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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종만 Feb 17. 2021

올무

정유재란에 얽힌 또 다른 사연

○ 시간

  크게 두 개의 시간대가 혼재된 가운데 극이 진행된다. 첫 번째 시간대는 1634년 계유년(인조 12년) 정월, 인조가 6번이나 정승을 지내고도 청빈한 삶을 살며, 말년에도 초가집에 기거하는 이원익에게 집을 하사하기 위해 도승지 이민구를 보낸 정월 초사흘과 그다음 날. 

  다른 하나는 극중극 속의 시간대로 정유재란 발발 이전인 1597년 1월부터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1597년 9월 16일 사이다. 극중극 속의 시간은 한양과 부산, 전라도 일원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빠르게 전개시키기 위해 압축되어 있고 가끔 중첩되기도 한다.


○ 무대

  무대는 열린 무대를 지향하며 극이 진행되는, 이원익의 금천 초가와 선조의 임시 거처 정릉 행궁 일원, 윤두수의 사랑방 등을 조명과 장치로 하나의 무대에서 구현한다. 무대 중앙에 단상이 있다. 단상은 이원익의 집 평상이 되기도 하고 임금의 거처나 집무실 등으로도 활용된다. 단상은 아래위로 움직인다. 단상이 내려오면 무대는 평지가 된다. 단상 뒤에 커다란 장막이 쳐있다. 장막은 정릉 행궁 이외의 무대나 그림자극을 보여주는 장치로 사용한다.


○ 등장인물

선조/ 

이원익(우의정)/ 

유성룡(영의정)/ 

이순신(삼도수군통제사)/ 

이덕형(좌찬성)/ 

이수광(이조판서)/ 

이산해(대제학)/ 

홍여순(형조판서)/ 

윤두수(판중추부사)/ 

원균(삼도수군통제사)/ 

윤근수(의금부 판사)/ 

이항복(병조판서)/ 

이정형(이조참판)/ 

이의전(이원익 아들)/ 

이수약(이원익 손자)/ 

이민구(도승지)/ 

김응서(경상 우병사)/ 

권율(도원수)/ 

사령(금천 감영)/ 

내관/

아이/ 

관노 1/

관노 2/

금부도사/

의금부 나장 1/

의금부 나장 2/

의금부 나장 3/

이순신 수하 장졸 1/

이순신 수하 장졸 2/

이순신 수하 장졸 3/

왜군 병사 1/

왜군 병사 2/

왜군 병사 3/

백성 1/

백성 2/

백성 3/



첫째 마당


어두운 무대 뒤에서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 그리고 희미하게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사이. 무대 밝아지면 멍석 위에서 늙은 이원익이 돗자리를 짜고 있다. 개 짖는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사립문 밖이 어수선하다. 사이. 사령이 한 아이의 등을 떠밀며 들어선다. 


사령 : (추워서 몸을 떨며) 이놈, 어서 들어가거라. (이원익을 보고 다소 위압적으로) 여보시오. 영감. 

이원익 : (돌아다본다.) 뉘시오?

사령 : (평상에 앉으며) 저기 금천 감영 사령인데, 이 녀석 좀 잠시 맡아주시오.

이원익 : 아이가 왜요?

사령 : 글쎄 이놈이 저기서 나무를 베려는 걸 내가 잡았지 뭐요. 나라에서 벌목을 금지한 봉산인 줄도 모르고. 

아이 : 아닙니다. 저는 나무를 베려던 것이 아닙니다.

사령 : (아이를 윽박지르는 자세를 취한다.) 그리고 이놈이 글쎄 남이 쳐놓은 올무도 유심히 살피더라니까. 아마도 산짐승이 걸려있으면 훔쳐가려고 그랬던 것 같았소.

아이 : 아니옵니다. 올무를 어떻게 쳐 놓았나 그저 살폈을 뿐입니다요.

사령 : 그래도 이놈이. (이원익을 보고) 내 이놈을 당장 감영으로 데려가 요절을 내야 하는데, 실은 사또 심부름이 바빠서. 영감이 잠시 맡아주시오.

이원익 : 맡아 두는 거야 어렵지 않으나 아이가 아니라고 잡아떼는데 그냥 보내주시지요.

사령 : 아니 영감은 어느 나라 백성이요? 국법이 엄중하거늘. 이따 이 녀석 아비, 어미도 잡아다 혼쭐을 내주려고 하오. 벌목을 금한 봉산 근처를 얼씬거리는 것만으로도 곤장을 쳐야 하오.

이원익 : 그래도 아직 어린아이인데, 너무 엄한 게 아니신지.

사령 :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영감은 이 아이나 잘 맡아주시오. 내 후딱 다녀올 테니. 

이원익 : 그럼 그러시구려. 

사령 : 잘 붙들고 있어야 하오. 혹시라도 아이가 도망치면 아이 대신 영감을 잡아갈 수도 있을 것이오. 아이를 지키지 못한 것도 국법을 어긴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아셨소?

이원익 : 알았소이다. 이래저래 사령이 고생이 많소이다. 어서 다녀오시오. 

사령 : (아이를 보고) 네 이놈. 여기 꼼짝 말고 있어라. 혹시라도 달아나는 날이면 저 영감을 네 대신 잡아다 아주 혼 구멍을 내줄 것이다. 알겠느냐?

아이 :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저는 진짜 나무를 베러 온 것이 아닙니다요. 

사령 : 이 녀석이 또? 그럼 손에 들고 있는 그 낫은 무엇이냐? 그 낫으로 호랑이라도 잡으려 했던 것이냐? (낫과 호랑이 비유에 대해 스스로 만족해하며 웃는다.)

아이 : 그건 아닙니다만. 아무튼.

사령 : (아이 말을 자른다.) 아무튼 자세한 건 이따 감영 가서 사또 앞에서 따지기로 하고, 내가 지금 바빠서 그러니까 여기 꼼짝 말고 있으란 말이다. 도망가다 잡히면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 알겠느냐?

아이 : (두려워 고개를 조아린다.) 알겠습니다요. 나리.

사령 : (다시 이원익을 보고) 영감, 아이 잘 지키고 있으시오. 이 아이 놓치면 정말로 영감을 대신 잡아갈 테니까. 알겠소? (나가면서 혼잣말로) 그나저나 영감탱이 키가 아이보다 작으니, 제대로 지키기나 하려나. 


사이. 사령 나간다. 개 짖는 소리 커진다. 사이. 이원익, 무대 뒤로 사라진다. 개 짖는 소리 점차 잦아든다. 사이. 아이, 달아날까 말까 하다가 털썩 평상에 주저앉는다. 사이. 이원익, 무대 뒤에서 작은 자루를 들고 나온다.


이원익 : (무대 앞으로 나오다가 아이를 보고) 아직도 안 가고, 있느냐? 

아이 : 하지만 제가 달아나면 할아버지께서 저 대신 잡혀가실 텐데.

이원익 : 오호라. 그러니까 나를 생각해서 달아나지 않고 있었다? 저런 기특할 지고. (부드럽게 웃는다. 사이. 손에 들고 있던 자루를 아이에게 건넨다.) 여기, 이거나 받아라. 

아이 : (얼떨결에 자루를 받으며)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원익 : 쌀은 아니고 보리쌀이다. 쌀이었으면 좋았으련만, 나도 형편이 여의치 않아 이것밖에 줄 것이 없구나. (사이) 자 어서 가 보거라.

아이 : 네? (사이) 아닙니다. 그러다 사령 나리께서 돌아오시면?

이원익 : 괜찮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마. (짧은 사이) 참 그건 그렇고 진짜 무슨 일이더냐? 봉산에 나무하러 왔다가 잡힌 것이냐?

아이 : (서둘러 부인한다.) 아니옵니다. 거기서 나무를 베면 안 되다는 거, 저도 알고 있습니다. (사이) 그저 적당한 나무 막대기 두어 개만 주워갈까 하고.

이원익 : 나무 막대기? 그건 가져다 무엇에 쓰려고.

아이 : 실을 저희 동네 뒷산에 요사이 눈이 많이 내리더니, 마을로 내려오는 토끼가 많지 뭡니까? 그래서 올무를 한 번 놓아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올무를 달아 놓을 적당한 나무토막이 없어서 구하러 가던 길에.

이원익 : 남이 쳐둔 올무에도 손을 댔다지 않더냐? 

아이 : 정말 아니옵니다. 지나는 길에 우연히 올무를 보고 잠시 구경한 것뿐이옵니다. 제가 올무 치는 요령을 몰라서 배우고자 했던 것이옵니다.  

이원익 : 그랬구나. 그럼 직접 국법을 어긴 일은 하나도 없구나.

아이 : 그러하옵니다. 할아버님.

이원익 : 그럼 가 보거라.

아이 : 네? 

이원익 : 너는 죄를 지은 게 없지 않으냐. 손에 낫을 들고는 있었지만 나무를 베지는 않았고, 올무를 살폈지만 손을 대지도 않았고. 그러니 그만 가 보거라.

아이 : 하지만 제가 이대로 가면 사령 나리가 할아버님을.

이원익 : 끝까지 내 걱정을 해주고, 참 기특한 아이로구나. (사이) 나는 괜찮으니 어서 가거라. 

아이 : (꾸벅 절한다.) 정말 고맙습니다. (사이 나가려다가 다시 돌아서면) 하지만 진짜 이대로 가도 괜찮겠습니까요? 괜히 저 때문에 할아버지께서 혼나시는 건 아니신지.

이원익 : 허허 괜찮다는 데도 그러는구나. (사이) 아니다. 잠깐 기다려 보거라. (무대 뒤 쪽으로 급히 가더니 통나무 두 개를 가져와 아이에게 건넨다.) 이것도 가져가거라. 이 정도면 멧돼지나 호랑이는 몰라도 토끼 잡는 올무는 충분히 묶어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너 올무를 놓을 줄은 아느냐?

아이 : (통나무를 받아 들고 좋아한다.) 아까 잠깐 보고 알았습니다. (통나무에 줄을 매는 시늉을 한다.) 풀 먹여 빳빳한 명주실로 올무를 만든 다음, 이렇게 나무에 묶은 후,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 두면 됩지요.

이원익 : 오호. 그렇게 해서 토끼를 잡겠다고?

아이 : 아닙니까? 

이원익 : 아무 데나 올무를 놓는다고 토끼가 와서 걸리겠느냐? 정신 나간 토끼가 아니고서야. 

