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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룬아 Nov 22. 2015

[버터와 소] 김소은 작가 인터뷰

그림으로 하는 이야기 03

노트북을 켜고, 혹시 올라온 일기가 없나 하며 [버터와 소] 홈페이지를 들어가본다. 업데이트된 게시물이 있는 걸 확인하면 기분이 살짝 좋아진다. 그리고 정성이 담긴 그림일기를 구석구석 후루룩 읽는다. 최근에 출판된 책 [첫, 헬싱키]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빨리 읽어버리고 싶지 않아 꼭꼭 씹어가며 아꼈지만, 헬싱키처럼 비가 내리던 날 침대 속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다르고 말았다.

김소은 작가의 그림은 소박하고 솔직하다. 매주 올라오는 웹툰을 보고 돌아서면 잔잔한 위로를 받는다. 회사를 그만두고 무작정 떠나는 여행도, 육아와 병행해야 하는 작업도 다 괜찮을 것만 같다. 그렇다고 어떤 감정을 강요받는 건 아니다. 그녀는 담백하게 읇조리고, 우리는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

산업디자인을 전공하신 걸로 아는데, 어떻게 일러스트를 시작하게 되었나요?


MBC [러브하우스]를 보고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산디과에 진학했는데, 막상 접해보니 생각보다 잘 안 맞더라고요. 그러던 중에 [올드독] 정우열 작가님이 진행하시는 일러스트 워크숍에 참가하게 됐어요. 캐릭터를 만들어서 일기를 그리는 거였는데,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지금 쓰고 있는 캐릭터가 그때 만들어졌어요.

대학 졸업 때까지 한 번의 일탈 없이 참 착실하게 살았어요. 그러니 이제는 내 마음대로, 딱 서른 살까지만 살고 싶은 대로 살아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취직을 안 하고 그림을 그렸어요. 그러다 보니 일도 조금씩 하게 되고, 평생 그림 그리며 살고 싶다는 소망이 생기더라고요.


남들과는 조금 다른 행보를 걸을 때, 불안하거나 걱정이 되진 않았나요? 친구들은 대부분 취직을 준비했을 텐데.


전 별로 걱정하지 않아요.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지도 않아요. 노후 대책 같은 건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그저 오늘 하루를 성실하게 살면, 그 시간들이 모여서 잘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하고 대책 없는  믿음뿐이에요. 어쩌면 운이 좋았던 거겠죠. 저 하나  먹고사는 것만 생각하면 됐으니까.

엄마 친구 중에 타로점을 하는 분이 계신데, 재미로 봐주겠다고 해도 도통 궁금한 게 없는 거예요. 애초에 기대하는 바가 없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작은 것에서도 만족을 잘 하는 편인가 봐요.


그런 것보다는, 좋은 일이던 나쁜 일이던 덤덤한 편이에요.


물 같은 사람이네요. 흘러 흘러 제 갈길 가는 사람.

[첫, 헬싱키]를 보니, 남편의 퇴사를 고민 없이 동의하고 함께 여행을 떠났더라고요. 든든한 아내라고 생각했어요.


2012년도였는데, 남편이 다니던 회사 형편이 안 좋아졌었어요. 퇴사하고 생각할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하길래 헬싱키로 떠났죠. 저는 여행기를 독립출판물로 만들 생각이었고요. 작업 중에 출판사 몇 군데에 원고를 보내봤는데 성사가 안 됐어요. 그런데 3년이 지나고 나서야 안그라픽스 편집자님이 연락을 주신 거예요. 사무실에 있는 책장에서 우연히 원고를 발견했다고. 당시에는 생소한 콘텐츠였는데, 요즘에는 웹툰이 많이 소비되고 북유럽에 대한 관심도 많으니까요. 예전에 작업한 원고에 안그라픽스에 어울리는 디자인 정보를 추가해서 책이 나오게 됐어요. 될 일은 어떻게든 된다는 말을 직접 겪어보니 정말 신기해요.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온 것에 대한 보상이 아닐까요. 저절로 되는 일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왜 처음 계획대로 독립출판은 하지 않고 출판사를 기다린 건가요?


