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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룬아 Nov 10. 2022

지금은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무신사 레이지나잇 뉴스레터 <달링>


휴가 아니죠, ‘휵아'입니다


안녕하세요, 룬아입니다.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서늘한 바람이 정수리를 스치고 가는 계절이 왔네요. 저는 불과 지난주, 늦여름의 따사로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다섯 살 아들과 함께 제주도 보름살이에 다녀왔어요. 아이와 함께 긴 여행을 다녀온 것은 작년에 이어 두 번째인데, 솔직히 왜 강행하는지 저 자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입이 짧은 아이와는 맛집 투어를 하기도 어렵고, 한 시간 동안 운전해서 인스타그램으로 염탐하던 예쁜 편집숍에 가볼 수도 없고, 바닷가에 느긋하게 누워 책을 읽거나 맥주의 맛을 음미하는 건 그야말로 환상이죠. 저는 작년부터 스누피 가든에 세 번이나 방문했고 (그만큼 훌륭한 공간입니다), 에코랜드에서 기름 냄새 풍기는 기차를 네 번 정도 탔고, 물이 얕은 동쪽 해변에서 울퉁불퉁한 화산석을 넘나들며 목 뒤가 까맣게 타도록 소라게를 잡았답니다. 


휴가가 아닌 ‘휵아'가 될 정도로 피로한 이벤트이지만 집에 돌아오자마자 내년에는 어디로 떠날까 궁리가 시작돼요. 사실 제주도 살이는 좀 더 자란 아이와 함께 다니고 싶은 해외여행의 예행연습입니다. 아이를 낳기 전부터 아이에게 가장 보여주고 싶은 것은 세상의 다양성이었어요. 작고 유일한 지구가 온통 까만 머리와 까만 눈동자들로만 가득 차 있지 않다는 것, 어떤 나라에서는 볼 키스로 인사를 나눈다는 것, 전통을 지키기 위해 여러 가지 불편함을 감수하는 문화도 있다는 것. 알록달록한 시간이 내면에 켜켜이 쌓여있는 어른은 조금 더 너그럽고 입체적인 시선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네다섯 살의 아이가 어디까지 기억할 수 있을까요. 작년 여행에서 거의 모든 일정을 아이 기준에 맞추면서도 이 모든 게 저의 자기만족이라고만 생각했어요. 어떤 환경을 제공했다는 것 자체로 자신에게 후한 점수를 주고, 혼자 간직할 추억을 만들었다고요. 하지만 일 년 뒤에 다시 찾은 제주에서 아이는 생각보다 많은 걸 기억하고 있더랍니다. 마치 몸이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돌바닥에 분필로 그림을 그리고 별을 보러 밤 산책하러 나가던 시간을.



오래 묵혀야 맛이 들죠


당근을 넣으면 당근 주스가 되어 나오는 기계도 있지만, 몇 년을 묵혀야 비로소 맛을 볼 수 있는 과실주도 있습니다. 대체로 더 큰 희열과 보람을 주는 쪽은 후자라고 생각해요. 아이를 키우는 것만큼이나 나 자신을 키우는 것도 오랜 시간이 걸려요. ‘오래’라고 표현하기에는 거의 평생이 걸리는 일인 것 같지만요. 최근에 알게 된 어떤 친구는 관심사가 너무 다양해서 이것저것 다 건드리고 나니 더욱 혼란스럽다며 고민을 토로하더라고요. 하지만 그 모든 게 모여서 어떤 열매를 맺을지는, 열매가 눈앞에 보이기 전까지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경험 A가 반드시 결과 A가 되지 않는 것, 그게 삶인 것 같아요. 물론 막연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욱 재미있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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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링> 뉴스레터는 매주 금요일, 무신사 플랫폼 '레이지나잇'을 통해 발송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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