아이 :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원익 : 먼저 토끼가 자주 다니는 길목을 찾은 후에, 그곳에 올무를 놓아야 하느니라. 

아이 : 그런데 토끼가 자주 다니는 길목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고 찾습니까?

이원익 : 풀 섶이나 나무 등걸에 토끼털이 묻어 있다든지, 아니면 토끼 똥이 바닥에 널려 있다든지, 뭐 그런 곳을 찾아야지. 

아이 : 그게 전부입니까?

이원익 : 그리고 토끼가 좋아하는 미끼를 올무가 있는 곳에 숨겨 놓고, 토끼를 유인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그리고 또.

아이 : 또 있습니까?

이원익 : 몰이꾼을 동원해 토끼몰이를 하면 좋겠지만, 네 형편에 그건 어려울 듯하고. 아무튼 어느 정신 나간 토끼가 있어 올무에 덜컥 걸렸으면 좋겠구나. (웃는다.)

아이 : (다시 꾸벅 절한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이 은혜는 나중에 꼭 갚아드리겠습니다. (나간다.)

이원익 : (뛰어가는 아이를 보고 손을 흔들며) 아니, 저런. 천천히 가거라. 미끄럽다. 


사이. 아이를 바라보던 이원익, 문득 고개를 들어 먼 곳을 응시한다. 마치 지난날을 회상하는 듯 눈빛이 아련하다. 사이. 다시 멍석 위로 돌아가 돗자리를 짠다. 사이. 개 짖는 소리. 이원익 사립문 쪽을 바라보는데, 아들과 손자가 들어선다. 


이의전 : (아들 이수약과 함께 이원익에게 다가가 절을 한다. 둘 모두 관복을 걸치고 있다.) 아버님, 기체후 일향 만강하신지요? (사이. 이원익에게 달려가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을 풀어 매어준다.) 아직 정월이라 날이 찹니다. 들어가 쉬시지 않으시고. 이 추운데 자리를 짜고 계시다니요. 참으로 송구스럽습니다.

이원익 : (갑작스러운 아들의 출현에 놀란다.) 여긴 무슨 일로? 기별도 없이? (손자를 보고) 수약이 너도 왔느냐? 

이의전 : 문안인사도 올릴 겸 겸사겸사 들렀습니다. 

이수약 : 할아버님, 그간 강령하시지요? 추우신데 안에 들어가 계시지 않고 나와 계십니다.

이원익 : 오늘은 볕이 좋아 괜찮구나. 해가 중천인데 이 시간에 여긴 무슨 일로? 나랏일 하는 자들이 사사로이 문안인사를 올리겠다고 온 것은 아닐 것이고.

이의전 : 그러하옵니다. 아버님. 사사로이 온 것이 아니고 공무로 온 것이옵니다.

이수약 : 그러하옵니다. 할아버님.

이원익 : 공무?

이의전 : (이수약을 바라보며) 어제 주상을 뵈었다 합니다.

이원익 : (조금 놀란다.) 주상을? 어인 일로?

이의전 : 아버님 덕분에 주상께 크게 혼이 났다지 뭡니까? (하면서 웃는다.) 

이원익 : (놀란다.) 나 때문에 혼이 났다고? 아니 대체 무슨 일이기에. 무슨 일인지 어서 낱낱이 고해 보거라.

이수약 : 할아버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실은 저와 아버님의 불효를 크게 꾸짖으셨습니다. 주상께서 40년이나 재상을 지낸 할아버님이 비와 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두 칸 누옥에 계신 걸 보고도 편히 잠이 오느냐? 이렇게 엄히 꾸짖으셨습니다. 그런 연후에 집을 내려주셨습니다.

이원익 : 허허 갚을 길도 없건만 주상의 은혜가 나날이 쌓이기만 하는구나. 지난 신미년 허락을 받아 귀향하고 몇 해가 흐르도록 매번 사람을 보내 위무해주시니, 참으로 성은이 하해보다 넓도다. 허나 이 집이 비록 누추하다지만 늙은이 혼자 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혹시라도 상께서 다시 찾아계시거든 그리 아뢰어라.

이의전 : 아닙니다. 아버님. 저희도 늘 송구스러운 마음이었사옵니다. 진즉에 억지를 써서라도 아버님을 도성으로 모셨어야 하는데. (말을 흐린다.)

이원익 : 한참 젊어서는 임금과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고, 이제 늙어서는 고향에 돌아가 안빈낙도하는 것이 선비의 길 아니더냐. 내가 좋아 내려온 것이니 너희들은 개의치 말거라.

이수약 : 아무튼 이번에 주상께서 집을 내리시면서 반드시 받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이의전 : 그렇습니다. 상께서, 향리에 물러난 후 매달 내리는 녹봉마저 사양하고 있다면서 아버님이야말로 청백리의 표상이라 하셨다 하옵니다. 하오며 이번에는 반드시 집을 지어 눈비라도 가리게 하라 하셨다니 못 이기시는 척 받으시옵소서. 

이원익 : 하지만 이미 보내 주시는 은사만으로도 충분한데, 번번이 집을 지어주신다 하시니, 대체 무슨 염치로 받는단 말이냐? 

이의전 : 주상께서 단단히 이르시기를 이번에도 거절하면 정말로 벌을 내린다 하셨답니다. 아버님이 아니라 저와 수약이에게 말이옵니다. 머지않아 궐에서 사람이 올 것입니다. 도승지 영감이 직접 어찰을 받들어 오신다고 들었습니다. 

이원익 : 참으로 주상의 은혜가 하해와 같이 크시고도 크시구나. (멀리 궁궐 쪽을 바라보며 머리를 조아린다.)

이의전 : 참 아버님도 아실 것이옵니다. 어찰 받들어 오는 도승지 영감. 

이원익 : 내가?

이의전 : 그렇습니다. 선조대왕 당시 이조판서를 지낸 이수광 대감 큰 자제십니다. 

이원익 : 지봉 대감 큰 자제?  

이의전 : 그러하옵니다. (하면서 사립문 밖을 응시한다.) 아 마침 저기 오십니다. 


사이, 도승지가 관노 1, 2와 함께 들어선다. 관노 1, 2의 지게에는 쌀가마며 면포, 돗자리, 탁자 등이 얹혀 있다. 이의전과 이수약, 도승지를 보고 인사한다. 도승지 이원익 앞으로 다가간다.


도승지 : (절을 하면서) 영상대감, 기체후 옥체 강령하신지요? 

이원익 : (절하는 도승지를 얼른 붙잡아 일으키면서) 아니 이게 무슨 일이오. 초야에 묻힌 늙은이에게. 과한 겸양이 비례이듯 과례도 예가 아니오. 어서 일어나시오.  

도승지 : 아니옵니다. 영상대감. 오래전부터 뵙고 싶었습니다. 

이원익 : 지봉 대감 큰 자제시라고?

도승지 : 그러하옵니다. 이민구라 하옵니다. 

이원익 : (도승지 손을 잡으며) 귀하신 분이 어찌 이리 먼 길을?

도승지 : 무진년 부친상 때 잠시 뵈었지만 당시는 제가 외직에 있을 때라 송구스럽게도 제대로 예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이렇게라도 뵈오니 참으로 감개무량하옵니다. 

이원익 : 대감께서 별세하신 게 정묘호란 이듬해니 하마 10년 가까이 되었구려. 

도승지 : 그렇습니다. 성현 말씀대로 세월이 살처럼 빠른 듯하옵니다. 

이원익 : 그러게 말이오. 나도 진즉 지봉 대감 뒤를 따라갔어야 하는데.

도승지 : 민망하옵니다. 그런 말씀 거두어 주십시오. 

이수약 : 그렇습니다. 할아버님. 아직 정정하신걸요. 

이원익 : 아니다. 이제 병들어 죽을 일밖에 없는 늙은이 아니더냐? 그나마 이렇게 오래 산 것도 선조대왕께서 크나 큰 은혜를 내려주신 덕분이지.

도승지 : 은혜라니요?

이원익 :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답니다. (웃는다.)


사이. 도승지를 따라온 관노 1이 지게에서 돗자리를 꺼내 바닥에 깐다. 관노 2, 역시 지게에서 작은 다탁을 내려 돗자리 위에 놓는다. 도승지, 들고 있던 어찰을 이원익에게 건넨다. 이원익 어찰을 받아 들어 다탁 위에 올려놓고 궁궐 쪽을 향해 네 번 절을 한다.


도승지 : (다탁 위에 있던 어찰을 들고 읽는다.) 일찍이 그대의 공을 모르는 바 아니나 선대로부터 40년 동안 정승을 여섯 번이나 지낸 공의 집이 두서너 칸의 바람도 못 막는 초가로구나. 이러한 청렴함은 옛날에도 없던 일이다. 오늘날 사치를 일삼는 자들이 적지 않은 터에 그대의 청렴을 모두가 본받는다면 무엇 때문에 백성의 근심이 있겠는가? 하여 그대를 본받아 귀감으로 삼으라는 뜻으로 작은 집을 한 채 내리노니 부디 사양치 말거라. (도승지 말투로) 전하께서 이번에도 아니 받으시면 자제분들을 엄히 혼낼 거라면서 당호까지 직접 지어 내리셨습니다.

이원익 : 당호까지?

도승지 : 그렇습니다. 볼 관, 느낄 감, 관감정이라 명하라 하셨습니다. 대소 신료와 백성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감동하는 곳으로 삼으라는 의미로 지으셨다 합니다. 집이 다 지어지면 현판을 새겨 걸어주라는 명도 내리셨습니다. 

이원익 : 관감정이라. (궁궐 쪽을 향해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참으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도승지 : 주상께서 나라를 구한 정승이 말년에 초가삼간 오막살이 신세라니 참으로 안타깝다 하시었습니다. 하면서 참으로 조선의 청백리는 영상대감 하나뿐이라며 반드시 내려 보낸 집을 받으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고집부리시면 아니 되옵니다.

이원익 : 아무리 그렇더라도 도승지 영감이 어찰을 받들어 오시다니. 공부를 관할하는 동부승지가 있는데.

도승지 : 그렇긴 합니다만 사실 제가 주상께 자청을 했사옵니다. 직접 찾아뵙고 예도 올릴 겸 지난 이야기도 들을 겸 겸사겸사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사이. 도승지, 이원익 앞으로 다가가 손을 잡고는 평상으로 데려가 함께 앉는다. 사이. 관노들 탁자와 돗자리 등속을 챙겨 나간다.


