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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룬아 Nov 08. 2015

미진 작가 인터뷰

그림으로 하는 이야기 02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어느새 인스타그램에서 미진 작가의 그림을 훔쳐보고 있었다. 자주 업데이트되는 편은 아니었지만, 가끔은 연필의 선 끝에서 느껴지는 재능의 이끌림에 소리 없이 감탄을 하기도 했다. 이 사람을 인터뷰할 수 있게 되기 전에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멀리 떠나버리면 어쩌나 (인터뷰어 특유의) 걱정을 하기도 했지만, 흔쾌히 만나준 그녀는 자신이 편안하고 자유로운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보통은 인터뷰이가 운영하는 블로그나 웹사이트, 혹은 이전에 실린 기사 등을 공부하며 질문지를 작성한다. 알고 보니 겹치는 지인이 많아 놀라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이번만큼 정보도, 연줄도 없던 사람도 없었다. 작은 스크린 너머 이따금씩 훔쳐보는 그림 몇 장을 들고, 사상 가장 즉흥적인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안녕하세요 미진님, 간단한 자기소개를 해주세요.


시각디자인을 공부하는 대학생이에요. 이렇게 작업을 남에게 보여주는 건 처음이에요.


그림에서 내공이 느껴져요. 오래 그리셨나요?


어렸을 때부터 그렸어요. 미술 유치원을 다녔으니까요. 엄마가 미술을 하고 싶어 하셨는데 못 했거든요. 그래서 더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 것 같아요. 원래는 회화를 하고 싶었는데, 현실적으로 생각하다 보니 디자인을 선택하게 됐어요.


긴 시간 동안 슬럼프는 없었나요?


그림은 잘 그리는 것보다 나만의 것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것저것 다양하게 그려봤어요. 그런데 쉽게 질리게 되고, 저에게 맞는 걸 찾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작년 초, 이 그림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계속 그리고 있어요. 슬럼프라고 하면 요즘일 것 같아요. 학업에 치이면서 작업량이 많이 나오지 않아요.


코랑 귀가 특징이에요. 어떤 뜻을 담고 있나요?


이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가, 인간관계 때문이었어요. 긴 코는 피노키오, 긴 귀는 당나귀 귀를 의미해요. 사람들 사이에 생기는 비밀과 그것을 둘러싼 거짓말에 대한 이야기를 표현하고 싶었어요. 당시에는 그 문제로 힘들었는데, 지나고 보니 일상적으로 깔려있는 문제더라고요. 그래서 계속 그리고 있어요.

수영모를 쓰고 수영하는 캐릭터들이 가끔 나와요. 끝까지 지켜지는 비밀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꼭 지키고픈 비밀들이 있기 마련이잖아요. 귀를 가리면 비밀이 노출되지 않는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서 수영모를 씌웠어요.

상징적인 표현을 좋아하시는 것 같네요.


네. 물은 생각을, 우주는 상상을 뜻해요.


아, 물에 빠지는 건 생각에 빠진다는 뜻이군요.


가장 최근에 한 작업에서 수영을 해요. 그리고 또 다른 내가 물에 공을 던져서 파장을 일으키고, 물에서 나를 건져내요.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있는 나를 끄집어낸다는 뜻이에요.


굉장히 추상적인 개념들인데, 일상에 와 닿게 구체적으로 잘 표현하시는 것 같아요. 내용을 듣고 그림을 보니 또 다른 재미가 있네요. 그런데 대사를 안 넣으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가장 큰 이유라면, 제 글씨체가 마음에 안 들어요. 악필은 아니지만, 원하는 느낌을 내기가 어려워요. 원래 말이 많거나 글을 잘 쓰는 편도 아니에요. 그림을 그리는데 글을 넣을 필요도 못 느끼겠고. 이건 누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게 아니라 오롯이 저 자신을 위한 작업이거든요.


컬러도 거의 안 쓰고요.


전 옷도 까만 것만 입어요. 그냥 그게 편해요. 그렇다고 '난 모노톤을 좋아하니까 그림도 흑백으로 그려야지' 하고 결정한 건 아니고,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어요. 까만 연필 하나로 회색과 하얀색도 표현할 수 있어서 좋고요.

어렸을 때 꿈이 만화가였어요.  그때의 만화는 잉크와 스크린톤만 갖고 모든 걸 표현하잖아요.


그래서인가요, 웹툰과도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주변에 권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전 매주 정해진 시간에 맞춰서, 독자들의 반응을 살피며 강압적으로 그림을 그릴 자신은 없어요.

달도 자주 등장해요.


꿈을 꾸고 난 뒤에 작업을 많이 해요. 언젠가 지구 종말이 오는 꿈을 꿨는데, 두 개의 달이 떠있던 장면이 너무 생생해서 그림으로 그렸어요. 그 뒤로는 집착하다시피 달을 많이 그렸어요.


그동안 올리신 작업을 보면, 꿈을 많이 꾸는 것 같던데요.


제가 그리는 꿈작업은 거의 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꿨던 꿈 이야기예요. 그때는 낮잠만 자면 꿈을 꿨어요. 가위도 처음 눌려보고. 언젠가는, 산 속을 걷는데 황금사슴 동상이 있는 거예요. 신기해서 올라탔더니 갑자기 사슴이 살아나서 하늘을 날기 시작하는데, 피부에 와 닿는 공기의 느낌이 너무 생생했어요. 그리고 꿈에서 깼는데 제 몸이 침대 위에 두둥실 떠있었어요. 그것 또한 꿈이었죠.

어렸을 때는 쫓기는 꿈도 많이 꿨는데, 별 이상한 게 다 절 쫓아와요. 소시지 같은 것들이.


