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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룬아 Mar 31. 2017

아티스트프루프 인터뷰

저녁이 되고 소공동의 불이 꺼지면 모두가 퇴근한 건물 사이 어디에선가 트럼펫 소리가 흘러나온다. 멜로디를 연주할 때도 있지만, 같은 음을 수십 번 반복해서 불 때도 있다. 이 주관적인 페이스의 소리는 밤다운 밤이 되어서야 잠잠해진다. 매일 같은 세 시간 동안 개의치 않고 들어주는 건 근처의 카포에이라 스튜디오뿐이다.

해가 중천에 뜨면 이 곳은 다시 패턴과 컬러가 가득한 실크스크린의 보물창고가 된다. 작고 네모난 공간을 가로지르는 기다란 이파리 사이로 노랗고 검은 스카프가, 뒤에서는 빙글빙글 도는 모빌이, 그 위와 옆으로는 종이를 이리저리 접은 듯한 조명과 이 모든 걸 대표하는 듯한 그림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커다란 사다리에 차례대로 걸려있는 원단도, 창가에 놓인 패턴 아카이브 북도, 곳곳에 놓인 꽃병과 쿠션과 의자도, 모두 최경주 작가 손에서 태어났다. 덕분에 무엇 하나 뒤질 것 없이 뚜렷한 존재감을 내뿜는다.

하지만 정작 이 안에 흐르는 공기는 정적이다. 잔잔한 음악 사이에서 전기포트로 물을 끓이는 소리가 바빠진 감각을 정돈시킨다. 커다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은 무겁게 공간을 감싸고, 켜켜이 쌓인 고민과 창조의 흔적을 하나로 모은다. 무심한 듯했던 주인이 따뜻한 차를 건네며 말한다. '우산이 예쁘네요.' 그리고 이 작지만 끊임없는 공간의 구석구석을 파헤칠 수 있도록 가만히 거리를 둔다.


이동열 - AP shop 운영자/트럼펫 연주자

최경주 - 회화/판화가

아티스트 프루프라는 이름이 궁금했어요. 예술가를 증명한다는 뜻인가요?


경주 - 판화 용어예요. 작품의 에디션 넘버링을 할 때 Artist Proof라는 말을 AP라는 약자로 표시해요. 아주 간단하게 가치를 나타내는 방법이죠. 이 곳의 작품은 대부분 제 손으로 만들고, 하나씩밖에 없는 것들이 많아요.


트럼펫 연주자와 판화가의 조합이 신선하고 신기하기도 해요.


동열 - 홍대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저는 밴드 활동을 하고 있을 때였고, 평생 함께 창작하며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뮤즈 같은 사람을 만나길 꿈꿨어요. 경주 씨는 친구의 친구였는데, 제가 소개시켜달라고 해서 만나게 됐죠.


어떤 면에 끌렸어요?


동열 - 전 질서가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혼자 먹고사는데 어려움이 없었고, 재미도 있었고, 그야말로 자유로웠죠. 한참을 그렇게 지내다 지루해지려던 참에 경주 씨와 마주친 거예요. 경주 씨는 호미화방에서 재료를 잔뜩 사들고 나오는 길이었어요. 친구가 맥주 한 잔 하자는데 작업해야 된다고 집으로 가버리는 거예요. 그 강단이 멋있었어요. 인상 깊었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조금 바랜 남색 폴로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그것도 스타일리시해 보이더라고요. 한눈에 반했나 봐요.

그러다 결혼까지 하게 됐죠. 전 회사를 다니고, 경주 씨는 강의를 나가고. 그렇게 5년 정도 살다가 오래도록 꿈꾸던 일이 실체로 드러난 게 아티스트프루프에요. 막연하게 상상하던 분위기의 공간과 그곳에서 연주하고 싶었던 바람이 이루어진 거죠.


남편의 퇴사를 응원했다고요. 동업은 그 자체로도 어렵고, 배우자와 불안정한 배를 함께 탄다는 건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에요.