이원익 : (나가는 관노들을 보면서) 멀리서 왔는데, 마땅히 대접할 게 없구려.

도승지 : 아닙니다. 시킨 일이 있어 먼저 내려들 간 것입니다. 다시 올라올 것입니다.

이의전 :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도승지 : 실은 전하께서 저를 보내시면서, 영상대감 식사도 변변치 않을 테니, 기왕에 찾아뵙는 길에 따뜻한 밥이라도 한 끼 지어 올리라 명하셨습니다. 아마 조금 있으면 수라간에서 만든 음식을 지고 올라올 것입니다.

이원익 : 저런 황송한 일이. (사이) 

도승지 : 그리고 당분간 자주 찾아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집을 짓는 일이야 대목장이며 아래 것들이 하겠지만 주상께서 자주 들러보라 이르셨습니다. (사이) 영상대감, 수라간 나인들이 당도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은데, 어리석은 후학이 가르침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이원익 : 가르침이라니, 얼토당토않습니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늙은이가 아는 게 있어야지요.

도승지 : 이미 세월이 많이 흘렀으나 아직도 아버님 생각을 하면 지난 불효가 떠올라 눈물이 멈추지 않사옵니다. 이런 말씀 올려도 될지 모르겠으나 영상대감을 뵈오니 마치 아버님을 뵌 듯 마음이 정답습니다. 하오니 후학을 어여삐 여기시는 마음으로 한 말씀해주십시오. 

이원익 : 글쎄 해 드릴 말씀이 없다는데도 그러시는구려.

도승지 : 그럼 옛날이야기라도 하나 해주십시오. 

이원익 : 옛날이야기요? (웃는다.) 

도승지 : 난리 지경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호란이야 저도 겪었으니 임진년 왜란 당시 이야기 좀 들려주시지요. 들어두면 장차 위급한 상황이 닥칠 때 필시 도움이 되지 않겠사옵니까?

이원익 : 내가 크게 한 일이 없어서요. 

도승지 : 대감께서는 선대 세분의 상께서 영의정을 제수하신 분이시옵니다. 진정 만대에 이어질 충신이며 청백리이십니다. 그러니 무슨 말씀이든 내려주시면 뼈에 새겨 앞으로 살아가는데 길잡이로 삼을까 하옵니다.

이의전 : 아버님 저도 듣고 싶사옵니다.

이수약 : (아버지 이의전과 거의 동시에) 할아버님 저도요. 

이원익 : 허허 그거 참. (사이. 혼잣말로) 옛날이야기라.


사이. 무대가 서서히 어두워진다. 이원익,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원익 : 무슨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하오만, 이렇게 떼를 쓰시니 뭐라도 한 말씀드리긴 드려야겠는데. (사이) 아 그렇지. 그 이야기가 좋겠구려. 저 남쪽 바다로부터 전운이 먹구름처럼 밀려들던 정유년 정월 초하루. 그날, 경상 우병사 김응서가 장계를 하나 올려 보냈더이다. 왜장 가등청정과 평소부터 숙적 관계로 알려진 소서행장이란 자가 보낸 밀서와 관련된 장계였다오. 


사이. 무대 완전히 어두워지고 장막 뒤에 조명이 들어온다. 김응서가 장계를 읽는다. 


김응서 : 경상 우병사 김응서 아뢰옵니다. 적장 소서행장이 수하 졸개 요시라를 통해 밀서를 보내왔기에 상세히 적어 올립니다. 행장은 이미 여러 차례 올린 장계에서도 그 인물 됨됨이를 아뢰었던 자로 부산포에 머물러 있는 왜병들의 수장이옵니다. 하오며 일찍부터 명이 아니라 조선과의 직접적인 강화를 원해 제가 수차례 만나보았던 자이기도 하옵니다. 이번에 이 자가 밀서를 통해 이르기를 조선과의 강화를 반대하는 적장 가등청정이 이 달 안에 수만의 왜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출병한다면서, 여태껏 강화 회의가 성사되지 못한 것도 모두 이 자 때문으로 자신과는 철천지원수 사이라고 하였사옵니다. 아울러 아무 날에 청정이 바다를 건너올 것인데 조선 수군은 바다에서 잘 싸우므로 만약 그때 바다 위에서 공격하면 필히 그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면서 자신은 결코 출병하지 않을 터이니 삼가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하였사옵니다. 이에 소신이 군사를 이끌고 나가 영등포에 진을 치고 있는 적과 싸워보았더니 장문포에 진을 치고 있던 왜적들이 와서 구원하고, 장문포에 진을 치고 있던 적과 싸우면 영등포에 진을 치고 있던 적들이 와서 구할 뿐 행장의 군사들은 관망하고 있으면서 끝내 와서 구하지 않았습니다. 영등포나 장문포 왜적들은 행장의 수하가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하오니 전하께서는 통촉하시어 삼도수군통제사에게 출병을 명하여 주시옵소서. 


암전. 



둘째 마당


어두운 가운데 희미하게 보이는 무대는 정릉 행궁 비변사 회의실이다. 단상 위 중앙에 용상이 있고 용상 앞에 두 개의 탁자가 마주 보고 있다. 한쪽 탁자에는 남인들이, 다른 탁자에는 서인과 북인들이 약간 떨어져 앉아 있다. 사이. 서인들의 자리에만 조명이 들어온다. 그들은 회의 중이다. 그 사이 남인과 북인들은 어둠 속에 앉아 침묵한다. 


이항복 : (마치 오래전부터 회의를 해오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말을 잇는다.) 하오나 대감, 그러시다가 주상께서 우리 서인들의 의중을 눈치채신다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윤두수 : 그건 병판이 주상을 잘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상께서는 진즉부터 통제사를 내치고 싶어 하셨습니다. 신망하던 신립 대감이 탄금대에서 왜적에 대패하고 자결한데 이어 상께서도 도성을 버리고 몽진을 떠나시는 동안 일개 무관에 불과한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왜적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하질 않나, 그리하여 백성들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받질 않나. 그러니 어떠시겠소. 순신이 혹여 역심이라도 품으면 백성이 모두 그 편에 설 수도 있다 여기지 않으시겠소. 순신은 상께 눈엣가시나 같소. 우리가 탄핵 상소를 올리면 오히려 반기실 것이오.

이정형 : 일개 무반 출신인 이순신이 혹여 민심을 등에 업는다 해도 어찌 천심을 얻겠다고 모반을 꿈꾸기야 하겠습니까? 우리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가 아닙니까?

윤두수 : 모르는 소리 마시오. 이 조선이 사대부와 민심을 등에 업은 무반 출신 태조대왕께서 창건한 나라임을 잊으셨소? 

이정형 : 그게 하마 언제 적 일인데?

윤두수 : 누군가는 쉽게 잊을 일도 누군가는 오래 기억하는 법이오. 주상께서는 늘 그 점을 살펴 오신 듯하오. 그러니 이번에 장계를 빌미로 눈엣가시 이순신을 몰아내고 우리 사람을 통제사 자리에 앉혀야 합니다. 그게 주상과 우리 서인 모두를 위한 길이요.

윤근수 : 좋은 방도라도 있으십니까? 

윤두수 : 김응서의 장계가 매우 신뢰할 만하니 통제사로 하여금 수군을 이끌고 나가 부산포를 향해 올라오는 왜군과 맞서라는 명을 내리시라 주청해야 하오. 바다에서 적들을 모두 궤멸시키고 차제에 적장 청정의 목을 베어 오라 명하시라는 거지요. 

이항복 : 그러다 행장이 약속을 어겨 청정을 돕는다던지 아니면 처음부터 밀서가 적들이 꾸민 술책이라면, 그래서 속은 것이라면?

윤두수 : 그렇게 되면 우리 쪽도 잃는 것이 있겠으나 그래도 통제사를 치워버릴 수는 있으니 아주 나쁠 건 없소. 

윤근수 : 하지만 우리 수군들이 크게 패할 경우 수습하기가 쉽지 않을 터인데, 그 뒷감당은 어쩌시려고요?

윤두수 : 그걸 왜 우리가 감당합니까? 통제사가 무능해서 패한 것을. (웃는다.)

이정형 : 만약 통제사가 왕명을 어기고 출병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어쩌지요?

윤두수 : 사실 가장 바라는 게 그것이오. 그땐 왕명을 어겼으니 역도로 몰아 목을 베어야지요. 대명률에도 왕명을 어긴 자는 역도로 간주한다지 않았소? (비열하게 웃는다.) 


사이. 서인들을 비추던 조명이 꺼지고 남인들이 앉아 있는 곳에만 조명이 들어온다. 사이. 장년의 이원익으로 변모한 이원익, 슬며시 들어와 의자에 앉는다. 


유성룡 : (마치 오래전부터 회의를 해오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말을 잇는다.) 통제사에 대한 주상과 서인들의 평소 의중을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이번 일은 무심히 넘겨서는 아니 될 것 같소. 

이덕형 : 영상대감 말씀에 그른 곳이 없습니다. 저들은 필시 장계를 빌미로 상께 통제사의 출병을 명하라 주청 할 것입니다. 허면 주상께서도 못 이긴 척 출병을 명하실 터인데, 과연 통제사가 왕명을 받들지 염려스럽습니다.

이원익 : 그렇소이다. 반드시 이기는 싸움이 아니면 나서지 않는 통제사니 아무리 왕명이라 해도 확실치도 않은 적의 밀서에 근거한 출병이라면, 따르지 않을 것이옵니다. 도체찰사로 하삼도에 머무는 동안 수군 동향을 살피니, 겨울을 앞두고 관행대로 일부 격군과 군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막상 출병을 하려 해도 군사가 모자라 보이더이다. 또한 날씨며 조류며, 명분을 내세워 출병을 거부하기란 그리 어려운 게 아닙니다.

이수광 : 그리 하면 서인들은 재차 삼차 상께 출병을 명하라는 상소를 올릴 터이고, 통제사가 출병을 하지 않으면 다시 파직하라고 상소를 올릴 것이고, 이를 어찌 대처해야 할런 지.

유성룡 : 일단 적의 밀서와 장계는 신뢰하기 어렵다고 상께 주청 하는 것이 옳을 듯하오. 

이수광 : 통제사에게 조정의 사정을 미리 알리고, 출병을 권하는 건 어떻겠소이까? 

