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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리런 Feb 17. 2021

아웃사이더가 많아지면 어떨까

비주류의 여유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길은 두 갈래이다.

횡단보도를 한 번 건너는 좁은 길

횡단보도를 두 번 건너는 넓은 길

 

단지 신호를 한 번만 기다리면 된다는 편의성 때문에 첫 번째 좁은 길에 등굣길 학생들이 몰린다.

나도 같은 이유로 첫 번째 좁은 길을 학생들 틈에 끼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능한 거리를 두려 애쓰면서 아이를 잡아끌고 매일 학교에 데려갔다.

어느 날 와글와글 틈 없이 몰려 서서 신호를 기다리다 문득 다른 길을 보니 한적하고 여유로웠다.

왜 이 길만 고집했을까?

그래서 다음날 학생들이 몰리지 않는 두 번째 길로 가봤다. 처음 가던 길보다 세 배는 넓은데 사람 수는 훨씬 적으니 길을 전세 낸 듯 한가했다. 어떤 흐름에도 휩쓸리지 않고 나만의 속도에 맞춰 여유롭게 걸어갈 수 있었다.

그제야 조금 돌아가더라도 남들과 다른 길을 가볼 가치가 있단 생각이 들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나만의 인생을 즐기는 여유를 가질 수 있다고 말이다.




좀 더 편하기 때문에, 다들 원하니까, 보기 좋아서, 경제적이니까, 빨리 갈 수 있어서 등 살면서 겪는 많은 선택에서 모두가 선호하는 한 방향으로 사람들이 쏠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사람이 두 명 이상만 모여도 자연히 집단이 형성되고 같은 방향으로 사고가 흘러간다.

사람은 소속감과 유대감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는 사회적 존재일 뿐이고 그렇다 보니 어떤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것만으로 그 집단의 사고를 따르기 쉽다. 그렇게 다른 사람의 생각에 동조하면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편협한 사고를 갖게 되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는 초등학생 때 반에서 잘 나가는(?) 그룹에 잠시 속한 적이 있었다. 사실은 그중 두 명과 같은 학원 소속이란 또 다른 관계 고리를 갖고 있을 뿐이었다. 나머지는 같은 반이구나 정도였는데 그 그룹에 들어오고 싶었던 또 다른 아이가 나와 가깝게 산다는 이유로 친한 척 다가와 나를 이용했다.

그 아이의 등장으로 준비하던 장기 자랑에 인원이 한 명 초과되어 지장이 생겼고, 춤추는 게 썩 내키지 않았던 나는 마침 잘 됐다는 생각에 내가 빠지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주위 만류를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온 그날 나를 이용했던 그 아이가 주도한 따돌림이 시작되었다. 아마도 집단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고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어떤 대상에 대한 공통된 불만을 토로하고 함께 비난하며 공감대를 형성한 것 같다. 그리고 그 대상이 나였던 것이다.


사실 그 아이가 내 다른 친구들을 선동했을 때 동조한 친구도 있고 아닌 친구도 있었을 것이다. 원래 알고 지내던 두 친구와는 학원에서 계속 이전과 다름없는 관계를 유지해갔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하나의 작은 (겨우 다섯 명인) 집단에서 그 아이가 던진 화두를 목소리 큰 한 친구만 거들어도 그 의견은 집단 의견이 되고 나머지는 그것을 거스를 용기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침묵을 깨지 않는 한 자신의 뜻과 다른 따돌림이라는 행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더라도 결국은 모두 방관자가 될 뿐이다.


그러니 그 아이만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 또한 개인적인 불만으로 집단의 힘을 다른 친구에게 가하려 한 적이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속한 집단에 소수 의견을 내는 용기 있는 친구가 있었고 덕분에 개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단 것이다. 이 경우 나머지 세 명 역시 소수 의견이 나오기 전까지 방관자로 내게 동조하고 있었다.


