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함종만 Oct 19. 2020

오름인 듯 아닌 듯, 사실은 오름

백록담보다 깊은 분화구, 산굼부리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에 위치한 산굼부리는 1979년 6월 18일 천연기념물 제263호로 지정된 거대한 분화구이다. 분화구 정상부 둘레 약 2㎞, 분화구 바닥 넓이 약 2만 6000여㎡에 달한다. 주차장에서 분화구 정상부까지 높이는 약 30m로 매우 낮지만 정상에서 분화구 바닥까지의 깊이는 약 130m로 백록담 화구(115m) 보다 깊다. 덕분에 분화구 안에는 난대, 온대성 수목이 공존하는 신비로운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백록담보다 깊은 분화구 내부에 비치는 태양의 일사량과 일조시간이 다른 데서 생긴 현상이라고 한다. 


오름인 듯 아닌 듯

  산굼부리 하면 날아다니는 포유류 박쥐가 떠오른다. 독수리를 중심으로 한 조류와 사자를 필두로 한 포유류가 벌인 전쟁에서 유리한 편에 번갈아 섰다가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자 조류와 포유류 모두에게 외면당해 어두운 동굴에서 홀로 살게 되었다는 박쥐. 이솝 우화에 나오는 그 박쥐 말이다. 

  인터넷 지식백과 등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산굼부리는 기생화산, 즉 오름이다. 그것도 해발 437m의 오름이다. 하지만 막상 가보면 전혀 오름 같지 않다. 주변 지대가 해발 410m 안팎이라 화산체의 높이는 고작 30m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의 평지 같은 낮은 언덕을 올라 분화구 정상에 서면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깊이 130m로 한라산 백록담(115m) 보다 깊은 분화구가 시선을 압도한다.

  이렇게 화산체 없이 드넓은 벌판에 거대한 구덩이가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이 이솝 우화의 박쥐를 떠올리게 한다. 조류인 듯 조류 아닌 박쥐. 오름 아닌 듯 오름인 산굼부리. 

  산굼부리의 화산체 높이가 낮은 것은 화산이 분출하면서 주로 가스만 터져 나오고 마그마나 화산재 같은 물질이 뿜어져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분화구를 마르(Maar)라고 하는데, 산굼부리는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마르형 분화구라는 것이다. 

  이러한 지질학적 특성으로 인해 천연기념물 제263호로 지정된 산굼부리지만 1993년 여름 친구 신혼여행 따라 떠나온 제주도 여행 당시에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성산일출봉에서 받은 감흥이 워낙 컸기 때문일까? 아니면 성읍 민속마을에 이어 섭지코지 가는 길에 잠시 들렀다 가는 바쁜 일정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산굼부리의 상징과도 같은 억새는 아직 피지 않았고 더위만 극성을 부리는, 계절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후 수십 차례 제주도를 찾았으면서도 이상하게 산굼부리는 들르지 않았다. 산굼부리에 대한 취재 의뢰도 없었다. 그렇더라도 성산일출봉이나 섭지코지 가는 길에 잠시 들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냥 지나치기 일쑤였다. 입구를 성채 같은 벽으로 막아 놓아 안쪽 풍광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였을까, 다소 비싸게 느껴지는 입장료 때문이었을까? 아마 두 가지 모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은빛 물결 억새 장관

  2017년 가을 제주여행 당시 산굼부리를 찾은 것은 처형의 요청 때문이었다. 오름의 여왕이라는 다랑쉬오름으로 가는 길에 처형이 갑자기 산굼부리로 가서 억새 구경을 하자고 졸랐다. TV에서 봤는데 너무 멋지더라는 것이었다. 하루 전 윗세오름을 오르면서 유난히 힘들어하던 처형의 모습이 떠올라 요청을 뿌리치기 어려웠다.  

  입장권을 끊고 성문 같은 영봉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니 예전의 산굼부리가 아니었다. 예전에 방문했을 때는 그저 황량하다는 느낌밖에 없었는데, 다시 와보니 잘 꾸며놓은 공원 같아 마음이 편했다. 입구를 지나 정상으로 올라가는 왼쪽 길로 접어들자마자 잔디광장이 나타났다. 

  ‘산․굼․부․리’ 네 글자를 응용해 만든 나무의자가 시선을 끄는 잔디광장이 상큼했다. 이미 가을이 깊어가는 계절임에도 잔디는 싱그러운 초록색을 잃지 않고 있다. 불과 5분 거리, 낮은 언덕을 넘어서면 나타나는 억새의 은빛 물결이 무색할 지경이다. 담장 하나를 경계로 봄과 가을이 저마다의 계절을 주장하는 형상이다.