이덕형 : 그것도 좋을 듯싶습니다. 병부에서 자주 파발을 띄우고 있으니 그 편에 서찰을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원익 : 좌찬성 말씀도 그럴듯하지만 워낙 성품이 강직한 사람이라, 우리가 서찰을 보내도 권유를 받아들일 런지 모르겠소이다.

유성룡 : 우상이 나서야 할 것 같소. 공은 하삼도 도체찰사를 겸하고 있으니 통제사도 아주 모른 척하지는 못할 것이오. 서찰을 써주시오. 이곳 사정을 상세히 적고, 가급적 출병을 하거나 아니면 출병하는 모양새라도 잡아 보라 설득해 주시오.


사이. 무대 전체가 밝아진다. 대신들 자리에서 모두 일어선다.  


내관 : 주상전하 납시오.

대신들 : (선조를 향해 읍한다.) 

선조 : (용상에 앉는다.) 다들 앉으시오. (사이. 대신들을 둘러본다.) 장계는 다들 읽어 보셨소? 

대신들 : 그러하옵니다. 전하.

선조 : 그러니 어떠셨소? 과연 믿을 만하오? 

윤두수 : 그러하옵니다. 전하. 김응서는 임란 당시 평양성 전투에서 기생 계월향과 함께 적장 소서비를 죽인 용장이며, 전하에 대한 충성심이 참으로 깊은 충신이옵니다. 

선조 : 내 그자를 상세히는 알지 못하나 다소 경망스럽고 지혜가 부족한 자로 기억하고 있소. 지난번에도 사사로이 적장을 만나고, 또한 적장을 대인이라 존칭 하였다 하여 내 비변사에 추국 할 것을 논하라 명했던 터에, 그런 자의 장계가 가히 믿을 만하다?

윤두수 : 그렇사옵니다. 비록 김응서가 적장 행장을 대인이라 칭한 문서가 발각되어 성상께 심려를 끼쳐드리긴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외교상 필요에 의한 것이었을 뿐, 실은 충성스러운 전하의 신하이옵니다. 하여 비변사에서도 추국 하지 않기로 의논을 마친 바 있사옵니다. 그리고 적장 행장이 보낸 밀서도 평소 그 자의 성품으로 보아 진실된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선조 : 진실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출병을 명하라? 영상도 그리 생각하시오?

유성룡 : 적장이 보냈다는 밀서의 내용이 사뭇 구체적이지만 그렇다고 경솔히 따르다 크게 낭패를 볼까 저어되옵니다. 

선조 : 그러니 출병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렇소?

유성룡 : 그러하옵니다. 행장과 청정의 사이가 철천지원수 지간이라지만, 그렇다고 적장의 말만 믿고 출병했다가 술책에 빠져 낭패를 본다면, 천추의 한으로 남을 것입니다.

선조 : (이원익을 향해 묻는다.) 도체찰사도 그렇게 생각하시오? 그대는 누구보다도 그 지역 사정을 잘 알고 있질 않소? 

이원익 : 그러하옵니다. 임란 이후 왜는 전쟁보다 강화를 중시한다고는 하지만, 그렇더라도 우리 조선과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철천지원수 사이옵니다. 그런 적장이 아무리 우호적으로 나온다 해도, 그 자의 말만 믿고 출병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사료되옵니다. 

이산해 : 우상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계책이라 하기엔 손금 들여다보듯 또렷하게 적선이 들어오는 항로며 규모, 병사의 숫자까지, 명백하지 않은 것이 하나 없습니다. 이것만 봐도 밀서에 담긴 행장의 진심을 살펴 알 수 있음입니다. 그럼에도 출병하지 않는다면 조선수군은 천하의 용렬한 수군이라는 조롱을 피할 수 없을 것이요. 

이원익 : 그럴 리도 없지만, 혹여 조롱을 받는다 해도 낭패를 당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선조 : 그 말은 가당치 않다. 이제껏 싸워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자랑을 해온 우리 수군 아니더냐. 그러함에도 적이 두려워 출병조차 하지 못했다는 조롱을 어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이냐? 그리고 내 역시 행장의 밀서를 온전히 믿는 바는 아니지만, 행장이 밀서에 이르기를 여태껏 수차례나 강화회담에 방해되는 청정과 그 수하들 사정을 일러주었음에도 번번이 묵묵부답이니 어찌 천하의 조선수군이라 할 것이냐고 비아냥대는데 이르면, 실로 치미는 울화를 참기 어려웠노라. 그러하니 이번에는 채비를 단단히 하여 출병하는 것으로 비변사에서 의논해보라. 

이덕형 : 하오나 장계에 따르면 청정의 수군이 보름도 안 되어 부산포에 닿는다는데 전투를 준비하기에 시간이 너무 촉박하옵니다. 

이산해 : 좌찬성께서는 병조판서를 몇 차례나 역임했던 분이라 사정을 알만할 텐데도 딴 소리를 하십니다. 전투준비라는 게 평시에 하는 것이지 전투를 코앞에 두고 하는 건 아니지 않소. 아마 통제사가 미리 준비를 잘해 두었을 것이오.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던 통제사가 아니오.

홍여순 : 그렇습니다. 하시라도 출병할 채비가 되어 있을 겁니다. 통제사가 아닙니까? 


서인과 북인들 조롱하듯 웃는 사이 암전. 사이. 무대 뒤쪽에 조명 들어오면 장막 뒤에서 이순신 장계를 읽는다. 


이순신 :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아뢰옵니다. 일전에 경상 우병사 김응서가 받아 전하께 올렸다는 왜장 행장의 밀서에 대해서는 소신도 이미 알고 있사옵니다. 하오나 청정이 부산포로 들어오는 날짜와 항로, 머무는 지점까지 소상하게 적은 해도가 첨부된 행장의 밀서는 매우 그럴듯하지만 소신으로서는 온전히 신뢰하기는 어렵사옵니다. 행장과 청정은 철천지원수 같은 사이로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이라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전시에 자중지란을 일으킬 만큼 어리석은 자들은 아니옵니다. 또한 그들의 수장인 수길이 아마도 그들을 감시하고 있을 터인데, 서로 헐뜯고 모함하는 것까지야 몰라도 어찌 전투를 앞두고 조선 편을 드는 행장의 처신을 나중에라도 탓하지 않겠사옵니까? 행장도 이를 모를 리 없는데 조선수군을 동원해 청정을 도모하다니요. 소신이 판단하기에 이는 적들의 간교한 술책에 불과하옵니다. 우리 수군을 끌어들여 궤멸시키고자 행장과 청정이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혹여 수작이 아니더라도 청정을 치기 위해 먼바다로 나가려면 부산포와 거제도를 거쳐야 하는데, 이곳에 주둔하고 있는 왜병의 기세가 만만치 않사옵니다. 또한 이들은 행장의 명을 받는 군사도 아니기 때문에 조선 수군을 발견하는 즉시 공격을 해올 것이옵니다. 게다가 삼도수군 통제영 장졸 중 상당수가 전투 경험이 일천한 자들이고, 겨울을 맞아 관례대로 일부 격군과 장졸을 고향으로 돌려보낸 터라 출병이 불가하옵니다. 하오니 부디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암전. 사이. 무대 중앙에 대신들이 군데군데 서 있다. 조명이 차례로 대신들을 한 사람씩 비출 때마다 한 마디씩 한다.


윤두수 : 그렇지. 예상했던 대로, 우리가 쳐둔 그물로 바짝 다가서는구려. (회심의 미소)

이수광 : 아 통제사 영감. 이럴 줄 알고 우상 대감이 서찰까지 내려 보냈건만. (안타깝다.)

윤근수 : 이건 정직한 건지 미련한 건지, 누가 봐도 덫인 게 환히 보이는데, 제 발로 걸어 들어오다니, 이렇게 쉬운 인물을 보았나. (껄껄 웃는다.)

이항복 : 전투에는 밝은 양반이 정세 돌아가는 걸 볼 때는 눈 뜬 봉사나 다름없으니. 마른나무가 쉽게 부러진다더니, 너무 강직한 성품이 이럴 때 올가미가 되는구나. (안타까워한다.)

이덕형 : 기어이 화를 부르시다니. 게다가 하나하나 명분을 따져가며 출병을 거두시라 상께 고하다니. 불붙은 아궁이에 기름을 붓는 격 아닌가. 장차 이 일을 어찌해야 할꼬?

이산해 : 이렇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미련한 자가 있나? 스스로 무덤을 파고 눕는 형세라니. 이럴 것이면 덫이고 올무고 쳐놓을 필요도 없었던 것을. (혀를 찬다.)

홍여순 : 대저 저 혼자 잘났다고 날치는 자들이 정작 자기 앞가림은 못하는 법인데, 이 자가 바로 그런 자가 아닌가. 참으로 한심하도다. 

유성룡 : 우상이 적은 서찰 편에 그리 신신당부를 했건만. 통제사 목숨 하나가 달린 일이 아니니, 하다못해 출병하는 시늉이라도 내달라니까. 기어이 사단을 내고 마셨구려. 

이원익 : 올무에 걸린 짐승이 어째서 헤어나지 못하는지 통제사는 정녕 모르신단 말이요? 그저 앞으로 가려고만 해서, 그래서 올무를 벗지 못하는 것인데. (안타깝다.)


암전. 사이. 무대 밝아지면 비변사 회의장이다. 


선조 : (눈으로 장계를 다시 읽는다.) 행장과 청정은 철천지원수 같은 사이라지만 전시에 자중지란을 일으킬 만큼 어리석은 자들은 아니다. 겨울을 맞아 장졸을 고향으로 돌려보낸 터라 출병이 불가하다? (애써 화를 참으며 대신들을 향해 묻는다.) 그대들은 순신의 이 말이 가하다고 생각하는가?

윤근수 : 참으로 민망하옵니다. 신하 된 자로서 임금의 명을 거두어 달라 청하다니, 대명천지에 이런 일은 있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통제사는 더 이상 전하의 신하 되기를 마다한 자입니다. 당장 통제사직에서 파직하옵소서.

선조 : 파직하라? 

윤두수 : 아니옵니다. 예로부터 왕명을 거역하는 자는 역모의 죄로 다스리라 했사옵니다. 당장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하는 것은 물론이고 도성으로 압송해 엄히 추국 한 연후에 참해야 하옵니다. 

이원익 : 아니 되옵니다. 통제사가 출병의 명을 거두어 달라 청한 것은 충심에서 비롯된 것이옵니다. 혹여 왜적이 흘린 그릇된 정보를 믿고 출병했다가 낭패를 당해 전하의 병사와 백성을 잃을까 우려한 것이옵니다. 통제사를 파직하고 참수하라는 것은 과한 주장이옵니다.