집단 안에서 소수 의견은 한 방향으로 흐르기 쉬운 의견에 다른 측면의 정보를 제공하고 균형 잡힌 사고를 촉진한다는 점에서 집단 사고의 피해를 방지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어떤 그룹 내에서 따돌림을 주도하는 의견이 나왔을 때 그에 반대하는 하나의 소수 의견만 있어도 비공격적인 성향의 방관자들은 소수 의견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 그 소수 의견을 당당히 발언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자발적 아웃사이더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영원한 이단자', '르네상스적 지식인'으로 불리는 박홍규 교수는 그의 책 <내내 읽다가 늙었습니다>의 부제를 '무리 짓지 않는 삶의 아름다움'이라고 이름 지으며 고독을 대하는 다른 관점을 소개한다.


동양의 고독은 유교적 가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불완전한 가족 관계(고아나 독신)로부터 기인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감상적, 부정적 또는 병적으로 비치기 쉬우며 곧 인간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에 비해 서양의 'solitude'가 가리키는 고독은 '독존적인 자아'가 갖는 '자발적 고독'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자신의 존엄을 침해하는 세계와 스스로 유리되는 일, 또는 모든 것을 불신하고 자신을 신뢰하는 적극적이고 강인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단다.

그리고 그런 입장에서 흡수·동화의 경향이 있는 집단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주체적 개인성이 확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고독을 선택하고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이제 와 돌아보면 나는 어려서 친구 없이 혼자 있을 때 걱정에 가득 찬 주변 어른의 시선을 느껴왔고 그 시선을 거두기 위해 억지로 친구를 만들고 인간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다. 나와 맞지 않는 친구와 끊임없이 부딪쳐 상처 받으면서도 혼자인 게 두려워 참고 맞춰갔다.

그리고 소속된 집단이 커질수록 집단의 인정받는 일원이 되기 위해 나만의 색깔과 취향을 지우고 집단 사고에 편승했다. 집단의 뜻을 따르는 과정에서 내가 원치 않는 가해를 하기도 하고 피해를 받기도 했다. 내가 생각한 구제책이 옳다고 생각할 때도 소수 의견을 제시하지 못했고 침몰해가는 집단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소수 의견을 비난하지 않고 존중할 때, 전체주의에서 벗어나 개개인의 다양성을 인정해 줄 때 모두가 '나' 자신의 색깔을 찾아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존중해주는 마음의 여유를 얻기 위해서는 우선 남과 다른 내 생각에 집중하고 다름을 언제든지 당당히 표현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할 것 같다.


나는 마흔이 되어서야 남의눈을 의식해 힘에 부치는 주류의 길을 따라 걸으려 많은 에너지를 낭비했다는 걸 깨닫는다. 나 혼자 어쩔 수 없는 인간관계에 집착하지 않고 고독을 즐기며 비주류로 살고 싶다. 내가 무엇을 원하고 좋아하는지 바라보며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하는 여유를 즐기는 법을 이제서 하나씩 배워가는 중이다.


더불어 개인의 주체성이 확보된,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는 다양성이 가득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작게는 내 아이에게 '자발적 고독'을 즐길 수 있는 마음을 심어주는 것부터, 나아가서는 학교에서 만나는 학생들에게 아웃사이더도 멋지다고 다른 친구들의 기대에 부응하려 스스로를 깎아내는 애를 쓰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소모적인 인간관계의 덫에 빠지지 말고 가장 소중한 자신을 먼저 존중하며 스스로의 마음에 귀 기울이라고 말이다.

나 역시 나와 남을 대하는 균형을 맞춘 후 만나는 사람들의 여러 생각을 존중하고 나와 다른 의견도 열린 마음에 담고 싶다.


연약한 자아를 집단에 기대는  없이 굳건하고 주체적인 자아를 가지려면 경쟁이 치열한 인싸 대열에서 벗어나 스스로 아웃사이더의 길을 걸을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주류의 길을 걸으면서 내가 중심이 되는 여유를 경험해볼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조금씩 자발적 아웃사이더들이 많아져서 모두가 주체성을 가진 독립된 개체로 무리에 휩쓸림 없이 서로를 존중하며 자신만이 가진 좋은 영향력을 나누는 사회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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