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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종만 Oct 19. 2020

사실은 가난이 만든 황홀한 풍경

일렁이는 억새, 민둥산의 추억

  타이타닉의 구명보트에는 몇 명이 탈 수 있을까?  ‘개가 사람을 가르친다’를 4자로 줄이면? 학창 시절 한번쯤 이런 넌 센스 퀴즈를 접하고 잠시 머리를 갸우뚱거린 적이 있을 것이다. 수수께끼의 일종인 난센스 퀴즈는 상식적인 사고로는 답하기 어렵다. 상식을 깬,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는 게 이 퀴즈의 매력이니까. 첫 번째 퀴즈 정답은 9명(구명보트)이고 두 번째 답은 개인지도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새는 무엇일까?


가슴을 적시는 은빛 파도의 물결

  독수리나 매, 황조롱이 따위를 떠올렸다면 무조건 불합격이다. 난센스 퀴즈 아닌가. 정답은 으악새다. 으악~ 하고 비명을 지를 정도니 새 중에서 가장 무섭지 않겠는가. 재미있긴 하지만 상식적으로는 당연히 오답이다. 으악새는 소쩍새나 휘파람새 같은 조류가 아니고 길가나 산자락에 자라는 억새의 경기도 사투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 으악새를 조류의 하나로 착각한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본래 가수 고복수의 노래였으나 코미디언이면서 영화배우를 겸하기도 했던 김희갑이 불러 크게 히트한 짝사랑이란 노래 탓일 수도 있다.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 가요.” 이렇게 시작되는 노래를 들으면서 으악새가 억새일 줄을 어린 나이에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말이다.

  으악새가 억새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도 한 가지 의문은 남았다. 새도 아닌 으악새가 어째서 슬피 운다고 노래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저 바람에 스러지면서 서걱대는 소리를 낼 뿐인 억새가 슬피 운다고 노래한 까닭은 아주 나중에 강원도 정선의 민둥산에 올랐을 때 알게 되었다. 

  정선군 남면과 동면에 걸쳐 있는 민둥산은 억새 천국이다. 봉우리 전체가 억새로 뒤덮여 있고 나무도 거의 없다. 그러니 드넓은 억새밭 사이로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정상으로 오르다 보면 별천지를 걷는 느낌이다. 이곳 억새는 사람 키를 훌쩍 넘을 만큼 키도 크고 빽빽하게 자라고 있어 일부러 길을 내지 않은 곳은 헤쳐 나가기가 힘들 정도이다.

  그런데 이렇게 황홀경을 연출하는 민둥산 억새밭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이내 입맛이 씁쓸해진다. 그것도 땔감으로 쓰기 위해 정상 부근의 나무를 모두 벤 것이 아니라 산나물이 많이 자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매년 불을 질러 나무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가슴이 아려오기까지 한다. 화전이라도 일궈 끼니를 때워야 했던 선조들의 빈궁한 삶이 이처럼 아름답고 이국적인 풍광을 빚어냈다니, 코끝이 찡하지 않는가.


여행지의 감성을 엽서에 담아

  산 이름만 들어서는 민둥산이 무슨 동네 뒷산 같지만 그 높이는 만만치 않다. 해발 1,119미터. 서울 시민이 즐겨 찾는 삼각산 백운대가 고작 해발 836미터밖에 안 됨에도 깔딱깔딱 숨이 넘어갈 정도로 체력을 소모해야 오를 수 있음을 상기한다면, 산행에 앞서 걱정부터 될 것이다.

  하지만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산행 기점의 해발이 높기 때문에 민둥산 산행은 그리 어렵지 않다. 가장 많은 등산객들이 오르는 증산초등학교 등산로를 통하면 쉬엄쉬엄 올라도 시간 반이면 정상에 닿을 수 있다. 승용차 출입이 가능한 발구덕마을에선 30분 만에 정상에 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억새축제가 열리는 10월부터 11월 사이 주말에는 여행객들이 너무 많이 몰려 차량을 통제하니 유의해야 한다. 