경주 - 동열 씨가 회사에 다니면서 변해갔어요. 의류무역 업무를 했는데 항상 공장이랑 싸우고, 일정 때문에 초조해하면서 제가 좋아하던 사람이 아니게 돼버린 거예요. 같은 직장인이었더라면 이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전 그림을 붙들고 있었어요. 그러니 대비가 더 뚜렷하게 보이는 거예요. 돈이요? 직장을 다녀도 궁하고 안 다녀도 궁한데, 그럴 바엔 하고 싶은 거라도 하면서 없는 게 낫겠더라고요.

동열 - 성격이 변하는 걸 모르고 있었어요. 식당에서 음식이 늦게 나오면 따졌어요. 10분 뒤에 나온다고 하면 그 10분을 세면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거예요. 좀 사이코 같죠.

경주 - 제 모습을 보는 느낌이었어요. 저는 규칙적이고 타이트한 성격이라 동열 씨의 여유로운 모습이 좋았거든요. 어떻게 저렇게 여유롭지, 저렇게도 살 수 있구나, 좋아 보인다, 했는데.

동열 - 한편으로는 회사에서 배운 점도 있어요. 그 전에는 약속에 대한 개념이 없었거든요. 저 편한대로만 살았으니까. 일을 하면서는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도.


그런 경험이 AP 숍을 운영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겠어요.


경주 - 지금은 밸런스가 잘 맞는 것 같아요.

동열 - 직원 없이 운영하다 보면 개인적인 이유로 변동사항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전 지금까지 운영시간을 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사소한 것에서부터 자기관리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사소한 것들이 쌓여서 신뢰가 생기는 거니까요.


동열 - 여름날 늦잠을 잤어요. 안 늦으려고 땀 뻘뻘 흘리며 뛰어와서 1시에 딱 오픈했는데 하루 종일 손님이 없었어요. 뭐하러 그렇게 뛰었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회화로 시작해서 판화로 왔어요. 오랜 활동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경주 - 대학 다닐 땐 예술가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안 했어요. 그림보다 취업이 걱정이었어요. 포트폴리오는 고사하고 이력서 쓰고, 토익 시험 치고, 개인 명함을 뿌리고는 일반 회사에 취직해서 해외영업을 했죠. 그런데 정작 취업하고 보니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지더라고요. 실업급여 받을 수 있는 만큼의 기간만 정확히 채우고 퇴사했어요. 그러고는 대학원에 진학해서 판화를 배우고 계속 그림을 그려왔네요.

동열 - 경주 씨가 다시 그림을 그리고자 했을 때 집안이 조금 어려웠어요. 아버지가 IMF 피해를 입으셔서 어머니가 과외하시면서 생계를 유지했어요. 동생은 고시생이었고.

경주 - 의료보험 카드에 제일 위에 제 이름이 있었어요. 항상 아빠였는데.

동열 - 그 와중에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선포한 거예요. 어머니께서는 무작정 반대하기에 명분이 없으니 등록금이 싼 서울대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가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그런데 덜컥 붙어버린 거죠.

경주 - 학교 다니면서부터 물건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쌈지길 지하 아트숍에서 처음으로 판매를 해봤는데 반응이 즉각적으로 오더라고요. 짜릿했어요. 공부보다 물건 만드느라 시간을 많이 썼죠.


그때 상업적인 감각이 생겼나 봐요.


경주 - 형편이 어려워서 시작했던 게 지금까지 왔네요.


동열 씨는 그래픽 디자인을 하셨던데. 그런데 깊게 발을 담근 것 같진 않아요.