윤두수 : 전하, 결코 과한 주장이 아니옵니다. 전일에 도원수 권율이 소신에게 편지를 보내왔는데, 행장이 도원수께 밀서를 보내 이르기를 청정은 더 이상 나의 무리가 아니다. 조선에서 비록 그들을 죽이더라도 내가 가서 구할 리 없다고 했다 하옵니다. 그럼에도 기회를 놓쳐 이미 청정이 부산포를 통해 울산에 진을 쳤다 하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옵니다. 

홍여순 : 그러하옵니다. 통제사가 제 때 출병했으면 청정을 잡아들일 수 있었을 터인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런 불충을 저질렀으니 응당 통제사에게 죄를 물어 마땅하옵니다. 당장 통제사를 도성으로 압송하여 엄히 추국 하심이 옳은 줄로 아뢰오.

서인들 : 당장 압송하여 추국 하심이 옳은 줄로 아뢰오.

유성룡 : (대신들을 돌아보며) 지금 무슨 말씀들을 하시는 것입니까? 예로부터 전장의 사정은 장수에게 맡기는 것이라 아니했소이까? 그런 통제사를 잡아들여 추국을 하라니요? 

홍여순 : 허나 영상도 생각해 보시오. 왜적을 궤멸하고 적장을 잡아들일 수 있는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차 버린 자가 장수입니까? 겁에 질린 졸장부 아닙니까?

이원익 : 형판 대감, 말이 좀 지나치십니다. 목숨을 걸고 싸운 통제사에게 졸장부라니요? 통제사는 임란 이후 단 한 번도 전투에서 패하지 않은 장수 중 장수입니다.

윤두수 : 그렇소이다. 전투에 나갔다 하면 이겨온 이순신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번에는 출병을 않는단 말입니까? 그동안 하도 이겨서 이제는 싸우는 일에 싫증이라도 났다는 겁니까? 

이산해 : 아니오. 본래 이순신은 나가 싸우기를 누구보다 두려워하는 자라 들었소. 임란 때도 충분히 이길 기세가 아니면 결코 바다로 나가지 않으려고 해서 한 번은 정운 장군이 참수를 하려 하자 그제야 억지로 출병을 한 적도 있다 하더이다. 아무튼 한심하기 이를 데 없소이다. 상께서 청정의 목을 베어 오라 하신 것도 아니고 배를 띄워 시위라도 하라는 명조차 거둬 달라니. 

이원익 : 통제사만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동안 군졸과 격군들에게 내리는 녹봉이 항상 부족해 끼니를 채우지 못하는 날이 채우는 날보다 많았다 하옵니다. 그 일로 군령이 서지 않아 호령을 내려도 행하여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옵니다. 

윤두수 : 오죽 변변치 못하면 군졸이 호령을 해도 행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그리고 내려 보낸 녹봉은 다 어디로 가서 끼니를 밥 먹듯 거른단 말이오?

이원익 : 녹봉을 받아 전달하는 지방수령들 중에 탐관오리가 적지 않아 열을 내려 보내면 다섯을 가로채는 이들도 있다 하니 이들이야 말로 역적이라 할 것입니다. 또한 심히 외람된 말씀이 오만 항간에 녹봉을 싣고 가는 수레가 반드시 대감댁 곳간을 거친다는 소문도 있사옵니다.

윤두수 : 뭣이오? 어디서 그런 근본 없는 소문을. 

선조 : 뭐라? 녹봉을 실은 수레가 판중추부사 곳간을 거쳐 간다?

윤두수 : 모함이옵니다. 전하. 

서인들 : 모함이옵니다. 전하. (여러 차례 반복한다.)

선조 : 아아 되었소. 지금은 그걸 논하기 위해 모인 자리가 아니오. 그건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고 이순신을 어찌하면 좋은지 그에 대해서만 논해 보시오.

윤두수 : 망극하옵니다. (사이) 이순신 그자가 왕명을 어기고 조정을 기망했으니 당장 압송해 추국 하심이 옳은 줄로 아뢰옵니다.  

이산해 : 그러하옵니다. 통제사는 남의 공을 가로채 자신의 공으로 삼는 파렴치한 자이옵니다. 지난번에도 도체찰사 휘하 허수석이란 자가 부산포 왜병 진지에 화공을 감행하여 군량과 선박 여러 척을 불태웠는데, 통제사가 자신의 수하들이 세운 공이라고 거짓 장계를 올리지 않았습니까? 파렴치한 통제사를 파직하시고 속히 잡아 올려 엄히 추국 하심이 옳은 줄로 아뢰오.  

이원익 : 하오나 그 일은 통제사 휘하에 있는 거제현령 안위와 군관 김난서가 불이 붙은 부산포 왜군 진영을 우연히 목격하고 자신들이 화공을 도모해 공을 세웠다고 거짓 보고를 한 데서 비롯된 일입니다. 이미 판명이 난 일이옵니다. 

선조 : 그러하나 고작 수하 장졸이 올린 거짓 보고 하나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조정을 망신시킨 건 사실이 아닌가. 순신의 능력이란 것이 고작 그 정도라면 통제사 그릇은 아닌 것이다. 

홍여순 : 그렇사옵니다. 모름지기 집을 지을 때도 처음부터 대들보와 서까래 재목이 따로 있다 하옵니다. 이번 순신의 행실로 보아서는 차라리 적장 행장에게 통제사 자리를 넘겨준다 한들 반대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선조 : 내 비록 이순신의 사람됨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지략은 많이 부족한 듯하다. 임진년 이후에 한 번도 출병을 하지 않았고, 이번 일도 하늘이 준 기회를 취하지 않았으며, 차제에 왕명까지 거부하니 내 어찌 매번 용서할 것인가. 금부도사는 무엇하는가? 의금부 나장들을 이끌고 한산도에 내려가 역적 이순신을 당장 잡아들이라.


암전. 사이. 장막 뒤에 이순신의 그림자가 보인다. 조용한 가운데 시조를 읊는다. 


이순신 : 한산 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나의 애를 끊나니.


사이. 장막 뒤에 금부도사와 의금부 나장이 나타난다. 이순신의 수하 장졸이 칼을 빼들고 금부도사 일행을 막아선다. 이순신 이들을 말리며 순순히 오라를 받는다. 무대 밝아지면 그림자 사라지고 이원익의 초가다.


도승지 : 영상대감, 오늘 만나 뵈어 참으로 좋았습니다. 좋은 말씀도 많이 들었습니다.

이원익 : 나도 오랜만에 즐거웠소이다. 그나저나 상께서 베풀어주신 은혜가 이리 큰 데 쓸모없이 늙은 몸이라 갚을 길이 없구려. 참으로 감읍해하더라고 성상께 말씀 좀 올려 주시오.    

도승지 : 여부가 있겠습니까? 꼭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들려주신 말씀 잘 들었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내일 들어야겠습니다. 

이원익 : 내일도 오신다고?

도승지 : 그러하옵니다. 내일 일꾼들과 다시 찾아와 차후 계획을 의논해야지요.

이원익 : 그럼 조심해 돌아가시오. (손을 흔들어 배웅한다.)

도승지 :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가고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인사하고 나간다.)


사이. 둘이 인사하고 헤어지는 가운데 암전.



셋째 마당


사이. 무대 뒤편에서 이순신 오라에 묶여 끌려오고 있다. 압송되는 이순신을 보고 백성들이 원통해하며 울부짖는다. 사이. 이순신이 사라진 쪽에서 이번엔 새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원균이 행차를 시작한다. 슬픈 곡조의 음악과 흥겨운 가락의 노래가 서로 교차되는 가운데, 이순신에 대한 추국이 시작된다.


선조 : (단상 위에 서서 순신을 내려다보며) 죄인은 고개를 들라. 그대는 왕명을 어겼으니 참형으로 다스리는 것이 옳은 일이나 그래도 지난날 세운 공적이 있으니 먼저 죄를 자복하고 선처를 호소하면, 내 달리 생각해 보겠다. 순순히 죄를 자복하겠느냐?

이순신 : 전하 충신을 죄인이라 모욕하시니 참으로 원통 하나이다. 

선조 : 진정 네 죄를 모른단 말이냐? 말귀가 어두운 것 같아 다시 묻겠다. 내가 파발을 내려 보내 청정의 군사를 막으라고 명했던 것을 기억하느냐?

이순신 : 그러하옵니다. 

선조 : 명을 받은 직후 명을 거두어 달라고 곧바로 장계를 올렸다. 역시 기억하느냐?

이순신 : 네. 전하. 그러하옵니다. 

선조 : 이에 다시 어찰을 보내 출병하라 명한 사실도 기억하느냐?

이순신 : 그러하옵니다. 하오나.

선조 : 하오나? 지금 하오나라 하였느냐? 왕명의 지엄함을 논하고자 함인데, 너는 여전히 하오나라 하느냐? 너는 대체 어느 나라 장수더냐? 어느 왕의 신하더냐?  

이순신 : 하오나 예로부터 전장의 일은 전장에 있는 장수에게 맡기라 하지 않았습니까? 멀리 떨어진 도성에서는 전장의 형편을 살피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선조 : 지금 나를 가르치려 드느냐? (사이) 내 아무리 아둔한 왕이라 한들, 설마 적장의 밀서만을 믿고 출병을 명했다 생각하느냐?

이순신 : (말이 없다.)

선조 : 내가 비록 도성에 머물러 있지만 나라 형편이 바람 앞에 등불인데, 잠인들 편히 잘 것 같으냐? 궁궐에 주저앉아 귀라도 막고 있는 듯싶으냐? 체찰사를 보내 사정을 살피고 지방수령들이 수시로 올리는 장계를 밤새 읽고, 비변사를 소집해 논의하고. 그런 논의 끝에 마침내 출병을 명했음인데, 너는 작은 지략으로 왕명을 어겼으니, 이러고도 역적이 아니라 하겠느냐?

이순신 : 하오나 병법에도 장수가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판단이 서면, 군주가 싸우지 말라고 명령해도 반드시 싸우는 것이 옳으며, 이기지 못한다는 판단이 서면, 군주가 싸우라 명령해도 싸우지 않는 것이 옳다고 하였나이다. 또한.