  증산초등학교에서 시작되는 등산로에 접어들면 비교적 완만한 오르막이 이어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경사가 심해지면서 낙엽송 지대가 나타난다. 여기까지는 다른 산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이어지는 여기서 다시 30여 분만 오르면 풍경이 완전히 달라진다. 정상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오르막 능선 양옆으로 광활한 억새밭이 펼쳐지는데, 처음 찾는 이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내처 10분 거리인 정상에 올라서면 커다란 돌을 다듬어 세운 정상 표지석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 바로 옆에는 나무로 테라스처럼 꾸민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는데, 저 아래 증산마을과 건너편의 높고 낮은 산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탁 트인 조망이 일품인 전망대는 두 개로 나뉘어 있는데, 한가운데에 빨간 우체통이 하나 걸려 있다. 엽서나 편지를 넣으면 정상에서 음식과 기념품을 파는 마을 청년회와 정선우체국이 협력하여 무료로 배달해준다. 여행지에서 느낀 감성을 고스란히 지인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단풍이 황홀한 정선 소금강으로 

  전망대에 잠시 앉아 쉬다가 마침내 호흡이 편안해질 무렵, 문득 짝사랑이란 노래 속에서 왜 으악새 슬피 우는 가을이라고 했는지 깨닫게 된다. 방금 떠나온 산행기점 부근의 작은 마을이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정상, 거센 가을바람과 그 바람에 스러지면서 서로 부딪혀 서걱대는 억새의 소리, 아무 이유 없이 가슴이 메어지면서 억새 소리가 참으로 슬프지 싶다. 눈부신 태양 아래 너무도 행복한 순간, 문득 한 줄기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뇌가 아니라 그냥 마음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분도 잠시, 다시 전망대 너머 굽이치는 산하를 건너다보면 이내 기분이 밝아진다. 무엇보다 삼각파도인 듯 밀려드는 수많은 산봉우리들이 전해주는 가슴 벅찬 느낌이 금세 으악새 소리를 뿌리치고 다만 황홀경에 젖어들게 한다. 그렇게 기운을 차린 여행객들은 민둥산 인근에 산재한 아름다운 풍광을 찾아 다시 신발 끈을 조이게 된다.

  민둥산 인근 풍광 중에서 화암약수를 필두로 한 거북바위, 용마소, 화암동굴, 화표주, 소금강, 몰운대, 광대곡 등이 특히 유명한데 이른바 정선 8 경이라 한다. 그중에서도 몰운대, 소금강, 화암약수는 놓치기 아까운 절경이니 놓치지 말아야 한다. 몰운대는 민둥산에서 바로 연결되는 421번을 타고 가다가 424번 지방도로를 바꿔 타고 낮은 언덕을 올라가면 바로 입구가 나타나는데, 가파른 절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천하제일이다. 

  424번 지방도로를 따라 정선 방향으로 5분여 달려가면 계곡 사이로 난 도로 위 간이 주차장이 나타나고 한쪽에 표지석이 서있다. 주차장 아래에 소금강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 있는데, 그 길이가 8km나 되기 때문에 채비를 단단히 하고 나서는 게 좋다. 여기서 직진하면 화암면이 나타나는데, 왼쪽 다리를 건너가면 화암약수 올라가는 길이 연결된다. 


찾아가는 길

  중앙고속도로 제천 I.C를 빠져나와 태백까지 4차선 확장공사를 마친 38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증산마을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정선설 철교 아래를 지나면 민둥산 산행기점인 증산초교가 나타난다. 민둥산 여행은 날을 잘 맞추어 떠나면 진짜 가는 날이 장날이 되기도 한다. 인근 정선읍에서 시골 장터의 훈훈한 인심에 흠뻑 빠질 수 있는 정선5일장이 2와 7로 끝나는 날에 열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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