사실 독립출판을 하기에도 부족하다고 느꼈어요. 보완작업을 좀 오래 했는데, 그 사이에 솔이(딸)가 태어난 거예요. 그 후는 말 안 해도 상상이 되시겠죠?


별로 고민하는 편이 아니라더니, 작업에 있어서만큼은 엄격하신가 봐요.


제 눈이 높은 건지 낮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제가 보기에도 좋아야 세상에 내놓을 수 있잖아요.


오랜 시간에 걸쳐서 첫 책이 나왔는데, 아쉬운 점이나 만족스러운 점이 있다면?


아쉬운 건, 3년 전에 한 작업이라 최근 그림체와는 약간 차이가 있어요. 전부 다 새로 그릴 수는 없었거든요.

마음에 드는 건, 일반적인 그림책이나 웹툰 단행본과는 다른 느낌의 책이라는 점이에요. 겉도, 속도, 뻔하지 않은 느낌을 바랐거든요. 마침 출판사도 같은 의견이어서 수월하게 진행됐어요.


파란색을 모노톤으로 썼어요. 그 이유가 뭔가요?


핀란드 국기가 하얀색 바탕에 파란 십자가예요. 파란색은 호수와 하늘을, 하얀색은 눈을 의미해요. 제가 파란색을 좋아하기도 하고요. 평소 작업에는 컬러가 조금씩 들어가는데, 기존 독자들을 위해 색다른 느낌을 찾으려고 노력했어요. 처음에는 까만 펜 드로잉에 파란색이 포인트 컬러로 들어갔었는데, 인쇄 직전에 파란 라인으로 바뀌었어요.


표지 패턴도 유명한 핀란드 디자이너의 것으로 알고 있어요.


네, 요한나 글릭센Johanna Gullichsen이라는 섬유 디자이너예요. 기하학적인 패턴으로 직접 직물을 짜는 장인이죠. 출판사 미팅 때 들고 간 노트가 이 디자이너의 패브릭으로 싸여 있었는데, 편집자님이 표지에 적용시키면 좋을 것 같다고 하셨어요. 패턴을 사용하기 위해 디자이너에게 직접 연락했는데 흔쾌히, 그것도 공짜로 사용해도 좋다고 하셔서 정말 기뻤죠.


많은 사람들의 힘이 들어간 책이네요.


정말  그분들이 없었으면 못 나왔을 거예요. 책에 들어간 정보도 헬싱키에 사는 가족이 꼼꼼하게 봐줬고요, 출판사에서 스캔도 통째로 다시 받으신 거예요. 제가 가지고 있는 스캐너 질이 별로 안 좋았거든요. 게다가 엄마가 편찮으셔서 병원에서 탈고하느라 주변 사람들이 더 많이 도와줬죠.

어머님이 책을 보셨나요?


아뇨, 결국 못 보셨어요.


참 좋아하셨을 텐데, 안타깝네요.


곧 책이 나오니까 조금만 더 버텨달라고 했는데, 먼저 가셨어요.


어머님 이야기를 3편의 웹툰으로 그리셨죠.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봄부터 엄마의 이야기를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계속 마무리를 못 짓고 다듬기만 했는데, 이러다가는 엄마가 그림을 못 보고 가실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병원에서 그렸어요.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모두 제 역사이고,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을  그릴뿐이에요. 솔이 이야기를 그리는 것과 같은 일인걸요. 포털 사이트에 올리는 게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예상 외로 공감해주시고 응원해주시는 수많은 댓글을 보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고, 감동받았어요. 무엇보다 엄마에게 모두 읽어드릴 수 있어서 좋았어요.


저라면 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어요. 개인적인 사연을 공개하는 행위가 보편화돼 있지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어느 정도까지 보여줄 수 있느냐에 대한 고민이 상당할 것 같아요.


요즘 많이 보시는 일상툰을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그림 속 캐릭터는 나의 부분적인 모습이지 그것 자체가 나인 건 아니거든요. 캐릭터는 나이기도 하지만 내가 아니기도 하죠. 모든 걸 보여줄 필요도 없고, 자신을 지켜야 하기도 해요.