동열 - 학교 들어가는 것도 돈이 많이 들었는데, 그게 끝이 아니더라고요. 사진 수업을 들으려면 카메라가 필요하고, 밤새서 과제하는데 재료비도 만만치 않고. 그럴 때마다 집에 손 벌릴 수는 없었어요. 바로 옆자리에 있는 친구와의 괴리감이 들기 시작하고, 내적 갈등이 지속되다 보니 멀어지게 되더라고요. 대신 매일같이 오재미동이라는 공간에 영상 보러 다녔어요. 거기서 문화연대 영상팀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문화예술을 기반으로 지역사회 운동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어울려 다니기 시작한 게 밴드가 됐어요. 운 좋게 앨범도 냈죠. 그때부터 학교는 아예 발길을 끊었어요.


두 분 다 분야의 전환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요. 그 과정에서 배운 게 있다면?


경주 - 지금도 과정 중에 있기 때문에 명확하게 얘기하기 어렵네요. 저는 오늘도 그림을 그리고...

동열 - 경주 씨는 회화에서 판화로 확장한 거라 변화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저는 디자인하다가, 음악 하다가, 의류 무역 회사에 다니다가, NGO 활동도 했고요. 회사원만 하더라도 쌓아둔 경력을 접고 새로운 일을 한다는 건 쉽지 않은데 정체성에 변화가 많았죠. 그 과정에서 항상 직전의 단계가 그다음 일에 도움이 많이 되어주었어요.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사소한 일이라고 해도 말이에요.

AP 숍에 다녀가는 분들이 주인이 친절해서 좋다고 해요. 유난히 친절하려고 하는 게 아닌데. 제가 생각하는 친절은 더 챙겨주기보다 불편하지 않게 해주는 정도인 것 같아요. 친절보다는 호기심이 많아요. 워낙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쌓인 업력과도 같은 거예요.

경주 - 그게 우리의 가장 큰 차이점이에요. 사람에 대한 호기심.


두 분이 상반되는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경주 - 연애할 때는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결혼하고 나니 진짜 다른 사람이더라고요. 꾸준히, 자주 놀래요. 그래서 그런지 3시간 이상 같이 있으면 꼭 싸워요.

동열 - 징크스 같아요. 그래서 너무 오래 붙어있지 않도록 일부러 틈을 줘요. 경주 씨는 집에서 작업하고 저는 숍을 보는 게 잘 맞는 것 같아요.


둘의 시너지는 어떤 때에 극대화되나요?


경주 - AP shop live 같은 행사가 있을 때 괜히 제가 더 긴장되고 설레요. 좁은 공간 안에 사람들이 북적거리면 구석에서 카운터를 보면서도 묘한 에너지를 얻어요.

동열 - 평생 창작을 해나가는 데에 있어서 서로 의지가 되는 듯해요. 경주 씨가 아름다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주관적 기준이 미술뿐 아니라 음악에도 있는데, 그 안목을 굉장히 신뢰하고 있어요.

경주 - 공연이 끝나면 바로 지적이 들어가죠. 피드백을 날카롭게 하는 편이에요. 초창기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다 보니 변화가 더 잘 보이기도 하고요. 음악을 안다기보다는 느끼는 것 같아요.

패브릭 디자인을 보면 즉흥적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도형과 선, 색을 갖고 논달까. 어떻게 작업하세요? 감각에 의존하는 편인가요?


경주 - 양면적인 것 같아요. 일단 처음부터 컨셉을 세우고 작업하진 않아요. 정해진 이야기에 맞춰서 그림을 그리지 않는 거죠. 너무 분명한 것에 대한 반감이 있어요. 정말 다양한 내가 있는데 왜 한 가지로 제한해야 해요?

그리고 즉흥보다는 직관에 가까워요. 즉흥적으로 보여도 그 안에 저만의 규칙이 있거든요. 직관에는 순발력 같은 감각도 필요하지만, 그 힘을 갖기 위해서는 쌓아야 할 경험과 공부가 있죠. 관찰 단계에서는 정말 세밀하게 그려요. 그걸 계속 필터링하고, 단순화시키면서 그 과정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파생되기도 하죠.


감각도 근육과 같아서 단련이 필요하죠. 각자 어떻게 하시는지?