  새삼스러운 것은 잔디광장 여기저기 남아있는, 제주말로 산담이라 불리는, 낮은 돌담으로 둘러싸인 무덤들도 마찬가지였다. 산 자들의 놀이공간에 죽은 자들의 안식처라니. 삶과 주검이 별개가 아니라 본래 하나였다는 주장이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그러나 관광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인증 샷을 남기는데 여념이 없다. 아내와 처형도 서로를 모델로 사진을 찍고 찍히느라 정신이 없다. 나 역시 그런 아내와 처형을 모델 삼아 연실 셔터를 누르고 있다. 이 순간 산담은 산굼부리 의자처럼 그저 사진 배경의 하나일 뿐이다. 아니면 자연을 소재로 한 멋진 설치미술? 그렇게 자연스러웠다. 삶도 죽음도 산굼부리에서는.

  잔디광장을 넘어서면 산굼부리 분화구 정상이다. 한라산을 바라보고 서있는 사슴동상이 가장 먼저 시선을 잡아끈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도 전에 도착했지만, 그래도 정상이라고 기념사진을 찍으며 잠시 쉬어가는 곳이다. 

  정상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분화구 안에 한때는 사람들이 바닥을 개간해 감자나 콩 같은 작물을 심고 숯을 구워 생활했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에는 돌담을 쌓았던 흔적과 절터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반인은 직접 분화구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전망대에서 망원경을 통해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정상에서 왼쪽으로는 왕복 1.2km 거리의 구상나무 숲길이 조성되어 있는데, 걷는 동안 다양한 식물들을 접할 수 있다. 구상나무를 필두로 비자나무, 해송 그리고 인공 조림한 삼나무까지 멋진 자태를 뽐낸다. 8월 말경이면 억새 뿌리에 기생하는 야고의 연분홍 꽃을 구경할 수 있다. 진해, 거담 증세에 약효가 좋다는 잔대가 보라색의 작은 종 모양 꽃을 피우는 것도 이 무렵이다. 

  정상의 오른쪽 사면에는 억새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야말로 은빛 물결이다. 관광객들은 저마다 인증 샷을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어주고 찍고 하느라 정신이 없다. 하지만 그게 다다. 광활하게 펼쳐진 억새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내려서면 입구로 이어지는 도로가 나타난다. 


여담

  지리학적으로 의미가 크고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놓은 곳이지만 산굼부리 한 곳만 돌아보기 위해 나선 길이라면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규모가 크진 않다. 아무리 여유를 부려도 두 시간 남짓이면 충분히 돌아보고도 시간이 남을 정도다. 그래서 많은 여행객들이 서둘러 산굼부리를 구경하고 인근 관광지를 찾아 흩어진다.

  산굼부리 인근에는 당초 우리가 가려고 했던 다랑쉬오름을 필두로 용눈이오름, 백약이오름 등 오름이 즐비하다. 산책하기 좋은 교래 자연휴양림과 사려니숲길, 비자림도 그리 멀지 않다. 

  바로 인근에는 제주 삼다수를 생산하는 제주도 개발공사와 교래리의 협력으로 만들어진 삼다수 숲길과 토종닭 유통특구로 알려진 삼다수 마을도 있다. 일찌감치 산굼부리를 돌아본 우리는 걸어서 삼다수 마을까지 가서 점심식사를 했다. 메뉴는 물론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샤부샤부-백숙-녹두죽으로 이어지는 닭 한 마리 코스요리였는데, 아내와 처형도 대만족이었다. 

  제주 사람들은 물론 육지 관광객들에게도 유명한 삼다수 마을의 토종닭 요리를 처음 맛본 것은 2013년 7월 광동제약 50년 사 집필을 위해 제주도를 찾았을 때였다. 당시 광동제약은 제주개발공사에서 삼다수 판매권을 획득하여 생수사업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50년 사에 그 내용을 담기 위해 홍보담당자, 사진작가 등과 함께 삼다수 공장을 방문했었다. 

  삼다수와 제주 출장 이야기는 뒤에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고, 아무튼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규모가 커서 놀라웠던 삼다수 공장 견학을 마친 후 우리 일행은 공장 관계자를 따라 근처 토종닭 전문점에서 식사를 했다. 예의 닭 한 마리 코스요리였는데, 점심시간이 늦어져 시장하기도 했지만, 닭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토종닭 사육 농가로부터 살아 있는 닭을 들여와 직접 잡아 요리해서 그런지 참으로 맛나게 먹었다. 특히 담백하면서도 맛깔났던 녹두죽이 백미였다. 

  제주도에는 워낙 먹을거리가 많고 맛집도 적지 않지만 제주도 하면 떠오르는 흑돼지요리나 해산물 요리에 물렸다면 일부러라도 찾아가 맛볼 만하다. 그만큼 신선하고 맛나다. 5~6만 원에 3~4명이 배불리 먹을 수 있어 가성비도 좋은 편이다.


여행 Tip

  산굼부리 가려면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제주와 서귀포를 오가는 701번 버스를 타는 게 편하다. 산굼부리 입구 바로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다. 산굼부리 입장료는 다소 비싼 편이다. 성인 6,000원, 청소년/경로/국가유공자/장애인/도민 4,000원, 어린이는 3,000원이다. 

작가의 이전글 동마장 가는 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