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he Drawing Hand May 28. 2021

022 여름 같던 봄날의 금요일 같은 목요일

Con mi familia el juernes

어제 오후는 게으르게 보냈다.

카페에서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셨다. 스페인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는 잔도 작고 양도 적어서 한 잔이 마치 한 모금 같다. 코르타도 cortado를 얼음이 든 잔에 털어 넣어서 시원하게 한 모금 마시고 핸드백에서 미니 드로잉북을 꺼냈다. 4구짜리 알약통 팔레트도 꺼내어 스케치 없이 물붓으로 그림을 그렸다.  기본색은 하나도 없고 좋아하는 색만 넣어서 만든 팔레트다. 그림을 가볍게 그리고 싶은 날에는 이만하면 충분하다. 쓰고 싶은 색을 다 만들기는 좀 부족하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이렇게 저렇게 색을 섞어 가며 그리면 되니까. 팔레트가 작으니 색을 섞을 곳도 따로 없다. 그래도 괜찮다. 색을 바꿀 때 붓에서 섞이기도 하고 종이 위에서 서로에게 스민다. 붓으로 그림을 그리면 넓은 면으로 표현할 때는 편하지만 선이나 작은 문양을 그릴 때는 힘들다. 나와 함께 한 테이블에 앉아 있는 우리 가족과 느리게 대화를 나누며 그림도 느리게 그린다.


좋아하는 색만 들어 있는 팔레트와 붓으로 그린 시작


두 번째 카페 콘 레체 cafe con leche를 마시기 전에 필통에서 연필을 꺼냈다. 언젠가 사은품 혹은 선물로 받은 파버 카스텔 연필. 사실 샤프인데 품은 연필심도 1.4mm나 되고 어지간한 펜보다 통통한 외형이라 샤프라고 부르기가 어렵다. 마지막에 등장한 연필은 스케치용이 아니라 흑연의 색과 결을 더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 시간에는 물붓으로만 표현하기 힘들었던 가는 선도 표현해주고 배경을 흐릿하게 그려주고 싶어서 꺼냈다. 특별히 배경까지 그릴 생각은 없었는데 우리가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동안 주변 테이블에 사람이 많아져서 슬쩍 곁눈질로 빠르게 그려 넣었다. 대충 그린 주변 사람들은 그림에는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지만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을 그렸는지 다 기억한다. 혼자서 커피 한잔을 두고 앉아 있던 모자와 선글라스에 가죽재킷을 입은 아저씨. 빨간색, 남색, 흰색 줄무늬 폴로 티셔츠를 입고 파란 마스크와 안경을 쓴 아저씨. 그리고 가장 멀리 있던 테이블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그중에서 짧은 반바지에 민소매 티를 입은 여자만 그렸다. 여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사람은 자리가 부족해서 그리지 않았다. 계획 없이 그리다 보니 오른쪽 아래가 텅 비었다. 내 모습을 그려 넣으려다가 내 앞에 놓인 카페 콘 레체 커피잔으로 대신했다. 손잡이가 동그란 특징이 있는 평범한 잔이다.


연필이 더해지는 시간


봄과 여름 사이 적당히 뜨거워서 따뜻한 커피를 천천히 마시기 좋은 오후다. 금요일 같은데 목요일이네라고 했더니, 새로운 단어를 알려줬다. Juernes. 목요일 jueves와 금요일 viernes의 합성어, 신조어라고 했다. 금요일 같은 목요일이란 뜻이란다. 주말을 기다리는 건 한국이나 스페인이나 비슷하다. 천천히 공원을 걸어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서 우리 가족이 보낼 올여름을 생각했다. 오늘 같은 날이 비슷하게 반복되겠지. 아직 봄이라서 좋은 금요일 같은 목요일이었는데 우리 가족에게 이번 여름도 좋은 날이 계속되기를.


여름 같은 봄날의 금요일 같은 목요일에 그린 우리 가족



더드로잉핸드 The Drawing Hand

그림 그리는 삶.

현재 스페인에서 새로운 일상을 만드는 중.

인스타그램 : http://instagram.com/thedrawinghand.viva

그라폴리오 : https://grafolio.naver.com/jieunkim

유튜브 : http://youtube.com/thedrawinghand    

매거진의 이전글 021 홈메이드 피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