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순간 할 수 있는 일
한참 풀리지 않는 글을 붙잡고 실랑이하던 중에 남편이 작업실에 들어와서 묻는다.
"나 1시에 안경점 예약해두었는데 같이 갈래?"
굳이 함께 갈 필요는 없지만 이때 따라나서지 않으면 오늘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을 것 같아 잠시 망설이다 따라가기로 했다. 후다닥 외출용 옷으로 갈아입고 느슨해진 머리도 다시 묶었다.
비토리아에서 가장 큰 쇼핑센터 El boulevard. 가장 큰 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지만 그냥 소도시의 쇼핑센터다. 그래도 H&M, Zara처럼 익숙한 브랜드도 있고 큰 슈퍼마켓도 있고 전자 매장도 있고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지만 내 현재 삶을 생각하면 딱 적당한 크기다. 언제부터인가 너무 화려하고 번쩍번쩍 빛나는 백화점이나 쇼핑센터에 들어가면 멀미가 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특히 조도가 너무 센 조명이 가득한 곳에서는 눈이 금방 피곤해지고 아파서 아무리 쇼핑을 즐기려야 즐길 수가 없었다. 어차피 수많은 매장과 브랜드가 있어도 내가 관심 있는 것 혹은 내게 필요한 것은 몇 안되니 미로에서 길을 찾듯이 한참을 걸어야 하는 대형 쇼핑몰은 별로다. 그렇다고 내가 쇼핑에 관심 없는 건 아니다. 쇼핑을 좋아한다. 내게 필요한 것 혹은 필요하지 않더라도 날 설레게 하는 것을 찾는 특별한 놀이인 쇼핑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안경점에서 남편이 시력검사를 받는 사이에 나는 매장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니까 마냥 기다리기보다는 주변을 좀 돌아보기로 했다. 안경점과 같은 층에는 H&M이 있는데 벌써 몇 주째 파업 중이다. 지난번에 여름 티셔츠를 사려고 왔을 때 H&M이 여전히 파업 중이라서 아쉬웠다. 하지만 파업도 불사해야 하는 근로자도 이해한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강하게 보여줘야 한다. 쇼윈도에 살짝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마네킹이 어쩐지 파업 중인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원하는 걸 강렬하게 주장하시고 부디 원하는 결과를 잘 얻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름 세일 전에는 다시 돌아와 주시나요?
쇼핑을 할 생각으로 온 것이라 아니라서 딱히 뭘 구경해야 할지 모르겠다. 결국 둘러보기로 한 생각을 접고 안경점 앞으로 돌아왔다. 안경점 안을 슬쩍 쳐다보았지만 남편은 보이지 않는다. 아까 시력검사를 하러 뒤쪽 작은 공간으로 들어갔는데 아직 나오지 않은 모양이다. 그 앞에 서서 가방 안에 있던 핸드폰을 꺼냈다. 혹시나 몰라서 챙겨 온 장바구니가 딸려 나오지만 오늘은 쓸 일이 없을 것 같다. 핸드폰을 꺼내 들고 인스타그램도 좀 보다가 페이스북도 좀 봤지만 남편은 나오질 않는다. 토요일 오후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참 많다. 마스크를 쓰고 있지만 다들 즐거워 보인다. 주말을 보낼 만한 공간이 많지 않은 작은 도시에서는 쇼핑센터가 꽤 중요한 것 같다. 특별한 재미를 제공해서라기보다는 그냥 공간이 필요한 사람들이 찾아온다. 십 대에게는 친구들과 만나서 비를 맞지 않고도 한참 동안 시간은 보낼 수 있는 곳이고 집에서 답답해하는 아이들과 나온 가족은 주차장에서 가까운 입구에 5개쯤 설치된 어린이용 자동차에서 아이들을 놀게 할 수 있는 곳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다가 쇼핑 의욕이 전혀 없는 내가 이 쇼핑센터 중간에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이 조금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주말에 하고 싶은 일이 정말 많은데, 그걸 10퍼센트도 못한 것 같은데 굳이 여기까지 따라와서 이렇게 서있는 중이라니, 핸드폰은 집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쇼핑센터에 오기 몇 시간 전에 큰 이모부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장례식장이 있는 병원으로 향하는 엄마와 통화를 한 뒤 오늘은 쉽지 않은 하루가 될 거라고 예감했다. 혼자서 작업실 방에서 한참 울다 나와서 괜찮을 줄 알았다.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반대 방향으로 가던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 내게 다가와 너 지금 여기서 뭐하냐고 질문을 한다면? 내게 다가와 인사를 건넬 사람이 이 도시에 몇 명쯤 될까? 마스크를 쓴 내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2, 3명은 될까? 한국어 수업을 드는 학생까지 생각하면 10명은 되려나? 그 소수의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 이 곳을 지나갈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그래도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스페인어로 대답할까? esperando? mi marido? 기다리는 중? 내 남편? 분명히 뭔가 더 필요한 것 같다. 번역기를 찾아서 검색해보니, 'estoy esperando a mi marido.' 중요한 두 문장 요소를 기억하다니! 요즘 매일 10분이라도 공부하려고 한 노력이 이렇게 빛을 발하는구나. 사소한 것에 내가 기특해지는 순간이다. 화사한 쇼핑센터에서 서서 한없이 우울해지려던 참이라 더 극적이다. 안경점에서 나와서 두리번거리는 남편이 보인다. 이 도시에서 정확하게 나를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
"Estoy esperando a mi marido."
"Gracias por esperar."
"De nada."
더드로잉핸드 The Drawing Hand
그림 그리는 삶.
현재 스페인에서 새로운 일상을 만드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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