선조 : (말을 자르며) 그놈의 병법. 어째서 무신들은 병법은 금과옥조로 삼으면서 더 넓은 것은 볼 줄 모르는가? 들어 보거라. 비변사에서 논의하기를 명과 왜의 강화회담이 우리 조선의 뜻과 다른 길로 가고 있던 차에, 풍신수길이 강화회담을 유리하게 이끌고자 청정에게 군사를 주어 다시 조선을 친다 하니, 강화회담을 성사시켜 하루빨리 왜국으로 돌아가려 안달이 난 행장이 밀서를 보내, 이참에 막강한 우리 수군을 보내 청정과 그의 군사를 궤멸시켜 달라 하여, 출병을 명한 것이었다. 이로써 우리 조선의 확고한 의지를 천하에 펼쳐 보이고자 했음이다. 그런데 너는 부족한 지략과 사사로운 감정으로 왕명을 거역한 것이다. 알겠느냐?

이순신 : 하오나 아무리 주상의 뜻이 넓고 지고한 것이라 해도 당시로서는 받잡기 어려웠나이다. 적들이 쳐놓은 줄 뻔히 알면서도 그 덫을 향해 다가간다면, 그것은 어리석음을 넘어 장수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옵니다. 그러니 아무리 왕명이 지엄하다 해도 군을 통솔하는 장수로서 의미 없이 출병하여 몰살을 당할 수는 없었나이다. 제 충심을 믿어주시옵소서.

윤두수 : (혼잣말) 참으로 어리석도다. 왜적이 쳐놓은 덫은 보면서 상께서 쳐둔 올무는 기어이 못 본단 말인가. 

선조 : 너는 매양 충을 말하지만, 그저 입으로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충이라면 어찌 진정한 충이라 하겠느냐. 충이란 삿된 생각 없이 임금께 온몸으로 실천하는 것이거늘. 또한 자고로 말이란 생각을 담는 그릇일진대, 너의 그릇은 깨지고 금 간 곳이 많으니 과연 물이라도 담겠느냐? 너의 충이란 스스로를 그르치고 끝내 나라를 망하게 할 충이로다.

이순신 : 전하. 세상에는 크고 작은 그릇이 여럿 있사옵니다. 또한 충은 무엇입니까? 가운데 중에 마음 심. 마음 한가운데 항상 자리하고 있는 게 아니옵니까? 그러니 표현이 다르다고 진실조차 다르겠습니까? 그릇이 다르다고 물맛까지 달라지겠나이까? 

선조 : 참으로 방자하구나. 볼 것 없이 역적이로다. 충이란 온몸으로 받드는 것이라 그렇게 이르건만, 귀가 있으되 듣지 못하고 입이 있으되 허튼소리만 나불대는구나. 저렇게 입으로만 충을 노래하고 몸으로는 따르지 않는 자가 역적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나장들은 무얼 하느냐? 저 불충한 몸이 충을 기억하도록 어서 주리를 틀고 단근질을 시작하라.


빠른 암전. 어둠 속에서 이순신의 비명 소리 이어지면서 서서히 암전. 사이. 무대 뒤에서 선조의 목소리 들려온다. 


선조 : 이순신이 조정을 기망한 죄는 임금을 무시한 죄이고 적을 놓아주고 치지 않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이며, 심지어 남의 공을 가로채고 모함하기까지 하며 방자하지 않음이 없으니 기탄함이 없는 죄다. 이렇게 허다한 죄상이 있고서는 법에 있어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니 율을 상고하여 죽여야 마땅하다.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므로 지금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여 실정을 캐어내려 하는데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경들은 이에 대해 하문하라.


무대 한쪽에 조명이 들어온다. 남인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다.


유성룡 : 주상께서 아주 작정을 하신 모양입니다. 이대로 가면 통제사의 목숨도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이수광 : 어떻게든 참형만은 막아야지요. 통제사가 참형을 당하면 우리 남인들의 미래도 어둡습니다. 

유성룡 : 하지만 전하께서 저리 확고하시니.

이원익 : 그래서 영상께서는 통제사를 버리자는 말씀이십니까? 

유성룡 : 대감, 그게 무슨 말씀 이시오? 통제사를 버리다니. 다만 통제사를 살리려다가 자칫 우리 남인 모두가 요절날 기세니, 달리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오. 

이원익 : 요절을 내신다면 남인 모두 요절이 나야지요. 그렇게 해서라도 통제사를 살려야 합니다. 통제사를 잃으면 남인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조선이 요절날 것입니다. 

이덕형 : 그렇습니다. 통제사의 목숨만은 구해야 합니다. 

유성룡 : 난들 그걸 모르겠소? 그러니 어찌하면 되겠소?

이원익 : 이렇게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영상께서는 윤두수 대감을 만나 통제사의 구명을 부탁해 보십시오. 저는 주상을 찾아뵙겠습니다. 


남인들이 회의를 계속하는 가운데, 서서히 무대 어두워진다. 사이. 무대 한쪽에 조명이 들어온다. 윤두수의 집 사랑방이다. 


윤두수 : 시간이 야심한데 영상께서 어인 일로?

유성룡 : 야심한 시각에 결례를 하게 되어 송구하오이다. 하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실례를 좀 해야겠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감께선 정녕 통제사를 죽일 작정이십니까? 

윤두수 : 그럼 주상께서 작정하고 나서신 걸, 저 같은 늙은이가 어찌하겠습니까?

유성룡 : 비록 우리가 당색은 다르지만 상과 나라를 위하는 마음까지야 다르겠습니까? 앞날을 생각해서라도 일단 통제사 목숨은 살려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설마 대감께서도 원균이 왜적을 막아내리라 믿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윤두수 : 왜 아니겠소? 원균이 성격이 급하고 포악한 구석이 없지 않으나 그래도 용맹하고 충성스러운 장수가 아닙니까? 

유성룡 : 그럼 어째서 지난번 원균을 통제사로 천거했을 때, 상께서 원균은 자기 소견대로만 하고 고칠 줄을 모른다, 체찰사가 비록 논리적으로 군령을 밝혀 일러도 고치려 하지 않는다 하시니, 대감께서도 이에 동조하시며 통제사직을 이순신과 나누어 맡기심이 좋을 것 같다 하셨습니까? 실은 원균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닙니까?

윤두수 : 그때는 순신의 역심이 드러나기 전이라서 그랬던 거지요. 이미 역심이 드러나 참수형을 받게 된 자를 이제 와서 어쩌자는 것이오?

유성룡 : 이번에 통제사를 살려주시면 제가 사직상소를 올리겠습니다. 그러니 이순신을 살려주시고 영상 자리를 서인이 가져가십시오. 

윤두수 : 아니 자리는 상께서 내리시는 것이지, 거래의 대상이 아닌 것으로 아는데. 그리고 제가 무슨 힘이 있어 통제사를 살린단 말입니까? 자칫 구명을 청하다가 우리까지 역적으로 몰릴 수 있을 터.

유성룡 : 구명을 청해 달라 부탁드리는 게 아닙니다. 우리 남인들이 상께 통제사 목숨을 맡겨 달라 청할 때 그저 가만히 있어 달라는 것입니다.  

윤두수 : 허허 이거야.

유성룡 : 그래도 끝내 통제사를 참수한다면, 우리 남인도 그냥 지나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윤두수 : 그게 무슨 뜻이오?

유성룡 : 지난번에 우상께서도 말씀 올린 바 있지만, 장안에 대감댁 곳간을 두고 말들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 소문의 진위야 모르지만 일단 사헌부를 통해 조사는 해보려고 합니다. 지방으로 가는 녹봉 실은 수레가 대감댁 곳간을 거쳐 내려가는지 말입니다.

윤두수 : (소리친다.) 영상대감. 그런 근본도 없는 소문으로 지금 나를 겁박하는 것이오.

유성룡 : 사람의 목숨이 달렸기에 이러는 겁니다. 다시 통제사로 복권시켜 달라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미 서인들이 원하는 대로 원균이 통제사직을 차지하지 않았소이까. 그러니 백의종군도 좋고 유배를 보내도 좋으니 일단 통제사를 살리고 보자는 것 아닙니까?

윤두수 : 허허. 제겐 그럴 만한 힘이 없다는데도 자꾸 그러십니다. 

유성룡 : (자리에서 일어선다.) 한 스승 아래서 학문을 익혔던 정을 생각하시어 내 청을 거절하진 않을 것이라 믿고 이만 일어서겠습니다. 때로는 소문이 적토마보다 빠르고 바위보다 단단하다는 말,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빠른 암전. 사이. 정릉 행궁 대전. 이원익 선조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선조 : 우상. 늦어도 한참 늦은 시간에 독대를 청하다니. (피곤한 표정)

이원익 : 그럼에도 이리 맞아 주시니, 망극하옵니다.

선조 : 공이 아니었으면, 그냥 물러가라 했을 것이오. 

이원익 : 참으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선조 : 그래 무슨 일이시오?

이원익 : 철없던 시절 주상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어 살아 있는 목숨입니다. 기억하시지요?

선조 : 아주 오래전 이준경 대감 청으로 산삼을 내려 보냈던 일, 말이오?

이원익 : 그러하옵니다. 성상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소신은 이미 죽은 목숨입니다. 하여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상께 빚진 목숨 값을 갚고자 무던히 노력했는데, 상께서는 빚을 조금은 돌려받았다 생각하시나이까?

선조 : 경 덕분에 나도 여러 차례 목숨을 건지고, 지금껏 부지해오고 있으니 그만하면 산삼 값은 치렀다 생각하오.

이원익 :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여 다시 한번 청을 드리고자 이리 찾아뵈었습니다.

선조 : 이순신 말이오? 그건 아니 되오.

이원익 : 작고 병약한 목숨을 살리시려고 산삼 스무 근을 내려 보내셨지 않습니까? 이제 한 번 더 빚을 청하옵니다. 저에 비하면 통제사는 스무 근이 아니라 산삼 마흔 근을 내줘도 손해는 아니 보실 것이옵니다. 통제사가 다른 건 몰라도 셈은 정확한 자이오니 빚을 떼이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그러니 훗날을 대비해 목숨은 살려두시옵소서.

선조 : 정말로 그 만한 가치가 있는 자라 생각하시오? 

이원익 : 그러하옵니다. 제 목을 걸어도 좋습니다. 

선조 : 목숨을 내놓겠다. 

이원익 : 그러하옵니다. 전하. 지금 왜적들은 남쪽 바다가 열리기만 고대하고 있습니다. 남해가 열리면, 군사와 군량을 실은 왜선이 서해를 통해 한강에 닿는 것도 한순간이옵니다. 바다에서 막지 못하면 도성이 왜적들 것이나 다름없사옵니다.