경주 - 을지로나 오피스 데포 같은 문구점에 가는 걸 좋아해요. 다듬어지지 않은 것들이 좋아요. 오히려 전시는 잘 안 봐요. 이미 완성된 거잖아요. 햇빛에 대한 집착도 커요. 햇빛에서 영감을 많이 받고 있어요.

동열 - 저에게 감각이란 취향과도 같아요. 좋아하는 취향을 지속적으로 접하다 보면 어느새 감각으로 드러나는데, 쌓인 감각을 보여주기 위해서도 연습은 불가피해요. 언제부턴가 규칙적인 생활을 좋아하게 됐어요. 삶이 루틴하게 돌아가는 게 지루하지 않아요. 연주자는 작곡가처럼 갑자기 3분 만에 좋은 곡을 쓴다거나 할 수가 없죠. 하루하루 꾸준히 시간을 들여서 연습을 해야만 좋은 연주가 나오니까.


모빌 같은 입체작품도 하시죠. 판화와 느낌이 비슷하면서도 달라요. 입체작업에서 느끼는 한계가 있나요?


경주 - 충분히 해보지 않아서 한계보다는 두려움을 느껴요. 아직은 구현 가능성에 대한 의심이 있어요. 한편 공간이 더 넓었으면 달랐을까, 공간이 허락된다면 어떻게 채워야 할까, 하는 다음을 항상 생각하죠. 판화는 레이어가 겹쳐서 하나의 이미지를 이루는데, 그런 면에서는 입체물도 판화작업과 비슷하게 접근해요.

동열 - 겁이 없어요. 쌓아온 작업에 애착이 생기면 틀을 흔들기 어려운데 그런 면에서 과감해요. 선택을 하는 데 있어서 스스로 확신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실행력이나 추진력이 좋고.


작업은 어떻게 진화해왔나요?


경주 - 판화를 한 지 10년이 되었어요. 20대의 작업은 지금과 완전히 달라요. 그때는 제 안의 부대낌이 심했고, 정체성을 드러내고 싶어서 양의 탈을 쓴 캐릭터를 만들어서 작업했어요.

동열 - 관심사의 이동에 따라 변해온 거죠. 초창기 작업들이 내적 갈등, 정체성의 혼란, 가족 내에서의 부담감 같은 경험을 의인화했다면 아티스트프루프는 그런 방황이 사라진 시기에 해당돼요. 하지만 갈등이 없어지면서 뭘 그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3년 정도의 공백기가 있었는데, 그동안 눈에 보이는 걸 닥치는 대로 그린 게 식물이었던 거예요. 잎이 떨어져 나가는 모습, 새순이 나는 모양 등을 매일 그렸는데 그 과정에서 관심사가 빛으로 이동했어요. 빛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고민하고 있더라고요.

경주 - 판화는 중첩되는 작업이다 보니 사물도 레이어 개념으로 보게 돼요. 빛이 테이블 위에 얹히고, 그 위에 커피잔이 얹히고. 습관이 되다 보니 회화도 입체도 판화적으로 접근하게 돼요.


다음 단계는 뭔가요?


경주 - 요즘에는 컬러를 빼고 있어요. 레이어들이 모여서 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레이어들이 겹쳐있지만 따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모여서 형태가 드러나요.


콜라보 작업이 많은데, 키티버니포니와 한 작업이 많이 알려졌어요.


경주 - 먼저 찾아갔어요. 제가 할 수 없는 부분들이 키티버니포니에서는 충분히 가능하니까요. 기술적인 면에서도, 상업적인 면에서도 수준이 높아요. 인터뷰를 찾아보니 브랜드와 대표에 대한 신뢰와 호감도 더 커지더라고요.

정말 많이 배울 수 있었던 작업이었어요. 생산뿐 아니라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달라요. 회사의 시스템에 대해서도 처음 알았고, 오히려 제약이 있어서 재미있었어요.


자신의 틀을 가장 많이 깨야했던 콜라보는 무엇이었나요?


