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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룬아 Apr 11. 2016

카인드 셰프 유정인 인터뷰

Taste : 맛, 그리고 취향

오이는 칼을 어떻게 대느냐에 따라 달라 보인다. 각진 원이 되기도, 뾰족한 타원이 되기도, 시원하고 길쭉하게 뻗기도. 오이를 처음 보는 사람은 잘린 단면을 보고 전체를 상상한다. 오이뿐이랴, 당근도, 피망도, 그리고 사람도.

KIND by Yoo Jung In. 2016년 봄에 본 카인드는 파랑과 분홍의 빛, 대리석 조각들과 황동의 반짝임이 곳곳에서 묘한 세련미를 돋우고 있었다. 한남동의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는 동안 수없이 변해왔을 공간의 지금이었다. 이 곳의 아침에 만난 유정인 셰프는 매일같이 출근하는 여느 직장인과 마찬가지로 화장기 없는 얼굴에 부스스한 머리를 질끈 묶고 따뜻한 커피를 한 잔 내려주었다. 그것이 오늘날 쉽게 볼 수 있는 유정인의 단면이었다. 하얀 조리복, 단정하게 묶은 머리, 그리고 손목의 다짐과도 같은 타투 goût(불어로 미각, 맛, 기호 등을 의미).

전공을 그대로 살리는 케이스가 점점 줄어들고 있죠. 셰프님도.


일본 무사시노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했어요. 그리고 예상하셨겠지만 생각만큼 잘 맞지 않았어요. 클라이언트라는 틀에 맞춰 제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없다는 점이 답답하더라고요. 정말 그 일을 좋아하고 삶을 던질 각오가 아니라면 선뜻 발 담글 수 있는 분야도 아니었고. 고민을 많이 하다 보니 요리를 고려하게 되었어요. 유학 중 요리를 많이 하게 되기도 했고, 어머니가 요리를 잘 하시거든요.


모든 셰프의 어머님들이 요리를 잘 하시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요리하는 모습을 많이 접하면서 자연스레 따라 하게 되고 입맛도 높아져요. 무의식적으로 흥미를 갖게 되는 것 같아요. 무엇보다 요리를 무서워하거나 어려워하지 않게 되거든요.

츠지 아카데미에서 프렌치를 배우고 한국에 들어왔는데 막상 요리를 할 기회가 없어서,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안 맞을 걸 알면서도 디자인 회사에 들어갔어요. 극심한 스트레스로 몸이 너무 안 좋아져서 쉬게 되었는데, 건강해지려면 식이요법부터 해야겠더라고요. 스스로 레시피를 만들고 식단을 짜보면서 음식이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알게 된 거죠. 그때부터 음식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음식은 기본적으로 생명유지를 위해 필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나의 근본과 성질이 되는 것이에요.

건강을 회복하고는 지인을 통해 르 꼬르동 출신 셰프를 만나서 업장에서 처음부터 다시 요리를 배웠어요. 그때의 경험이 지금 이 자리에서 제가 사업이라는 걸 할 수 있게 된 양분이 되었죠.


그럼 주로 건강식을 만드시나요.


추구하는 바는 그렇지만 표면적으로는 맛에 더 치중되어 있어요. 여러 곳의 푸드 컨설팅을 하는데, 가게마다 특성이 있고 상황이 있기에 모두 건강식을 고집할 수는 없어요. 카인드 고객층만 해도 건강식보다는 맛있는 음식을 더 찾으시니까.

카인드도 컨설팅으로 시작했다고요.

컨설팅 겸 셰프로 합류했죠.


카레 우동이 유명하더라고요.


당시의 카인드는 한우 들깨 덮밥, 닭개장, 장어덮밥 같은 메뉴들로 지금보다는 가정식에 더 가까웠어요. 한 번은 대표님이 일본에서 카레 우동을 드시고는 꽂히신 거예요. 메뉴에 넣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는데 저는 조금 특별한 카레 우동을 만들고 싶어서 프렌치 조리법을 접목시켜봤어요. 그래서 우동보다는 파스타 같다고들 하시죠. 개발 당시 면 찾는 데만 석 달이 걸렸어요. 우동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우동 면이 아니라 칼국수 면이에요. 소스와의 배합도 좋고 잘 불지 않거든요.

그렇게 2년 있다가 저는 독립하고 새로운 셰프가 영입되었어요. 메뉴가 통째로 리뉴얼됐죠. 단골손님들은 떠나가는데, 어차피 메뉴가 다 바뀌는 상황이라 제 레시피를 드리진 않았어요.