선조 : 그래서 원균을 내려 보낸 것 아니오. 균이 막아낼 것이오.

이원익 : 전하. 시중 잡배들이 투전을 할 때도 많이 이기는 자는 반드시 좋은 패를 숨겨두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쓴다고 합니다. 통제사 목숨을 잠시 부지시켜 주시면 훗날 좋은 패가 될 것입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울음 섞인 목소리로 거듭 애원한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암전. 사이. 무대가 밝아오면 뒤쪽의 장막 앞에 이원익과 유성룡이 서 있다. 사이. 장막 뒤에서 이순신 천천히 걸어 나온다. 


유성룡 : 이제 나오시는구려. 이런 고초를 당하시다니. 미안하오.

이순신 : (반가워 절을 하려 한다.) 영상 대감, 우상 대감. 송구합니다. 많은 심려를 끼쳐드렸습니다. 

유성룡 : (달려들어 절하는 이순신을 붙잡아 일으킨다.) 이게 무슨 일이오. 몸도 성치 않으신대. 어서 일어나시오.

이원익 : (역시 이순신에게 달려가 부축한다.) 통제사 대감 고초가 많았습니다. 이렇게 살아주셔서 감사하오이다.

이순신 : 모두 두 분 대감 덕입니다. 대감들 덕분에 비루한 목숨일망정 건지게 되었습니다.

이원익 : 비루하다니요? 통제사 대감은 장차 나라와 백성을 구할 귀한 몸입니다. 

유성룡 : 그렇소이다. 비록 지금은 백의종군 신세라지만 앞으로 하실 일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성상께서 다시 부르실 날이 있을 겁니다. 

이순신 : 나라를 지키는데 자리가 중요하겠습니까? 제가 선 자리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원익 : 그것이 충신이지요. 전하께서도 통제사의 충심을 아주 모르지는 않으십니다. 서인과 원균의 모략 때문에 총기가 잠시 흐려져서 통제사를 오해한 것이지요.

유성룡 : 그래도 우상 대감이 목숨을 걸고 성상을 설득하지 않았다면 진짜 큰일 날 뻔했습니다. 이렇게 살아 나오시니 하늘이 우리 조선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은 듯합니다.

이순신 : (이원익에게 목례를 하면서) 두 분 대감이 판중추부사와 주상께 고하여 제 목숨을 구해냈다는 얘기 들었습니다. 제 목숨을 위해 사직상소를 올렸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두 분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유성룡 : 통제사를 살리는 게 조정을 살리고 나라를 구하는 길인데, 그깟 자리에 무슨 미련이 남아있겠소. 그럼에도 상께서 미천한 몸을 좀 더 곁에 두고 쓰시겠다고 하여 사직은 면했으니 그 일은 잊어버리시오. 

이순신 : 하오나 저 하나 살리자고 애쓰신 걸 생각하면, 참으로 입은 은혜가 큽니다. 

이원익 : 아니올시다. 자리는 작은 것이고 나라와 백성은 큰 것이니, 대의를 위해 소의를 버리는 것이 대수이겠소이까? 그나저나 지금 바로 내려가시는 거요? 아직 몸도 성치 않으신대, 며칠 쉬었다 가시지요.

유성룡 : 그러게 말이오. 길이 멀고 험하니, 조심해 내려가셔야 할 텐데. 

이순신 : 일단 도원수 계시는 곳까지 서둘러 내려갈까 합니다. 왜적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니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야지요.

이원익 : 부디 몸조심하셔야 합니다. 지금 통제사에 제수된 원균이 언제 다시 경거망동하여 낭패를 불러올지 모릅니다. 훗날을 대비해야 합니다.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무대 서서히 어두워진다. 사이. 도원수 권율의 목소리 무대 뒤에서 들려온다.


권율 : 도원수 권율 참담한 심정으로 아뢰옵니다. 차제에 그리 경거망동하지 말라 일렀거늘 지난 칠월 보름에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수백 척의 함선을 이끌고 출병하더니, 왜적들의 술책에 빠져 칠천량 앞바다에서 대패하여 군선을 모두 잃고 병사도 수만을 잃었으며 마침내 통제사 자신도 전사하고 말았다 하니 차마 아뢰옵기 송구하옵니다. 모두가 저의 잘못이오니 저를 참하여 주시옵소서.


사이. 무대 뒤에서 조총 소리가 들린다. 동시에 화살이 날아다니고 칼이 부딪치고 말들이 달려가는 등 전쟁터의 소음으로 무대가 가득 찬다. 무대를 가린 거대한 장막 뒤에서 다시 백성들을 도륙하는 왜병들의 모습이 비친다. 이어 오래도록 무대 뒤쪽이 불이라도 난 것처럼 붉게 타오른다. 사이. 무대 밝아진다. 


선조 : (화를 낸다.) 지금 남원성이 함락되고 왜병들이 도성을 향해 맹렬하게 진격해 온다는 데 경들은 무얼 하고 있소? 어서 몽진할 채비를 하지 않고?

유성룡 : 아니 되옵니다. 이번에는 도성에 머물러 끝까지 싸우셔야 합니다.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 도성을 지키러 달려오고 있다 하니 상께서는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선조 : 의병? 지난 임란 이후 공신 책봉을 하는 과정에서 의병들이 세운 공을 지방수령이나 패악한 자들이 가로채는 바람에 의병이 모조리 사라질 지경이라 상소를 올리지 않았소? 그런데도 의병이 도성을 지키러 달려오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온다 해도 그들을 먹이고 입힐 만큼 곳간이 채워져 있는 것도 아니지 않소?

유성룡 : 망극하옵니다.

선조 : 명나라 도독은 도성이 전쟁터가 될 것이라 했다는 데, 그것도 사실이오?

이원익 : 그러하옵니다. 

선조 : 뭐라? 그러하다? 그런데도 몽진 채비를 게을리한단 말인가? 하다못해 중전과 왕자들이라도 먼저 피신시켜야 할 게 아닌가?

이원익 : 도성이 전쟁터가 된다 함은 쳐들어오는 왜적을 저번처럼 피하지 않고 도성에서 맞아 싸워 모두 궤멸시키겠다는 뜻이옵니다. 따라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시면 아니 되옵니다. 

이덕형 : 백성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사옵니다. 이번에도 도성과 백성을 버리시면 다시는 도성에 돌아오지 못하실 것이옵니다. 

선조 : 판중추부사 어디 있는가? (윤두수를 보고) 경도 그렇게 생각하시오? 

윤두수 : 망극하옵니다. 전하. (엎드려 운다.)

대신들 : (모두 엎드린다.) 망극하옵니다. 

선조 : 경들은 짐을 늘 겁쟁이라 칭하지만 임금이 곧 조선이니 옥체를 보전하라고 한 것은 그대들이 먼저였소. 허나 정작 난이 벌어지니 신하란 자들이 저 혼자 살겠다고 달아나고. 요 근래 행궁에 조참 하러 나오는 자들을 눈을 씻고 보아도 보이지 않는 지경이로다.   

이항복 : 참으로 망극하오나 지금은 도성을 비우실 때가 아니옵니다. 도원수가 있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있으며 명나라 원군까지 건재합니다. 너무 두려워하실 게 없사옵니다. 

선조 : 두려워 말라? 그대들의 말은 참으로 믿기 어렵구나. 조석으로 당색에 따라 하는 말이 그때그때 다르니. 그대들이 입을 모아 그랬지 않았는가. 원균에게 통제사 직을 제수하면 왜적을 모조리 수장시킬 것이니 걱정할 게 없다지 않았는가. 그런데 원균이 대패하여 배와 군사를 모두 잃고 스스로도 목숨을 잃었다니. 이제야말로 종묘사직이 바람 앞에 등불이로구나.

이원익 : 전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등용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비록 원균이 경거망동하여 수백 척의 전함이 부서지고 수만의 수군이 수장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이순신이라면 어떻게든 적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옵니다. 

유성룡 : 그러하옵니다. 지금은 좌고우면하고 있을 때가 아니옵니다. 칠천량 해전에서 우리 수군을 대파한 왜적들이 기세를 몰아 한양으로 쳐들어오려고 채비를 하고 있다 하옵니다. 하오니 하루라도 빨리 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선조 : 이순신에게 삼도수군통제사직을 제수하라? 하지만 이순신이 통제사직에 오른 들, 그 자라고 뭐 뾰족한 수가 있겠느냐? 군선은 부서지고 그나마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장졸들은 천지사방 흩어졌다는데.

이원익 : 그래도 하루빨리 통제사에 앉히셔야 합니다. 그래야 통제사를 중심으로 흩어진 병사들이 다시 모일 것입니다. 누가 앉더라도 힘들겠으나 이순신이라면 풍전등화와도 같은 이 나라를 수렁에서 건져낼 것이옵니다. 한 번 믿고 맡겨 주시옵소서. 

대신들 : 그것이 가한 줄로 아뢰오.

선조 : 허나 수군이 궤멸되어 배도 없고 병사도 없다는데, 다시 출병하려 하겠는가? 이전에도 출병을 거부했던 자가?

이산해 : 그러하옵니다. 통제사직을 제수해도 쉽사리 전투에 나서지 않을 것이옵니다.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이리저리 전투를 피해 다닐 것이 분명하옵니다. 차라리 수군을 폐하시고 육지에서 적을 도모하라 명하심이 옳은 줄로 아뢰오.

이수광 : 하오나 바다를 막지 않으면 적들의 군량 보급이 원활해져 더욱 기승을 부릴 것입니다. 임진년 당시 도성과 내륙을 분탕질하던 왜적들이 스스로 부산포로 내려간 것도 군량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가까운 대마도주로부터 식량과 무기를 지원받아 버티면서 훗날을 도모코자 했던 것입니다. 

유성룡 : 그러하옵니다. 지금도 적들이 내륙 곳곳에서 백성들을 도륙하느라 혈안인데, 거제도의 잔당까지 육지에 들게 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통제사는 본래 수전에서 힘을 발휘해왔습니다. 적을 바다에 묶어두어야 승산이 있으니 결코 수군을 폐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선조 : 그렇기는 하지만 함선도 군사도 부족한 통제사가 무슨 수로 어마어마한 왜 나라 수군을 상대한단 말인가?

