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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종만 Nov 02. 2020

동백에 취하다, 가을에 빠지다

처연한 동백, 향기로운 단풍 - 언제 가도 좋은 선운사

처연하다. 이 한마디로 충분하다. 모가지 째 부러져 툭툭 떨어져 나뒹구는 꽃송이를 보고 어떤 이는 기개가 살아 있다 입에 발린 소리도 하지만, 다가서는 봄을 문득 막아선 꽃샘추위 속에 핏빛으로 대지를 적시는 동백꽃을 보고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저 참담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아무리 최영미 시인이 선운사 동백을 보고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라 노래했다지만 채 피지도 못하고 져버린 꽃망울이 저리도 사무치는 것을.


동백꽃 향기로 기억되는 사찰

  여행지 안내를 직업으로 갖고 있으니 전국 유명 관광지 치고 안 가본 곳 없는 필자지만, 그래도 가슴속에 숨겨두고 혼자만 즐기고 싶은 여행지가 몇 곳은 있는 법이다. 영암 월출산이 그렇고 속초 봉포항, 서천 마량포구, 순천만 갈대숲이 그랬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많은 사찰 중에서도 미당 서정주의 시 <선운사 동구>로 유명한 선운사 역시 꼭꼭 숨겨둔 채 천년 고찰의 청아한 고취를 혼자서만 오롯이 즐기고 싶었다. 

  그러나 점찍어둔 여행지들이 하나 같이 알려질 대로 알려진 명승지다 보니 필자의 욕심은 헛된 꿈일 뿐 주말은 물론 평일에 찾아도 사시사철 여행객들로 붐비기 십상이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고사에서 알 수 있듯, 주머니 속의 송곳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허벅지를 찌르는 법이고 향기로운 여행지는 소문내지 않아도 인파가 들끓기 마련인 까닭이다. 

  가끔 운이 좋을 때도 있다. 지난 3월 초 갑자기 찾아든 꽃샘추위가 전국을 얼어붙게 만들었을 때, 뺨을 찢는 칼바람 속에 찾은 선운사 동구에는 열혈 등산객 몇 명을 빼고는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겨 있었다. 그렇다고 뭐 환호성을 지를 일은 아니었다. 모처럼 그윽한 풍경을 호젓하게 즐길 수 있게 되었지만, 얼어붙은 봄바람맞으며 한적한 선운사 진입로를 걷는 마음은 제법 씁쓸하였다. 

  도로 양쪽에 드문드문 서있는 키 작은 동백나무가 꽃송이를 툭툭 떨어뜨리는 풍경은 적막함을 더하였고, 간간히 내려오는 등산객을 상대로 산나물과 특산물을 판매하는 노점상의 떨고 있는 어깨는 눈을 시리게 했다. 문득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영화관을 통째로 빌려 홀로 영화를 감상한다는 어느 재벌기업 회장 이야기가 떠올랐다. 누가 그 사람을 호사가라 부러워할까. 차라리 처절한 고독감에 치를 떨지 않았을까.

  매표소 직원조차 하나의 풍경처럼 정지해 있는 듯한 일주문에 도착했을 때, 작은 위안처럼 날 선 봄바람 속에서 동백꽃향기가 느껴졌다. 물론 착각이었을 것이다. 선운사 동백나무숲이 아무리 크다 해도 일주문에서 경내에 이르는 길이 결코 만만치 않은 거리인데, 벌써부터 동백꽃 향기라니. 아무래도 일주문 앞에 서 있는 시비(詩碑) 때문인 듯하다. 온 국민의 사랑과 더러 애정 어린 질타를 받다가 지난 2000년 85세를 일기로 영면한 미당의 <선운사 동구>를 읽는 동안 절제된 시어에서 꽃향기보다 짙은 향취를 느낀 까닭이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 했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디다.>

  구구절절이 시인의 고매한 정신세계가 살아 있는 듯한 시비는 하지만 한창 진행되고 있는 관광지 조성공사로 인해 잔디밭 한쪽에 버려진 것처럼 보였다. 요란한 굉음에 쫓기듯 일주문을 넘어서니 아름드리나무 사이 고승대덕의 사리를 모신 부도와 공덕비들이 장독대 항아리처럼 줄을 맞추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항상 동백꽃향기로 기억되고 꿈속에서도 늘 그곳을 향해 달려가곤 했던, 마침내 선운사 경내에 들어섰다는 설렘에 호흡이 가빠왔다.


