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he different way Jun 24. 2020

나답게 사는 것이 존중받는 사회

나다운 페미니즘 서평


타인을 지지하고, 격려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견고하고 믿음직스러운 바위가 되는 것. <나다운 페미니즘_켈리젠슨>



한국만큼 다양성을 존중받지 못하는 나라가 있을까... 똑같은 나이에 학교에 가고,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고(남자들은 그 사이에 군대를 가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남들과 비스무리한 시기에 이와 같은 통과의례를 지나치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로부터 무수히 많은 간섭(걱정을 빙자한... 정말 걱정일 때도 있지만 극히 드문...)과 의아한 시선을 감당해야 한다.


예전에 페이스북에서 individual space를 중요시 여기는 한 여성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소음이나 신체적 접촉이 불편해서 타인과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하는데 남들 눈에는 이것이 예민하고 별나게 보여 늘 일상의 삶이 쉽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글의 저자가 인천 공항에 갔을 때 겪은 일을 썼는데... 흡사 내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일었다. 페이스북 친구 중에 내 이름을 태그를 걸어, 나를 떠올렸다며 읽어보라고 추천해서 그 글을 읽게 되었다. 글의 저자는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자연스레 소음이 많기 때문에(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는 아무리 좋은 소리라도 소음이 될 수밖에 없는...) 공공장소에서는 white noise가 나오는 헤드셋을 끼고 다닌다고 했다. 공항에서 줄을 서 있는데 뒤쪽에 엄마와 딸로 보이는 모녀가 너무 크게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너무 빈번히 몸을 밀치는(고의는 없었지만, 조심성은 없는...) 탓에 불편했고, 그래서 정중히 헤드셋을 벗고, 조금 조용히 해달라... 부딪힘을 조심해달라 부탁을 했는데 상대방에서 듣고는 별다른 반응이나 대꾸를 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나름 어렵게 그렇지만 정중히 부탁했는데... 반응이 없던 것은 그럭저럭 이해한다고 쳐도 그 이후에도 헤드셋 너머로 들리는 소음과 불쾌한 신체적 접촉은 달라지지 않았고, 다시 어렵게 그 모녀에게 같은 부탁을 했다. 다시 부탁을 할 때는 이미 소음과 부딪힘이 힘에 겨워 울기 직전의 표정이었고, 부탁도 거의 울먹거리며 간신히 말을 이어했는데 돌아오는 반응은, 사람이 많은 공항에서 부딪힘은 당연한 것 아니냐, 왜 이렇게 유난을 떠나, 별나도 한참 별나다는 식의 비난과 조롱을 들어야 했는 이야기였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기록한 글을 보며... 마치 내가 그 현장에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나는 학교에 있고, 교실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정말 다양하다. 윗글에 언급한 여성처럼 소리에 민감한 아이들이 있고, 아무리 큰소리가 나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아이들이 있다. 자신의 물건을 소중히 여겨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허락 없이 빌려가는 것을 불쾌해하는 아이가 있고, 자기 필통을 열어놓고 아무나 가져가서 써도 상관없다는 아이가 있다. 속상해서 울 때, 가까이 다가와서 위로해주는 게 좋은 아이들이 있고 아무도 없는 동굴 속에 있는 것처럼 혼자 있는 것이 좋은 아이들이 있다. 학교란 공간 자체가 많은 학생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보니, 예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획일적이고 효율을 강조한다. 그러다 보면 개개인의 특성이나 다양성은 사실 존중받기 쉽지 않다. 그러나 아이들 사이의 갈등은 대부분 다름에서 나오고, 이 다름을 서로 조금만 인정해주면 갈등은 현저하게 줄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 나와 다름에 대한 생각의 폭이 넓어지며... 이것을 기반으로 배려와 존중의 자세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나다운 페미니즘"은 옴니버스 형태의 책이다. 켈리 젠슨이 엮었지만 44인의 페미니스트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책에 담았다. 이중에는 한국 여성 작가도 있다. 페미니즘의 사전적 의미는 성별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ㆍ경제 ㆍ사회 문화적 차별을 없애야 한 다는 견해이다. 한국을 포함하여 가부장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이 많이 있고, 그 사회문화가 지배하는 방식(남성 군림)으로 오랜 시간 살아왔기 때문에 차별당하고 억압당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다.