헬싱키 여행 중에 솔이를 가졌죠?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건 어떤가요?


책이 나왔을 때 가장 신기해하던 분들이 바로 아기 엄마들이었어요. 정말 힘들지만 그림 그리는 게 저의 돌파구라, 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림을 그리면서 다시 저 자신을 찾게 되거든요. 아이를 키우지만 나만의 일이 있고, 미래를 꿈꾸고 준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하지만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한 건 사실이에요. 솔이가 자는 시간에 틈내서 작업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일주일에 한 편 올리려면 일주일이 통째로 필요해요. 출판 후에는 다른 일이 들어와서, 당분간 포털 연재는 힘들 것 같아요. 하지만 계속 재미있게 할 수 있도록 제 페이스를 지켜가며 작업하고 있고, [버터와 소]는 제 인생의 프로젝트니까, 평생 할 거예요.


아이가 있다는 것의 장단점은?


연애를 길게 한 것이 아니라서, 결혼부터 완전히 다른 세계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완전히 남이던 두 사람이 삶의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하다니, 좋고 싫고를 떠나서 그 사실 자체가 신기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육아는 결혼을 넘어서는, 아예 다른 차원의 일이죠. 모든 것의 끝을 맛볼 수 있어요. 기쁨도, 분노도, 좌절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예전에 몰랐던 것들을 많이 알게 돼요. 다른 생명의 소중함 같은 것들을.

육아가 아무리 힘들어도 솔이는 세상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제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봐줘야 하는, 소중한 존재죠. 물론 제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좋겠지만, 솔이 덕분에 매주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그릴 수 있잖아요.


훈버터(남편)도 디자이너죠?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저와는 정반대의 성향이라, 부족한 점을 많이 채워주는 사람이에요. 조언도 자주 해주는데, 완벽주의 성향이 강해서 가끔 벅찰 때가 있어요. 지금도 그림이 차별성을 더 가져야 한다고 하는데, 그게 마음 먹는다고 쉽게 되는 게 아니거든요. 시간이 지나면서 더 단단해질 거라 생각해요. 열심히 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어요.

정식 연재를 목표로 두고 있나요?


사실 웹툰을 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어요. 매주 일정에 맞출 자신이 없었거든요. 절 도와주시는 편집자님이 제안하셔서 시작하게 됐는데, 확실히 어떤 매력을 갖고 있는지 알겠더라고요.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는 힘이 대단한 것 같아요. 최종 목표는 동화작가가 되는 건데, 그걸 위한 좋은 훈련이 될 것 같기도 하고요.


동화작가가 꿈이라면, 왜 지금 해보지 않는 건가요?


아직은 어렵게 느껴져요. 메시지가 담겨있는 긴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잖아요. 할머니가 되었을 때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고요. 더 성숙한 어른이 되었을 때, 좋은 이야기와 그림이 담긴 그림책을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장기적인 목표는 안 세우신다더니.


인생에 꿈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할머니가 돼서도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게 동화작가라면 더 좋을 것 같아요. 그 미래를 위해 체계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막연하게라도 꿈이 있다는 사실이 삶의 활력소가 되는 것 같아요. 그래야 가끔 슬럼프가 와도 쉽게 포기하지 않거든요.


슬럼프는 어떻게 극복하나요?


자요. 기분이 안 좋으면 피곤해져요.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고요.

나는 김소은 작가와 거의 반대편에 서있는 사람이다. 인생에 기대를 많이 하고, 단기적인 계획을 줄지어 세우는 통에 괴로워하며, 슬럼프에 빠지면 잠을 못 이룬다. 하지만 한 가지 생각만은 같았다. 하루하루 그저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꽤 괜찮은 인생일 수도 있다는 것. 세상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성실함이 존재한다.


www.soeun.co

http://comic.naver.com/challenge/list.nhn?titleId=658510

http://cartoon.media.daum.net/league/view/3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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