웰빙, 그 느림의 미학에 탐닉하다

  맞선을 보러 나갔을 때처럼 가빴던 호흡도 막상 선운사 경내에 들어서니 이내 차분히 가라앉았다. 깨끗하게 비질한 마당을 가로질러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맞아주는 대웅전 앞에 서자 설렘 대신 경건한 기운이 가슴을 채운다. 이것이 천년고찰 선운사의 힘이다. 지친 중생의 마음을 따스하게 감싸주는 은근한 포옹. 그리고 울울한 기품과 창창한 수려함으로 감탄사를 절로 터지게 만드는 동백나무숲. 가히 압권이다.

  수령 5백 년을 자랑하는 동백나무가 5천 평 숲을 이룬 선운사 뒤뜰이야말로 오늘의 선운사를 있게 했다는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다. 마치 호위라도 하듯 선운사를 둘러싸고 있는 동백나무숲은 그 규모도 규모지만, 울창한 가지마다 크리스마스트리에 매달린 작은 전구 같은 선홍색 동백꽃송이들이 보는 이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진초록 잎사귀와 선명하게 대비되는 빨간 꽃잎과 노란 꽃술이 참으로 눈부시다. 실로 처연한 아름다움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가슴을 적시는 선운사 동백은 춘백(春栢)이라 하여 타 지역 동백보다 늦게 피고 늦게 진다. 이른 2월부터 꽃이 피지만 매화꽃, 벚꽃 다 지고 난 4월에야 본격적으로 꽃망울을 터뜨리고, 5월에야 절정을 이룬다. 따라서 선운사 동백은 물러가는 봄이 아쉬운 상춘객들에게 새로운 기쁨이 된다. 바쁜 일상으로 미처 봄을 즐기지 못했던 여행객들이 선운사를 찾아와 늦게나마 봄을 만끽하곤 하는 것이다. 

  선운사를 찾은 즐거움이 여기서 끝나는 건 아니다. 선운사 여행에서 동백꽃은 그저 시작에 불과하다. 선운사 진입로에 팝콘처럼 피어오르는 벚꽃이나, 휘어진 나무를 그대로 기둥으로 사용한 대웅보전 옆 노란 수선화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울러 시간적으로 여유롭고 등산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선운산 산행도 권하고 싶다. 비록 해발 336m로 낮긴 하지만 하늘과 바다가 똑같이 붉게 물드는 황홀한 낙조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낙조대, 신선이 학을 타고 내려와 놀고 갔다는 선학암 등 규모에 비해 숨겨진 비경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아니다. 그냥 한가롭게 선운사 경내만 배회해도 그만이다. 천년고찰의 그윽함과 말끔히 영혼을 닦아주는 동백꽃향기에 취해 느긋하게 머물다, 허청허청 돌아서더라도 손해 볼 건 없다. 얼마 전부터 하나의 시대적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웰빙을 생각하면, 아무 생각 없이 느림의 미학에 탐닉하다가 홀연히 돌아서서 선운사 동구 밖을 나서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반드시 봄에 찾을 필요도 없다. 성숙한 계절, 여름, 하얗게 눈이 내리는 겨울, 그리고 계절이 마무리되는 늦가을. 사시사철 언제 가도 반갑고 아름다운 곳, 선운사니까.

  그렇게 꽃에 취하고 고적한 정취에 젖다가 마침내 돌아서서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노점상 여주인이 구수한 사투리로 발걸음을 잡아챈다. “싸게 드릴랑께 구경 좀 하고 가시시요.” 막걸리집 여자도 아닌데, 문득 미당을 떠올리며 농을 걸었다. “여기서 파는 거 국산보다는 중국산이 많다던데, 이것도 중국산 아닙니까?” 여주인은 말없이 허허 웃는다. 어쩐지 어색한 웃음이다. 

  하지만 속내를 감추지 못하고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여주인의 순박함이 오히려 가슴에 와 닿는다. 도시에서라면 세련된 어투와 짐짓 화를 내는 자세로 완벽하게 속내를 숨겼을 텐데, 차마 거짓말도 못하고 진심도 털어놓지 못한 채 그저 어색하게 웃고 마는 여주인의 모습이라니. 되레 필자가 무안하여 얼른 말린 취나물 하나를 집어 들었다. 생각보다 조금 비싼 듯싶었지만, 그렇다고 기분까지 나빠지지는 않았다.


선운사 가는 길

  선운사 가는 가장 빠르고 편한 길은 서해안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이다. 선운사 I.C를 빠져나가 이정표를 따라가면 금세 선운사 입구가 나타난다. 호남고속도로 정주 I.C 빠져나가 좌회전하여 5분여 달린 후 22번 국도와 29번 국도가 갈리는 삼거리에서 왼쪽 22번 국도로 2.8km쯤 가서 만나는 연기식당 삼거리에서 다시 좌회전해도 선운사 입구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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