경주 - 글쎄요. 제 생각이나 방식을 부수면서까지 해야 할 작업은 없어요. 외부 영향을 많이 받는 타입이 아니라서 그런 것 같아요.


KBP X Artistproof 전시

음악과 판화가 서로 주는 영향이 있다면?


동열 - 장르로 영향을 주기보다는 사람이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 같아요.


어떤 사람들과 함께 활동하시나요?


동열 - 같이 연주하는 사람이 잼을 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 하는 건 맞지만(그렇다고 제가 엄청난 연주자라는 건 아니고) 그다음부터는 음악적 테크닉 말고, 태도나 스타일이 중요해요. 옷을 잘 입기보다는 자기 멋이 있는 사람. 그런 면에서 우디 앨런을 좋아해요. 영화에 항상 뉴올리안즈 재즈가 들어가는데, 세련미보다는 한 시대와 지역을 잘 드러내는 음악이죠. 굳이 따지자면 트로트와도 같은 장르라고 할 수 있어요. 우디 앨런은 월요일마다 클라리넷을 연주하러 재즈 클럽에 간다고 해요. 이렇게 자기 취향이 분명한 게 좋아요. 그런 부분이 모호한 사람과는 연주할 수 없어요.


AP 숍에서 매달 소규모 공연을 하시죠. 이런 공연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겠죠?


동열 -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은 많은데 산업 자체는 하향세예요. 개인적으로는 뮤지션이 우상화되는 것도 꺼리는 편이고요. 물론 산업의 중요한 부분이고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단지 지금 한국의 문화는 획일화가 심하고, 지나치게 인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어요. 다양성이 필요하다는 얘기예요. 다양한 취향을 가진 연주자들이 고집을 갖고 연주할 수 있는 곳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였을 때 일어나는 일들이 분명히 있거든요.

AP shop live에 오시는 분들은 다른 게 좋아서 오시는 게 아니에요. 연주 자체와 그것을 감싸고 있는 공간의 분위기, 함께 나눴을 때의 에너지. 그런 걸 서로 받고 돌아가는 것 같아요.


아티스트프루프와 병행하는 게 힘들진 않나요? 전혀 다른 종류의 일인데.


동열 - 오히려 좋아요. 풀타임 뮤지션이었다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자신을 혹사시켰을 거예요. 견딜 수 있는 스트레스가 아니에요. 그런 건 저보다 더 훌륭한 뮤지션의 역할인 것 같아요. 전 너무 오래 연습하면 절망감을 느껴요. 12시간씩 연습할 때가 있었는데, 몸도 안 좋아졌지만 정신적으로 많이 나약해졌어요. 지금은 매일 3시간씩 하는데 딱 적당해요.

절 뮤지션으로 봐주는 것도 좋지만 평범한 사람, 직업을 떼어놓고 얘기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연주자라고 하면 뭔가 특별하게 보이기도 하는데 그냥 수많은 직업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저에겐 그래요.


숍 리뉴얼을 은근히 자주 하는 편인 것 같아요.


경주 - 1년에 한두 번 하려고 해요. 자꾸 새로운 걸 하고 싶네요.


다음 리뉴얼은 어떤 건가요?


동열 - 하시시박 작가님과 협업하기로 했어요. 경주 씨랑 이미지를 만들어서 원단 제작도 하고, 사진도 몇 점 걸릴 거예요. 말씀드린 것처럼 컬러가 많이 빠질 것 같고요. 아티스트프루프는 시즌제로 진행되는 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에 리뉴얼을 통해서 변화를 꾀하고자 해요. 둘이서만 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니 작가들과의 협업을 계획하고 있어요.


올해 재미있는 계획이 또 있나요?


동열 - 자작곡으로 레코딩이 나올 예정이에요. 아티스트프루프가 회화, 패션, 공예, 인테리어 등 많은 영역에 걸치게 되었는데 그게 참 재미있어요. 레코딩도 음악 씬에서만 소비되는 전통적인 방식 말고 더 모호한 경계에 있는 매체를 쓰고 싶어요. 경주 씨의 영향이 크죠. 아트디렉터로써 레코딩 회의에 참여하며 연주의 맥을 잡아주기도 하는데, 그런 걸 담고 싶어요.

