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오늘.

개학 후 맞은 첫 주말에.

by 보드라운 고슴도치

개학하고 처음으로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개학하면서 당분간 늦잠을 잃을 생각을 하니 아득하고 슬펐는데 더 슬프게 당분간은 주말에도 늦잠을 못 잘 예정이다. 그렇다면 오늘은 늦게 일어날 의무가 있는 날이다. 눈을 뜨자마자 의무 하나를 완료했다. 개운하다. 너무 많이 잤다고 삼성헬스가 수면 점수를 깎았던데, 네가 뭘 알아.

날씨가 좋았다. 헬스장 가기 좋은 날이다.

헬스장 천장이 투명 돔이어서 이런 날은 활짝 열렸으면 좋겠다고 문득 생각했다. 그럴 리 없으므로 열심히 운동을 했다. 다행히도 갈비뼈도 잘 붙어가므로 슬슬 복부도 살리기 시작했다.


언젠가 남친이 생기면 같이 헬스장 다니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오늘 남친과 온 마른 여성이 랫풀다운을 15킬로에 놓고 오직 팔로 깨작깨작 당기고 바벨도 무게 없이 깨작깨작 올리고 있는 것을 보고 연애를 하게 되어도 헬스장은 홀로 와야 무게를 풀로 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 헬스 열심히 하는 남자가 건설적이라고 남자는 헬스장에서 만나야 한다고 했는데, 옛날 말이라서 그분들이 다 늙으신 건지 우리 헬스장에는 할아버지들이 가득 계신다. 헬바헬이다.


헬스장 마감조처럼 운동을 마치고 호다닥 씻고 보니까 갈아입을 옷을 안 가져왔다. 이미 입고 운동한 상의와 속옷은 짜면 땀이 짜질 것만 같은데.... 생각해 보니 겨울이라 얼마나 다행이냐고 생각하고 상의는 맨몸인 상태로 입고 온 뽀글이를 걸쳤다. 아마 놀랍게도 타인은 나에게 전혀 관심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시 그러했고, 다 어떻게든 되게 되어있다 스텟이 1 올라갔다. 무사히 집에 도착해서 옷을 갈아입고 내 사랑 딸기치즈타르트에 커피 한 잔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호다닥 나왔다. 헬스 막 하고 와서 그래도 되나 고민했지만 7시에 연수 들어야 하니까 고민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어차피 이따가 모자란 걸음 채우려고 분노의 유산소 돌 거니까 괜찮을 것이다. 뭐 안 괜찮아도 어쩔 수 없다. 딸기철은 다시 오지 않는다.


호다닥 달려왔는데 오늘따라 나랑 취향 겹치는 사람이 많았는지 딸기치즈타르트가 다 팔리고 없다. 잠시 어쩌지 고민했는데, 역시 딸기철은 다시 오지 않으니까 그냥 생크림 딸기케이크를 한 피스 먹기로 했다. 천 원이 싼데, 그새 천 원 적립금이 있었어서 무려 예상보다 이천 원이나 적게 들었다. 게다가 예상하지 못하게 만난 새로운 맛이지만 역시 맛있고, 또 딸기치즈타르트가 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상황을 맞이한 거니까 그것 또한 럭키비키.


내 사랑 딸기치즈타르트를 메뚜기처럼 쓸어간 건 분하지만, 시간이 시간이라서인지 오늘따라 빵집에 빵도 별로 없고 사람도 없다. 느긋하게 앉아서 블로그에 글도 쓸 수 있고 평화롭고 한갓지고 너무 좋다. 이 또한 럭키비키.


잠시 톡방들을 살펴보다보니, 어떤 이들이 이제 올해를 시작했는데 벌써 내년을 걱정하고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왜 이 사람들은 당연히 내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물론 별 일이 없다면 당연히 내일도, 모레도, 일주일 뒤도, 한 달 뒤도 있다고 으레 생각하게 되기는 하지만, 그 또한 확률적인 문제가 아닐까? 확률적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날들을 위해서 우리는 비전을 가지고 재화와 행복을 분산할 필요가 있지만, 그리고 그 내일이 오게 된다면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 목표를 세우고 투자하는 게 삶의 동력이 되는 것은 맞지만, 오지 않은 내일이 나를 막연하게 잡아먹게끔 두는 것은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내일 때문에 선명하게 와있는 오늘을 버리는 일이 아닐까. 그렇게 맞은 내일은 뭐가 다를지.


오지 않은 내일은 누구에게나 불안하다.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은 아주 본능적인 무언가에 대해서도, 혹시나 실패할까 봐, 실패한 뒤 남은 자기 자신이 상처받을까 봐 오늘의 감정까지도 분산하고 아껴둔다고 한다. 그런 방어적인 태도로 살아가는 오늘은 자기 합리화와 자기 위안으로야 비로소 가치를 찾을 수 있는 초라하고 작은 모습으로 낡아가게 되지 않을까. 아무것도 얻지도, 이루지도 못하고.


누군가 열심히 운동하는 게 여름을 준비하는 거냐고 물었다. 거기까지 생각은 안 해봤다. 그냥 지금 운동하는 게 행복하고, 머리와 마음을 비울 수 있는데, 다 하고 나면 개운하고 달라지는 내가 뿌듯하고 신기해서 재밌어서 하는 거다. 딱히 미래의 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한다기보다는, 오롯하게 나에게 집중하는 그 순간이 행복하기 때문에 하는 일이고, 내일에 분산한 지점을 꼽자면 눈을 뜨면 하루 더 낡은 몸으로 살아갈 내가 좀 더 눈 뜨며 맞은 오늘을 몸에 대한 걱정과 불안 없이 살아가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서 더, 오늘을 가득 채우며 살아가고 싶다. 돌아봐도 후회가 남지 않게, 어쭙잖은 합리화가 있어야만 가치를 찾을 수 있는 날이 되지 않게. 지나가다 돌부리에 걸리더라도 오히려 다행인 점을 찾을 수 있게. 그런 오늘들이 쌓아 올려지는 것이 지금 보이지 않더라도 아마 지나고 보면 눈 뜨면 내일을 오늘로 맞이할 내가 존경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내가 되는 방법이 아닐까.


그렇게 오늘도 오늘의 색을 가득 채운 퍼즐 한 조각을 맞추는 하루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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