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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종만 Oct 19. 2020

동마장 가는 길

살아보니 살아지더라는 옛말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동대문구청과 바로 옆 대형마트 자리에는 시외버스터미널이 있었다. 충주, 의정부, 춘천, 이천 등을 오가는 시외버스가 분주히 드나들던 이곳은 마장 시외버스터미널 또는 동마장터미널이라 불렸지만 행정구역상으로는 용두동 33번지에 위치해 있어 일부 이용객들은 혼란을 겪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1973년 7월 30일 자 기사를 통해 이를 꼬집기도 했다. 이후 용두동 시외버스터미널로 명칭을 바꿨지만 1989년 9월 1일 동서울 종합터미널이 신축되어 노선버스가 모두 이전하기까지, 아니 이후에도 오래 동안 동마장터미널, 줄여서 동마장으로 불렸다. 내 기억엔 그렇다.

  동마장은 내게 각별한 곳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외국으로 돈 벌러 떠난 이후 명절이나 제삿날에 외동아들이었던 내가 고향인 경기도 가평 큰집에 다녀오곤 했는데, 이때 주로 이용한 곳이 동마장이었다. 1970년이니 하마 반백년 전 이야기다. 

  큰집은 가평에서도 오지에 속하는 대보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한 시간 남짓이면 닿지만 당시에는 가는 길이 멀고도 험했다. 동마장에서 청평까지 두어 시간, 청평서 항사리까지 다시 한 시간, 이후에는 차편도 없어 걸어가야 했다. 

  그나마 명절엔 아침 일찍 출발해 밝을 때 도착했지만 제삿날에는 오전 수업을 마친 후 출발, 완전히 어두워진 후에야 도착했다. 길은 항사리에서 고개 너머로 이어졌는데, 어두운 밤길을 걸어 가파른 고개를 넘는 일이 여간 힘들고 두려운 게 아니었다. 덕분에 동마장은 즐거운 추억이 아니라 지겹고 두려운 장소로 남게 되었다. 물론 큰집 가던 기억 때문만은 아니다. 1981년 5월의 기억도 한 몫하고 있다. 

  1979년도 학번인 내게 같은 해 발생한 10.26 사태는 평범했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장님 귀머거리는 아니었으니 세상 돌아가는 사정이야 모를 리 없었지만 외국에 나간 후 소식이 끊긴 아버지를 대신해 장차 홀어머니와 세 명의 여동생을 건사해야 했던 내게 운동권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학점 관리를 위해 강의실과 도서관을 오가거나 가끔 동아리방에 나가 동료들과 어울리기 십상이었다.

  평범했던 일상에 엄청난 변화가 시작된 것은 10.26이 발생한 지 한 달도 안 된 11월 중순 무렵이었다. 그날 대학 선배 둘이 집으로 찾아왔다. 처음 본 얼굴이었음에도 반갑게 손을 내민 선배들은 점심이나 함께 하자며 중국집으로 이끌었다. 

  동네 허름한 중국집 구석방에서 짬뽕국물을 안주 삼아 독한 고량주를 입 속에 털어 넣은 선배 한 분이 갑자기 시를 암송했다.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눈을 뜨면서 뜨겁게 뜨겁게 숨 쉬는 것을 보았는가'로 시작되는 양성우 시인의 겨울공화국이었다. 이날 이후 나는 선배들이 만든 동아리에 가입해 소위 의식화 교육이란 것을 받게 되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10.26 사태 이후 각급 법원 검찰의 구속집행정지 조치로 석방된 선배들은 곧바로 모교를 찾아가 훗날 투사로 키울 후배부터 찾았다고 한다. 연극이나 탈춤, 문학 관련 동아리에 가입한 신입생이 대상이었다. 이후 전화조차 귀하던 시절이라 직접 후배를 찾아간 후 간단한 면담을 통해 포섭 작전(?)에 들어갔는데, 극회에 가입해 있던 나 역시 그렇게 포섭되었다. 

  그러나 이후 12.12 군사쿠데타, 서울의 봄, 5.18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격변의 세월 동안 나는 선배들이 기대했던 투사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더러 대열의 선두에 서기도 했지만 겁도 많고 천성이 물러 터진 내겐 가두투쟁이 맞지 않았다. 대신 특기를 살려 마당극 만드는 일에 몰두했고, 쿠데타의 주역 전두환이 예정된 시나리오에 따라 체육관 대통령이 되어 취임한 1981년 3월 초에 공연을 올렸다. 

  운동권 동료들만 모인 자리에서 은밀하게 올린 공연이었음에도 간단한 뒤풀이 후 귀가하던 길에 적지 않은 이들이 체포되었다. 나 역시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고 어이없게도 강제징집 대상자로 분류되었다. 

  차라리 빵에 가고 싶었지만 어찌 된 연유인지 함께 체포된 동료와 달리 나만 홀로 입대하게 되었다. 함께 체포된 동료들이 안기부로 끌려간 반면 나 혼자만 보안사에서 취조를 받았던 사실과 함께 아직도 미스터리한 일로 남아 있다. 

  1981년 5월 6일 새벽 인천 모처에서 동마장으로 이동한 후 인솔 요원과 함께 첫차를 타고 춘천 103 보충대로 향했다. 인천서 곧바로 데려갈 수도 있었을 텐데 동마장에서 버스로 갈아타게 한 이유 역시 미스터리다. 혹시 두어 달 동안 아들의 생사조차 모르는 어머니께 안부라도 전하라는 배려 차원인가 싶어 차에 오른 후에도 연실 창밖을 살펴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어머니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 불안한 시선으로 노선버스를 기다리는 그림자들 너머 짙은 어둠만 도사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후 진부령 골짜기에 소재한 신병교육대를 거쳐 강원도 삼척 바닷가에서 경계병으로 복무하는 동안 세 차례 주어진 휴가 때 이용했던 곳도 동마장이었다. 제대 후 큰집을 다녀오거나 벗들과 여행을 떠날 때도 동마장을 자주 이용했다. 이후 시외버스터미널이 떠난 자리에 동대문구청과 대형마트가, 맞은편 대폿집 자리에는 공원이 들어선 후에도 산책이나 쇼핑을 위해 가끔 근처를 거닐며 동마장을 추억하곤 했다.

  그 사이 미지의 세상을 향해 막연한 두려움을 안고 버스에 오르던 기억은 많이 희석되었다. 그날의 살 떨리던 공포와 막막한 불안감도 대부분 사라졌다. 강물이 모난 돌을 다듬어 동글동글한 몽돌을 만들 듯이, 끔찍했던 기억을 다듬어 추억으로 남겨주는 세월의 힘 덕분이지 싶다. 그렇게 망각의 세월 속에서 추억의 동마장 가는 길에 살아보니 살아지더라는 옛말이 결코 빈말이 아니었음을 깨닫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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