경주 - 설치작업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악보의 형식을 파괴하고 자기만의 언어로 만드는 것, 각자 느끼는 대로 즉흥적으로 연주할 수 있는 것, 다른 언어를 사용해서 사람들끼리 암호를 형성하는 것.

동열 - ECM은 재즈 신에서 독보적인 레이블인데 뮤지션도 훌륭하지만 아트웍이 정말 뛰어나요. 다른 관점에서의 소장가치가 생기는 거죠. 음악이 청각 예술만은 아니라는 걸 고려하면 좋을 것 같아요.


브랜드가 상승세를 타고 있는데, 어떤 지점이 통했다고 생각하세요?


동열 - 저희도 고민하는 부분인데 잘 모르겠어요. 하고 싶은 걸 할 뿐인데 좋아해 주시니 너무 감사하고 운이 좋았구나 싶기도 해요. 그런데 이제는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어야 계획을 세우죠.


천편일률적인 디자인과 예술에서 벗어나는 신선한 느낌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지극히 대중적인 면도 갖고 있어요.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소유할 수 있는 거죠.


동열 - 아레나 잡지 편집장님과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순수 회화작가들은 상업성을 꺼리는데 아티스트프루프는 회화 작업도 좋지만 상업적인 면에서도 좋은 시너지가 날 것 같다고 해주시더라고요.

경주 - 어려운 점은, 유럽이나 일본에서는 한 자리에서 오래도록 유지가 되는데 한국에서도 그게 가능할까, 라는 부분이에요.


한국사회는 변화가 지나치게 빠르죠. 축적의 기회가 별로 없어요. 그걸 쫓아가기보다 자기의 것을 지켜내는 게 오히려 더 빠른 길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시간과 노력이 쌓여서 역사가 되고 브랜드 스토리가 자라는 게 중요하죠. 말처럼 쉽진 않지만.


경주 - 사람들은 저희가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났다고 생각하지만 전 10년간 쌓아뒀던 걸 들고 나온 것이거든요.

동열 - 공감대가 있는 지점에서 느끼는 좋음을 여러 곳에서 느끼고 싶어요. 다른 사람들의 취향도 존중하고 소비하면서.

경주 - 경쟁구도가 아니가 공유 구도로 갈 수 있다면 정말 좋겠어요. 그게 모두가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며 성장하는 방법일 것 같아요.


비가 오는 날의 쇼룸은 유독 더 하얀빛이었다. 캔버스 같은 공간을 식물과 햇빛의 흔적이 알록달록하게 메웠다. 살색 빛의 둥근 테이블에 옹기종기 앉아 따뜻한 느낌의 하얀 주전자에 뜨거운 차를 우려 얇고 매트한 네이비 머그잔에 따라 마셨다. 머그잔은 노랑, 초록 도형이 겹쳐진 작은 원단 코스터 위에 내려놓았다. 입구의 원단 행렬도, 여기저기 걸린 그림도, 인사하며 건네받은 명함 뒷면도, 무엇하나 똑같은 게 없었다. 안전한 무채색에 길들여진 감각은 밀려오는 색채와 도형의 자유로움에 위기를 느꼈다. 너무 많은 걸 잊고 지내왔다는 위기감을.

우리는 언제부터 닥터피시가 되었을까. 누군가 물에 발을 담그기만 하면 너나 할 것 없이 몰려들어 먹고살기 위해 물어뜯는다. 아티스트프루프는 그 사이에서 현란한 색의 열대어처럼 헤엄쳐 나왔다. 그리고는 사실 너희도 닥터피시가 아니라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 벽으로 둘러싸인 어항에서 벗어나 푸른 산호초로 가자고. 거기에서 같이, 또 다르게 살아보자고.


www.artistproof.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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