기억력이 좋은 건가요? 아니면 따로 기록을 하는 습관이 있나요?


기록은 따로 안 해요. 기억에 남는 꿈들은 그만큼 생생해서 쉽게 잊히지 않아요. 루시드 드림lucid dream이라고 아세요?  꿈속에서 꿈이라는 걸 자각하는 거예요. 전 볼을 꼬집어봐요. 안 아프면 꿈인 걸 알아요. 일부러 몸을 던진 충격으로 깬 적도 있어요. 영화 인셉션같죠.


꿈과 현실의 분간이 안 갈 정도네요. 고2 때 무슨 일이 있었나요?


특별한 일이 있던 건 아니에요. 중국에서 학교를 다니긴 했어요.


중국의 영향이 있었을까요?


중고등학교를 광저우에 있는 국제학교에서 나왔는데, 한국처럼 강압적인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활동적인 행사가 많았어요. 고등학교에도 만들기 수업이 있었고, 행사 때마다 학생들이 포스터를 만들고, 저희가 직접 만든 전통음식을 팔아서 돈을 벌기도 했어요. '텐텐'이라고 아침 10시 10분에 하는 체조시간도 있었고, 점심시간에는 여자애들이랑 농구하고 놀았어요.


한국에 와서 적응하기 어려웠을 것 같아요.


적응은 어렵지 않았는데, 할 게 없더라고요. 한국에 오면서부터는 꿈도 잘 안 꾸게 됐어요.


최근에 꿈을 꾼 적은 있나요?


가위에 눌렸는데, 머리가 너무 무거워서 안 움직여지는 거예요. 그래서 몸을 움직였더니 목이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그러더니 무슨 민들레 홀씨 같은 것이 방에 들어와서 제 머리 위에 앉았다 갔어요.


작업들이 상당히 추상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경험담이 많네요. 상상력이 풍부하기도 하고요.


전 되게 이성적인 편이에요. 틀을 정해놓고 그 안에서 응용을 하다 보면 상상하는 게 편해져요. 어느 정도 제약이 있을 때 더 재미있는 게 나오는 것 같아요.

웹툰, 일러스트, 회화 등의 장르의 접점에 있는 것 같아요. 불분명하지만 그래서 더 새로운 느낌이 든달까. 그림 의뢰를 받지는 않나요?


예전에 일을 한 적은 있는데, 제 그림이 상업적인 목적에 맞지 않는 것 같아요. 기계적으로 스타일만 갖고 그릴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전 하루 종일 생각을 하고, 정적이고 우울한 느낌을 품다가 한밤중이 돼서야 작업을 하는데, 그렇게 해서는 프리랜서로 활동할 수 없겠죠. 천천히 작업을 쌓아서 언젠가 책을 내거나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작가적 성향이 짙은 것 같아요. 맞춤형 그림을 거부하는 듯한 느낌?


회화를 하고 싶어 했던 지인이 있는데, 지금은 그림을 그리지 않아요. 한국에서는 그림에 스타일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서 분류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거기에 끼고 싶지가 않아서래요. 자꾸 기준을 세우고 거기에 맞게 묶으려 하니까요. 제가 계속 새로운 걸 찾으려고 노력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인 것 같아요.


지금의 작업은 독창적이라고 생각하세요?


가끔씩 눈을 점으로 찍은 그림을 가져와서 제 그림과 비슷하다고 하는 분들도 있는데,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지금의 작업을 하면서 자신감도 많이 생겼을 것 같아요. 확고한 아이덴티티가 있어야 인지도도 올라가는 거지만 그만큼 위험한 명예인 것 같기도 해요. 가장 자유로울 때 가장 독창적일 수 있으니까요.


예전에는 유명해지고 싶어서 자극적인 그림을 많이 그렸어요. 하지만 남을 의식하다 보니 계속 한계에 부딪히게 되더라고요. 지금 하는 작업은 일단 편해요.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고 저 자신을 위해 그리니까요. 그런데 그걸 더 좋아해주시니 신기할 뿐이죠. 많이 돌아왔지만, 예전의 작업을 했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욕심을 걸러낼 수 있었고,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의 작업도 나올 수 없었을 거예요.


전반적으로 우울함이 깔려 있는데, 표정이나 디테일에 위트가 담겨 있어서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주로 어떤 반응이 가장 좋은가요?


전 그림을 설명하지 않는데, 그림만 보고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신 걸 알았을 때 기분이 좋아요. 서로 공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작업실이 따로 없으니 외부에서 만나자고 한 미진 작가에게, 작업물을 조금 들고 와 달라고 요청했었다. 그녀는 까맣게 칠해진 표지에 달 그림이 붙어 있는 두꺼운 스케치북과, 낱장의 얇은 그림들이 담겨있는 작은 크라프트지 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왔다. 아직 스캔도 받아놓지 않았다는 작품들을 이리저리 만지는 내 손끝이 그림을 더럽히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채광이 좋은 카페에서 빠르게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그동안 그녀는 그림을 더 잘 보여주려 노력하지도, 혹여나 그림이 상할까 불안해하지도 않고 자유롭게 펼쳐두었다.

남에게 작업물을 보여주는 것만큼 인터뷰를 하는 것도 처음이라는 미진 작가는 대답을 길게 하는 편도, 묻지 않은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사람도 아니었다. 책보다는 영화, 글보다는 그림이 편하다는 그녀는 이미지라는 도구에 특화된 사람이었고, 앞으로 그녀가 꾸는 꿈들은 다른 무엇보다 그녀가 그리는 그림을 통해 엿들을 수 있을 것이다.


Instagram @mijiin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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