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을 살다 간 성자 장기려 서평
하나님, 경성의전에 들어가게만 해주신다면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좀 더 가치 있는 재주를 배울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의사를 한 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습니다. <장기려 우리 곁을 살다 간 성자 중에서>
해마다 6학년 문학 통합 수업으로 장기려 박사의 책을 읽고 그가 추구했던 삶의 가치들을 살펴본다. 올해도 어김없이 2학기 첫 문학 통합 수업을 위해 장기려 책을 꺼내 들었다. 해마다 읽어도 늘 새롭고, 장기려 박사가 보여준 삶의 흔적은... 과연 이렇게도 살 수 있는 것인가... 내 안에 깊은 떨림을 준다.
한국판 어벤저스 영화를 만든다면 단연 장기려 박사가 주연이다. 조연으로는 전종휘, 한상동, 전영창, 함석헌 등… 주연 못지않은 인물들이다. 일제의 무력이 짓밟고 간 자리에, 다시금 세계열강이 작은 한반도를 두 동강 내고, 어떻게든 이 작은 나라에서 잇속을 챙기려는 고래들 싸움에 한반도에 둥지를 틀고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새우등이 터진 꼴이다. 가난과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반도에서 자기 한 몸 살아내는 것도 큰 의지가 필요했을 텐데 장기려 박사와 그의 친구들(전종휘, 한상동, 전영창, 함석헌 등)이 보여준 헌신과 희생적인 삶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이, 이렇게도 강력한 힘이었나… 내 안에 복음은 그런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새삼 되돌아보게 했다.
어느 시대든지 남들이 갖지 못한 그 어떤 것이 나에게 있다면 그것은 곧 다른 사람을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장기려와 친구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대가 없이 나눔으로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둠의 터널을 지나, 소망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한상동 목사는 장기려 박사가 빨갱이로 취조받는 현실을 묵인하지 않고 그를 도와주었다. 그때 장기려 박사가 색깔론의 희생자가 되었다면… 오늘날 장기려 박사의 그 아름다운 삶의 행적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제자 전종휘는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을 생각했던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며 복음 병동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주었다. 전영창은 그 어려운 시절에 미국 유학을 가서, 졸업과 학위도 포기하고 조국의 아픔을 끌어안았다. 비단 장기려 박사만 바보 같고 미련한 것이 아니다. 장기려의 친구들도 미련하기로 따지자면 세계 제일이다.
복음을 따라 산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산다는 것이, 어찌 보면 세상 미련한 짓이다. safety zone을 떠나, 돌아갈 다리를 끊고, 복음이 이끄는 대로 사는 삶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누구나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아니다. 이들과 동시대를 살며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있었던 것이 감사하다. 느슨해진 마음의 끈을 동이고, 어떻게 하면 이들처럼 복음이 이끄는 삶을 살아야 할까 고민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그리고 이 감동을 어떻게 제자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인지 고민은 더 깊어진다.
책에서 만나는 장기려 박사는 그 삶이 참 일관되어 있다. 권력이나 명예를 탐하거나 자신의 의술을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어찌 보면 참 미련하기 짝이 없다. 처음 복음병원은 미국의 원조와 전영창의 도움으로 천막으로 시작했다. 이후 마두원 선교사와 한상동 목사의 도움으로 건물을 짓게 되었는데 규모가 커진 만큼 복음 병원 안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제법 그 숫자가 늘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복음병원의 직원들은 공산당식 월급제 도로 각자의 수당을 받았다. 장기려 박사의 제안이었다. 장기려 박사가 스스로 아무것도 취하지 않는 모범을 보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환자가 많아지게 되었고, 설립 초기부터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돈을 받지 않았던 복음 병원은 규모가 커진 이후로 재정난에 허덕이게 되었다. 병원 운영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직원들은 이제 복음병원도 치료비를 유료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복음 병원 원장인 장기려 박사는 가난한 환자들에게 치료를 목적으로 돈을 받는 것이 영 마음에 내키지 않았고, 복음병원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감사함이라는 제도를 마련했다. 정해진 치료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치료를 받은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치료비는 내는 제도였다. 도 장기려 박사와 복음병원다운 선택이다.
똑같이 수익을 나누는 것도, 정해진 치료비를 내는 것도 실은 평등이 아닐 수 있다. 장기려 박사는 사람들 안에 있는 선한 의지와 양심을 믿고, (다른 장기려 책에 의하면 후에 치료비를 갚거나 더 큰돈으로 은혜를 갚았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생명을 살리는데 더 큰 목적을 두었다. 끝끝내 치료비를 내지 못하더라도, 복음병원이 베푼 혜택으로 환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장기려 박사는 그것을 가장 큰 자신의 소명으로 여겼다.
복음 병원의 공산당식 월급제도와 감사함 제도를 살펴보며, 우리에게 익숙한 관습과 규칙 중에 더 약자를 배려하고, 더 높은 평등의 가치를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 되었다. 교실이나 학교에서 약자를 보호하지 못하는 구조나, 관습들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혹 그러한 것이 있다면 어떻게 합의를 이끌어 바꾸어갈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며 잠시 나의 생활공간들을 살펴보았다. 장기려 박사 같은 위대한 일이 아니더라도 분명 학생들 수준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일이 있을 텐데… 함께 생각하고 함께 행동하며, 함께 선한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것이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여전히 생각 중... 아이들이 더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낼 수 있을 것 같아 실제 수업이 기대된다.)