이원익 : 통제사는 해낼 것이옵니다. 지금은 단 한 번의 승리가 절실한 때이옵니다. 통제사가 어떻게든 한 차례만 더 적들을 막아주면, 그리하여 조선 수군이 건재함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백성들과 내륙의 군졸들이 희망을 품고 더욱 분전하지 않겠사옵니까? 아울러 명의 원군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왜적을 찾아내 숨통을 끊을 것이옵니다. 

이수광 : 그렇사옵니다. 전쟁에서 단 한 번의 승리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음 이옵고, 그걸 해낼 이는 통제사 이순신뿐이옵니다.  

윤두수 : 하지만 이미 상륙한 왜적들이 강토를 유린하고 백성들을 도륙하며 물밀듯이 도성으로 달려오고 있지 않소이까? 육전으로 막아야 할 것이오.

윤근수 : 풍신수길 그놈이 전하의 백성들을 모조리 도륙해 조선 천지를 무주공산으로 만든 다음 왜인들을 조선에 이주시켜 조선을 아예 왜국으로 만들려고 획책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육전으로 막음이 가하다고 아뢰오.

이항복 : 차마 아뢰옵기 황송하고 민망하오나 왜적들이 누가 더 많은 우리 백성들을 도륙하나 내기까지 하고 있다 합니다. 시신을 가져가기 어려워 백성을 죽인 후에 코나 귀만 베어가 그 수를 겨룬다 하오니 차마 말로 옮기기 송구할 따름입니다. 육전이든 수전이든 빠른 결단이 필요한 때라 아뢰오.

선조 : (운다. 억울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다 과인의 업이로다. 내 잘못이로다. 어찌하여 하늘의 미움을 받아 나라와 백성들이 이토록 험한 고초를 당한단 말이냐. (엎어져 운다.)

대신들 : (모두 엎드려 울면서) 망극하옵니다. 전하.

이원익 : 전하. 참으로 참담하고 억장이 무너지오나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옵니다. 이제라도 이순신을 통제사에 앉히시어 훗날을 도모해야 하옵니다. 어서 빨리 명을 내려주시옵소서. 한시가 급하옵니다. 

대신들 : (울먹이는 목소리로) : 망극하옵니다. 전하. 명을 내려주시옵소서. 


암전. 슬픈 음악이 오래 흐른다. 긴 사이. 무대 밝아지면 다시 이원익의 초가. 이원익 돗자리를 짜고 있다. 사이. 사령이 사립문 안으로 들어선다.


사령 : (사방을 둘러본다. 이원익을 발견하곤 소리 내어 부른다.) 영감.

이원익 : (상념에 젖어 있어 미처 사령의 말을 듣지 못한다.)

사령 : (이원익에게 다가가며 크게 소리친다.) 영감! 아니 이 영감탱이가 귀가 먹었나. 사람이 불러도 어째 대꾸가 없어?

이원익 : (그제야 사령을 보고) 어제 다녀간 사령 아니시오? 그런데 어인 일로?

사령 : (달려들어 이원익의 옷소매를 잡는다.) 영감, 아이는 어디 있소?

이원익 : (짐짓 시치미를 떼면서) 아이라니요?

사령 : 내가 어제 맡기고 간 아이 말이요. 

이원익 : 아 올무.

사령 : 올무라니? 올무 말고 아이 말이요.

이원익 : 제가 그냥 가라 했습니다. 

사령 : 가라고 했다니, 누구 명대로? 아니 이 영감탱이가. 

이원익 : 언제까지 지키고 있으라고는 말하지 않았잖습니까? 난 어제가 말미인 줄 알고. 

사령 : 지금 나를 놀리시오? 심부름이 늦어지면 다음날 올 수도 있는 것이지. 그럼 할 수 없지. 영감이 대신 갑시다. 아이를 놓아주면 영감을 대신 잡아가기로 했으니 어서 앞장서시오.


사이. 이의전과 이수약, 도승지가 들어선다. 관노 1, 2 쌀가마니와 면포 등을 올린 지게를 지고 따라온다. 이의전, 이원익을 몰아세우는 사령을 보고 소리를 지른다.


이의전 : 네 이놈, 네놈이 누구 길래, 네놈이 정녕 죽으려고 작정을 한 것이냐?

이수약 : (이원익 앞으로 간다.) 할아버님 괜찮사옵니까?

사령 :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데 놀라면서) 아니 제가 무얼 잘못했다고 이러십니까? 저 영감이 누구라고?

도승지 : (관노를 향해) 무얼 하느냐? 어서 저자를 잡아 꿇리지 않고.


관노 1, 2 지고 있던 지게를 내려놓고 달려들어 사령을 잡아 무릎을 꿇린다.  


이원익 : 어허 모두 그만 하시게. 몰라서 한 짓을 갖고.

도승지 : 하지만 영상대감, 이렇게 방자한 놈을.

이의전 : 그렇습니다. 아버님. 이런 자는 크게 혼을 내셔야 합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사령 : (영상대감이란 소리에 크게 놀란다. 납작 엎드리면서) 아이고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소인이 워낙에 세상 물정에 까막눈이라. 높으신 분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요.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손을 모아 빈다.)

이원익 : (사령에게 다가가 일으켜 세운다.) 모르고서야 그럴 수 있지. 어서 일어나시게. (일어나는 사령을 보고) 하지만 모르고도 다정하게 대한다면 더욱 좋은 일이니 다음부터는 아무에게나 너무 악다구니 부리지 마시게. 아시겠나? 

사령 : 네. 그리하겠습니다요. 

이원익 : 그럼 됐으니 어서 가보시게. 그리고 어제 아이일은 그냥 넘어가 주게. 그 아이도 모르고 저지른 짓이었다니까.

사령 :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그리하겠습니다. (연실 절하며 밖으로 나가면서 혼잣말을 한다.) 그런데 영상대감이란 분이 이런 집에 사시다니, 참으로 모를 일일세.


사이. 사령의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도승지, 이원익에게 다가간다.


도승지 : 영상대감. 대체 저자는 누구입니까? 하마터면 큰일 날 뻔하셨습니다.

이수약 : 그렇습니다. 할아버님. 대체 저자는 누구 온데 저리 방자하옵니까?

이원익 : 아무 일도 아니다. 그리 나쁜 자는 아니다. 


사이. 사령이 사라진 쪽에서 아이가 등장한다. 그 사이 관노 1, 2 쌀가마를 메고는 장막 뒤로 사라진다. 이의전과 이수약도 그 뒤를 따른다. 


아이 : 할아버지 안녕하셨습니까? 

이원익 : (반긴다.) 너는, 어제 그 아이 아니냐? 

도승지 : (웃으며) 그 맹랑한 아이가 바로 이 아이입니까? 

아이 : (뒤에 감추었던 토끼를 꺼내 보인다.) 할아버지 이거 드리려고 찾아뵈었습니다. 

이원익 : (놀랍고도 반갑다.) 기어이 네가 토끼를 잡은 게냐?

아이 : 그러하옵니다. 오늘 새벽 나가보니 어제 쳐둔 올무에 이 녀석이 걸려 있지 뭡니까. 

도승지 : 허허 세상에 눈먼 토끼도 있다더니, 저 토끼가 그 토끼인가 봅니다. 아이가 쳐둔 엉성한 올무에 걸린 토끼라니.

이원익 : 잡았으면 냉큼 어미께 갖다 줘야지 여긴 왜 가져왔느냐? 오라. 자랑하려고 가져온 게로구나.

아이 : 아닙니다. 할아버님께 드리려고 가져온 것입니다. 할아버님이 올무 만들 재료도 거저 주시고 올무 놓는 요령까지 알려주셨으니, 첫 번째 토끼는 할아버님 차지가 맞지요. 

도승지 : 허. 기특한 아이입니다. 보아하니 천출은 아닌 듯하고, 네 이름이 무엇이더냐?

아이 : 제 이름 말씀입니까? (또박또박 말한다. 자신의 이름에 자부심이 대단한 듯하다.) 이원익이라 하옵니다. 으뜸 원, 날개 익. 이원익.

도승지, 이원익 : (놀란다.) 뭣이라, 이원익? 

도승지 : 허허 네 아비가 누군지 모르겠다만 참으로 귀한 이름을 지어주었구나. (이원익을 보고) 아니 그렇습니까. 영상대감.

이원익 : 허허 글쎄요. (웃는다.)

아이 : 실은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라 하옵니다.

이원익 : 조부께서?

아이 : 네. 제 조부께서 아주 오랜 옛날에 난리가 났을 때 격군으로 전쟁터에 불려 나갔는데, 당시 뫼시던 훌륭하신 장군님 함자를 장차 손자에게 물려주려고 장꾼께 미리 허락을 청했다 하옵니다. 했더니 장군께서 자신의 이름은 썩 좋은 이름이 아니니 다른 이름으로 하라며 원익이란 이름을 알려주셨다 합니다. 

도승지 : 그래? 그분이 누구시더냐? 그분 함자도 아느냐?

아이 : 그렇습니다. 본래 제 이름을 그분 함자로 지으려 하셨던 걸요.

이원익 : 그래 그분 함자가 무엇이냐?

아이 : 순자, 신자. 순신이라 하셨습니다. (또박또박 말을 잇는다.) 이순신. 


이원익과 도승지, 마주 보고 놀라며 웃는데, 빠른 암전. 사이. 조명이 들어오면 비어 있는 무대에 이순신 홀로 앉아 있다.


이순신 : 상께서 비루한 제게 성은을 베푸시니, 감히 명을 받자와 모시겠나이다. 다만 상께서 수군을 폐하라 하시지만 임진년부터 이제까지 적들이 감히 양호를 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힘을 내어 맞아 싸우면 이길 수 있사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서, 이로 말미암아 호남과 호서, 양호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이옵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은 아직 죽지 아니하였으니,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옵니다. 


사이.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온다. 북소리 점차 빨라진다. 사이. 무대를 가로막은 장막 위에 새까맣게 밀려오는 왜군 전함이 영상으로 펼쳐진다. 사이. 통제사의 수하 군졸이 외친다.


군졸 : 장군, 지금 적선이 먼바다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족히 이백 척은 될 것 같습니다. 

이순신 : 적선이 비록 많다고는 하나 감히 우리를 넘보지 못할 것이다.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는 법, 우리는 절대로 패하지 않을 것이다.


사이. 북소리 더욱 고조되는 가운데 천천히 막이 내린다. 막이 내리는 동안 멀리서 환청처럼 승리의 함성이 들려온다.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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