레시피에 대한 권리도 애매하겠네요.


상황마다 절차가 있긴 하겠지만 애매한 게 사실이에요. 셰프에게는 포트폴리오와도 같은 거니까. 들어보니 세 번째 셰프가 카레 우동을 만들어 보려고 했더라고요. 하지만 처음의 그 맛을 재현할 수가 없죠. 그러던 중 대표님이 새로운 사업을 하러 떠나시면서, 제가 처음부터 함께한 만큼 잘 이끌어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셔서 카인드를 인수하게 됐어요. 판교에 스튜디오가 있지만 한남동이라는 지역이 매력적이기도 하고 이 공간에 대한 애착도 있어서 결정하게 됐어요. 그렇게 카레 우동이 부활했죠.

푸드 컨설팅 시 고려해야 할 것이 많겠어요.


가장 중요한 건 오너가 하고 싶은 음식이에요. 그다음 지역 조사에 들어가죠. 식자재나 인사 관리도 중요해요. 그래서 메뉴뿐만 아니라 운영 방식에 대해서도 함께 컨설팅하고 있어요. 음식만 맛있다고 사업이 잘 되는 건 아니거든요. 사실 개인적인 목표도 셰프보다는 사업이에요. 요리만 하는 것보다는 비즈니스 전반에 관심이 많아요. 그래서 스스로 셰프보다는 푸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고 소개하곤 해요.


그러고 보면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노래도 잘 하고 춤도 잘 추고 요리도 잘 해요. 창의력은 쏠리는 걸까요.


아마 비슷한 선상에 있는 분야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 같아요. 건축과 요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같은 프로세스를 갖고 있어요. 건축자재를 알듯이 식자재를 알아야 하고, 도면을 치듯이 레시피를 만들고. 개인적으로 요리가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제가 한만큼 정직하게 나오기 때문이에요. 피드백도 즉각적으로 받고 바로 적용해볼 수 있죠. 저에게 더 잘 맞는 옷인 것 같아요. 그래도 건축학도의 성향이 있어서 그런지 메뉴 개발하는 게 정말 재미있어요.


셰프에게 필요한 창의력이란.


색감, 또는 플레이팅이죠. 거기에 중요한 게 식기고요. 그림을 그리기 위한 스케치북 같은 거라. 음식에도 시각적 경험이 중요해요. 맛은 기본이자 취향이고, 정성담아 요리하는 건 모든 셰프가 마찬가지니까요.


이제 이해가 되네요. 저번 방문 때 당근케익을 먹었어요. 생김새에서는 멋 낸 티가 났는데 맛은 의외로 소박하더라고요. 보기보다 어렵지 않은 맛이라고 느꼈던 기억이 나요.

카인드 외에 르 프로제 아 따블르Le Projet a Table, 스튜디오 룸Studio Room 등의 활동을 하고 계시죠.


르 프로제 아따블르는 불어로 '식탁을 계획하다'라는 뜻이에요. 케이터링 랩이라고 하면 이해가 가시려나요. 주로 프렌치 바탕에 퓨전을 해요. 이 사업을 통해서 포트폴리오를 더 단단하게 만들고 싶어요.

스튜디오 룸은 두 명의 친구들이 디자인, 아트 디렉팅, 브랜딩이나 제품 개발 등을 하는데, 그중 푸드 관련된 프로젝트를 함께 하고 있어요. 케이터링 할 때 플라워라던지 패키지 등을 더 다양하게 풀어낼 수 있어서 좋아요. 멤버 중 한 명이 대리석 회사에 다니는 덕분에 케이터링에 대리석을 적용했던 게 꽤 센세이셔널했죠. 대리석, 쉽게 해볼 수 있는 소재가 아니잖아요. 럭셔리하고 퀄리티 높게 진행할 수 있어서 덕을 많이 봤어요.


레스토랑과 케이터링은 어떻게 다른가요.


보편적으로 케이터링 하는 사람들 중에 셰프가 없어요. 케이터링을 귀찮아하거든요. 손이 많이 가잖아요. 그런데 전 그게 성향에 잘 맞아요.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만들어낸다는 게 재미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맛이 없어질 수밖에 없는 요리의 단점을 보완하는 레시피도 만들고, 이런 미션들을 매번 풀어나가면서 성취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그리고 브랜드나 기업 아이덴티티를 메뉴에 녹이면서 매번 새로운 구성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재미있죠.


여자 셰프가 별로 없는데.


