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월식처럼 궤도를 겹치듯 가까이 스쳐갔던 이를 마주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고, 아주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이해하기는 어려우나 마음이 부대끼던 지난한 날들을 헤매며 남긴 기록들을 마침내 돌아 나온 원점에서 전송한 후의 일이었다. 나는 이제 막 원점으로 돌아온 터라 다시 마주하는 게 무슨 의미일까 생각했지만, 오만하게도 내가 던진 공이고, 딴에는 상대에게도 공을 던질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길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에 급작스러운 김에 더 급작스레 마주했다.
그래, 우리의 날들은 월식과도 같았다. 누군가의 눈에는 빛을 정확히 가릴 수 있을 만큼 궤도가 정확히 일치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빛을 정확히 가리는 일은 오히려 일정한 거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빛은 어떻게든 테두리로 새어 나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더 정확히는 서로가 인지하는 거리조차 달랐다. 나는 빛을 다 막을 수 없는 가까운 거리에, 그는 빛을 충분히 막을 수 있는 거리에 존재했을 것이다. 거리는 상호적인 것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제법 자주 인간의 일은 해낸다. 그래서 나의 어떤 면이 그을리고 때로 녹아내리는 동안, 그는 따뜻하게 머물다가 간 기억으로만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추억이 다르게 적히는 이유는 추억이 되기 전에도 이미 달랐기 때문이다.
울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모든 것을 정리한 평온한 얼굴을 마주하고 울어서는 안 됐다. 나도 원점으로 돌아온 사람이니까. 지난했던 미로로 다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심지어 그 미로로는 또다시 나 혼자 들어가야 했을 것이다. 원점으로 막 도착해 숨 고르기가 다 끝나기도 전이었다는 사실을 잊었다. 그렇게 말간 얼굴로 그는 자신의 결정이 다 옳았고, 역시 아무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갔다. 그는 아름다운 마무리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 아름다운 마무리가 서로에게 같은 무게이기가 사실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아마도 몰랐을 것이다.
그 밤에 나는 한 시간에 한 번씩 잠에서 깼다. 처음에는 이유를 몰랐다. 왜 눈을 뜨면 한 시간씩만 지나 있는지를. 몇 번을 깨다가 이내 다시 잠들기에 실패하고 가만히 눈을 뜨고 생각해 보니 그는 감정으로부터 잘 멀어져 갔구나를 그저 스스로 확인하는 자리에서 나는 원점에서 휘청하는 마음이었던 게 좀 화가 났었다. 사실 감정이라는 다소 독립적인 녀석에 대해 '나는 정리를 다 했고 너의 정리를 도와주겠다.'는 마음의 여유가 어디서 나올 수 있었겠는가. 애초에 자신의 것도 마음대로 하기 어려운 것인데. 그러나 한편에서는 사실 그는 정리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의 정리를 도울 수 있을 따름임을 그저 확인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그런 차이를 가진 사람이었구나. 그래서 더 멀리 갈 수 없었고 멀리 가서는 안 됐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됐다. 나도 원점에서 좀 더 멀어진 다음에 마주했어야 했던 자리였다. 어쩌면 피천득의 인연에서처럼 세 번째 만남은 아니 만남만 못한 것이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만 같았다. 아름다운 끝은 없는 것이었다.
담백한 끝의 의식에는 때가 있었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서로를 보아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일 수 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헤어지는 당시에 잔인하게 확인되어야 했거나, 지연된 끝의 의식에서라면 아주 훗날에 그것이 당연해지는 순간이었어야 했다는 것을 간과했던 것이다. 현재는 너와 내가 원점에서의 거리차이가 있었다는 걸 잊었던 것이다. 결국 원점에 바투 서있던 나는 휘청하고 조금 후퇴할 뻔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정말 선의였다는 걸 안다. 그렇지만, 그것이 선의였다는 것이 더 날카롭게 나를 베었다. 어쩌면 내가 한 시간에 한 번씩 잠에서 깰 때 그는 모든 선택이 옳았음을 확인하고 좋은 기억만 박제해서 장식장에 넣어둔 뒤에 더욱 편안하게 잠들었겠지 하는 마음이 좀 더 잔인하게 와닿았다. 그게 맞긴 하는데, 뭔가 좀 더 나중이었어야 했다는 걸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어제가 우리의 마지막을 예쁜 리본으로까지 묶어 상자를 완성한 날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어떻게 묶은 리본 매듭이 마음에 들지 않아 리본을 다시 풀어헤친 날이 된 거였다. 그 기억은 똑같이 예쁜 리본 매듭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못했다는 말을, 그냥 전하고 싶었다. 그리고 어차피 매듭은 셀프니까. 잘 묶어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