친정엄마는 7남매 중에 둘째 딸이다. 외할머니가 딸 넷을 낳고, 외삼촌 둘을 낳으셨다고 한다. 위로 딸 넷은 아래 아들 둘을 위해 낳아진 셈이다. 외삼촌 아래로 이모 한 분이 더 계신데, 옛날 어른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들 둘 낳았으니 더 이상 낳을 필요는 없었는데 그 뱃속의 아이를 지우는 것이 외할머니의 건강을 더 해칠 수 있다는 조언에 따라 그냥 낳았다고 한다. 막내 이모는 이 세상에 빛도 보지 못할 뻔했는데(위로 아들이 둘이라...) 기적같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계란과 김을 보면 친정엄마가 늘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 "이게 그렇게 귀해서, 엄마는 어렸을 때 못 먹었어. 김이 생기면 외할머니가 외할아버지 3장, 외삼촌 2장 주시고 이모들은 안 주셨어." 김이 합쳐서 7장인데... 다 같이 한 장씩 먹으면 되는데... 왜 딸들은 안 주시는 걸까? 어린 마음에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계란도 늘 어디서 선물로 들어오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 접시에만 있고 이모들은 먹고 싶어도 한 입 먹어보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반찬은 어쩌면 차별의 아주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고, 이 땅에 한 인격체로 태어나서, 배움의 권리, 결혼의 권리, 평생 함께 살 배우자를 선택하는 권리, 더 나아가서는 그 생명마저도 여성 스스로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가 없었다.


44인의 작가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가지고 태어난 성 정체성이 바뀐 사람도 있고, 이성애자가 normal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속에서 동성애나 양성애자로서의 삶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다. 백인이 주류인 사회 속에서 흑인으로 사는 삶, 다른 나라에서 이민자로 사는 삶, 순종적인 그리스도인을 양산하는 보수적인 교회에서 전통과 관습에 반기를 들고 사는 삶이 어떠한 삶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비뚤어져있다... 유별나다... 특이하다... 이상하다... 정상적이지 않다... 는 시선과 비난을 감수하며 자기 자신의 존엄성을 지켜가고 나다움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삶이 절실한 이들의 이야기이다. 나는 신앙인으로 동성애는 반대하지만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의 시선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동성애자를 약자 소수자로 보고, 이들을 보호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을 마녀사냥처럼 이단시하는 모습은 참 보기 어렵다.


책 속 44인의 작가 중에 유일한 한국 사람인 정세랑 작가는 자신을 포함하여 여자 아이를 석고인형으로 묘사했다. "여자 아이들은 희고 무른 석고 인형으로 태어나 세상을 마주한다. 매 순간 자신에게 흠집을 내려하고 하고 깨부수려고 하는 외부 환경에 대항해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자신의 어린 시절, 여자이기 때문에 들어왔던 가학적인 언어(너는 왜 아들이 아니니? 고추는 엄마 뱃속에다 두고 왔니? 등의...) 중고등학생 때 동급생 남학생들의 성희롱, 작가가 된 이후에도 기성 남자 작가들로부터 겪었던 성추행들을 이야기하며 자신을 포함한 여성들이 억압 가운데 있어왔고, 사실은 그 모든 억압과 압력이 거짓임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한 여성의 몸과 마음은 오로지 그 여성의 것임을... 믿을 때 희고 무른 석고 인형의 상태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44인 작가의 이야기를 읽으며, 내가 대단한 페미니스트가 된 것 같은 정의로움은 들지 않았다. 약자로 사는 것이, 얼마나 고달프고 어려운 삶이었을까... 그리고 여전히 상처 나기 쉽고 깨지기 쉬운 상태로 그 삶 자체를 위협받는 여성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지가 안타까웠을 뿐이다.


저녁 시간에 후식을 먹고 남편이 식탁 아래에 떨어진 음식물을 밀대로 밀고 있었는데 내가 벌레인 줄 알고 깜짝 놀랐더니... 옆에서 이것을 지켜보던 아들이, "원래 벌레는 남자가 더 잘 잡지."라고 말했다가 나의 비난을 들었다. 그냥 일상적인 이야기였지만, 왠지... 아들이 뱉은 말속에 그래서 여자는 연약하고 나약한 존재라는 의미가 1이라도 담겨 있을까 싶어 발끈했다. "너 졸업여행 가서 Miss Roy(인도 출신의 여자 영어 선생님)가 신발 바닥으로 그리마(발이 많이 달린... 청정지역에 사는... 벌레) 쳐 죽이는 거 못 봤어? 남자 샘들 다 피해 다닐 때 Miss Roy가 다 잡았잖아." 했더니... 바로 수긍했다. 연약하여 보호받아야 할 소중한 존재로 각인이 되면 좋겠지만 연약하며 흠집 내기 쉬운 존재로 각인될까 튀어나온 말이었다.


아들 하나, 딸 하나를 키우고 있다. 늘 아들에게 이야기한다. 니가 잘해야 니 여동생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나라가 온다. 부디, 여자를 소중히 여기거라 아들아. 아직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100퍼센트 이해할 수 없겠지만 우리 집 내 아들만이라도, 여성을 하나의 동등한 인격체로, 보호받고 소중히 여겨야 할 존재로 여겨주기를 바란다.


나다운 페미니즘_코트니 서머스, 애슐리 호프 페레스, 정세랑_이랑출판_창비발매2018.06.22.







작가의 이전글 성산 장기려... 그 삶의 무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