그 이유는 분명해요. 일단 체력적으로 남자들과 경쟁이 안 되죠. 그리고 제가 겪어본 바로는, 기본적으로 남성 비율이 높은데 그 사이에서 성차별을 받아요. 여자라고 예민하게 굴지 말라느니, 군대나 갔다 오라느니 하는 얘기를 듣는 거예요. 오랫동안 굳어진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견디기 힘들게 해요. 메인 셰프로 승격했을 때 저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 스탭들이 있었어요. 하지만 제가 여자라는 이유로 말을 안 들어요. 그게 참 서러웠어요. 현실이 이렇다 보니 여자들이 셰프보다는 파티셰를 선호하는 경향도 있어요.

원래는 화장이나 매니큐어도 잘 안 하는데, 미팅을 많이 하면서 어리고 여자라고 무시당하는 경우가 생기다 보니 조금씩 하게 되네요. 디자인할 때랑 손이 많이 달라졌어요. 이젠 두껍고 거칠고.


노동에 대한 부분은 어떻게 견디나요. 그냥 참나요.


그냥 제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받아들여져요. 한동안 케이터링만 할 때는 시간이 많았어요. 일이 있을 때만 하면 됐으니까. 그랬더니 굉장히 공허해지더라고요. 전 음식을 먹는 것보다 해주는 걸 좋아하는데, 그 대상이 없는 거예요. 다시 키친으로 복귀하고는 그런 마음이 사라졌어요. 빈틈없이 일을 해야 행복한가 봐요.


한 자리에서 같은 요리를 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프로젝트를 하니까 밸런스가 좋은 것 같아요. 어떤 셰프들은 매일 같은 요리를 하는 게 힘들다고 하시더라고요. 음식 찍어내는 로봇 같다고.


저도 큰 업장에서 일할 때는 점심시간에만 파스타를 2-300그릇씩 만들어야 했어요. 그러다 보면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죠.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매일 다른 메뉴가 들어오는 거예요. 손님들이 찾는 메뉴가 다르잖아요. 그 메뉴들을 유연하고 똑똑하게 처리하는 시스템을 연구하게 되고, 데이터베이스가 쌓이면서 점점 재미있어져요. 오너 셰프의 레시피를 내가 더 맛있게 만들어야겠다는 목표 같은 걸로도 하루하루가 달라요.

아트적 취향이 강한 것 같아요.


아무래도 디자인을 했으니까 조금이라도 더 예쁘고 감각적인 걸 좋아하죠. 공간적인 것에 매력을 많이 느끼고요. 몇몇 가구나 소품들은 직접 제작하기도 해요.


돈 벌면 뭐에 투자하세요.


똑같아요. 여행 가고, 한국에 있는 맛집 찾아다니고, 집기도 사고요. 책도 많이 봐요. 음식 관련된 책들. 패션도 놓칠 수 없죠. 베이직하지만 디테일에 강한 브랜드를 좋아해요. 게다가 주위에 패션 하는 친구들이 많아서, 하나씩 사줘야 하죠.


잘 먹고 잘 산다는 건 어떤 걸까요.


원하는 걸 하면서 사는 거겠죠. 먹고 싶은 거 먹고 보고 싶은 거 보고. 그래서 제가 추구하는 음식은 먹기 위해 사는 사람, 살기 위해 먹는 사람 모두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것이에요.

신사동 FIKA, 이태원 TMI(Too Much Information), 현대카드 트래블 라이브러리 등 서울 곳곳의 핫플에서, 그리고 곧 가수 정엽이 운영하는 오리올에서도 유정인의 맛을 느껴볼 수 있다. 식기 브랜드와 접시도 만들었었고, 이런 것도 했었고, 저런 것도 했었어요, 라는 말이 끊임없이 나왔다. 마치 마술사의 입 속에서 줄줄이 나오는 리본처럼. 도무지 한 사람이 24시간, 한 달, 일 년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쓰면 이 모든 게 가능한지 물을까 했지만 궁금하지 않았다. 유정인 셰프에게 문자를 보내면 그 다음날이나 돼서야 간신히 답장이 오곤 했으니까.

너무나 진부한 진리, '열심히 그리고 재미있게'. 그 진리대로 살아온 사람에게는 반복적인 업무도, 새로 맞닥뜨리는 도전도 똑같이 열심히 그리고 재미있게 (아, 무조건 예쁘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도톰해지도록. 조리대 너머 그녀의 손이 거칠어질수록 내 앞의 접시는 섬세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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