조각이 제일 별로인지. 생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이뤄내고자 하는 목표가 있는 게 아니라면 굳이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 세상은 넓고 직업은 많다. 그 좋은 조각을 잘 키울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선다면 분명히 더 나은 워크 라이프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