장기려 책에 기록된 태풍 사라호는 한반도를 휩쓸었던 강력한 태풍으로 다른 기록에서도 본 적이 있었다. 전쟁 뒤에 찾아온 태풍은 다시금 한반도를 집어삼키며 사람들로 하여금 살아갈 힘도 의지도 놓게 만들었다. 정부도 대통령도 돌아보지 않은 처참한 현실을, 장기려 박사는 외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을 구해내려는 장기려 박사와 의식 있는 의료인들의 도움으로 태풍의 상처를 함께 이겨낼 수 있었다. 피난민으로 인구가 100만까지 찼던 부산에는 일정한 직업이 없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도 저도 먹고살만한 일거리가 없었던 사람들은 영도다리 밑에서 구걸을 하며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장기려 박사의 눈에는 그렇게 구걸이라도 하는 사람들은 거지로 살더라도 삶의 의지가 있어 보였다고 했다. 그런데 엄청난 자연재해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지막 실낱같은 삶의 의지마저 뺏어가 버렸고, 거적을 덮고 상처 난 몸으로 맨바닥에 누워 차라리 죽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며 분노의 눈물을 흘렸다.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지 않은 이 땅의 현실이 처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참담함의 눈물이 결국에는 장기려의 마음을 다시 한번 움직였고, 부산에 있는 의료인들을 집결하여 상처 입은 사람들을 고치는 일에 매진하게 했다.
의로운 분노가 장기려 박사를 움직이게 했다. 내 안에도 소수자, 약자의 처참한 상황들을 지켜보며 거룩한 분노가 있는지 성찰하게 된다. 올초에 제주도를 들썩이게 했던 예멘 난민들, 작은 아버님이 사역하시는 충북 괴산의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 시내에서 종종 마주치는 외국인 노동자들... 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 이후 장기려 박사는 간호학교 설립해서 후진들을 양성하고 우리나라 의료보험의 시초가 되었던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시작했다. 매달 조합비를 내서 일정 금액이 모이면, 조합원들 중에 누군가가 긴급한 치료를 필요로 할 때 적은 돈을 내고도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는데 후에 정부에서 더 기금을 투자하여 현재의 국민의료보험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아픈 사람을 위한 일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일을 성사시키려고 하는데, 자신을 위해서는 1도 욕심을 내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장기려 박사다. 치료비를 내지 못하는 환자들을 위해 자신의 월급을 늘 기꺼이 내어주었을 뿐만 아니라(그 달 월급이 다 나가면 다음 달 월급에서도 빼라고 했던...) 복음 병원이 여러 사람들의 이익다툼으로 곤란하게 되었을 때 평생을 일군 그 병원이 자신으로 인해 오명을 쓰게 될까 봐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조용히 복음병원을 떠난 사람도 장기려 박사이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까지 미련할 수 있을까... 그 모든 억울한 상황들이 과연 감내할만한 것이었을까? 평생을 어떤 대가나 이익을 바라지 않고,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는데... 복음 병원 한번 정도는 욕심을 내도 되는 것은 아니었을까? 믿었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무일푼으로 복음병원에서 나오게 되었을 때 그 심정을 어떠했을까...
복음병원에서 나왔다고 해서 의사로서의 삶이 끝난 것은 아니다. 청십자 의료 보험 조합원들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청십자 병원을 다시금 시작했다. 장기려 박사가 복음병원에서 나왔을 때가 65세였다. 88 올림픽이 열리고, 남북이 화해정책으로 들어서면서 이산가족 상봉이 조심스럽게 언급되었는데, 가족을 만날 희망에 부풀었다가 연이어 세 차례나 상봉이 무산되면서 장기려 박사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게 되었다. 장기려 박사의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 측에서 장기려 박사에게 가족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지만 자기 혼자만 이산가족을 만날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없다며 결국 북에 있는 가족과 상봉하지 못한 체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 미국에 사는 조카를 통해 북에 있는 아내의 사진과 편지, 음성이 녹음된 테이프를 받게 되었고 그것이 장기려 박사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동시대에 장기려 박사와 함께 살 수 있었던 것이 참 감사했다. 한 사람을 통해 이렇게도 세상이 변할 수 있구나를 새삼 가르쳐주었다. 모두 다 장기려 박사같이 살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 주위에 약자를 외면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장기려 박사의 청빈함과 나눔의 정신을 어떻게 내 삶에서도 실현해낼 수 있을까 고민이 깊어진다. 문학 통합 수업을 통해 이런 마음들을 깊이 잘 나눌 수 있기를, 장기려 박사 같은 삶을 살도록 도전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장기려, 그 길을 따라_박지연_출판KIATS(키아츠)_2015.12.06.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_김은식_출판봄나무발매_2006.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