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이론이 주는 위로
누구나 머릿속에 하나의 마을을 갖고 있으며 그 정원이 채워지면 더는 늘릴 수 없다.
인류학자들이 이야기하는 '마을 이론'은 즐겁고 중요한 인간관계는 수적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이론이다.
머릿속에 정원이 정해져 있는 하나의 마을이 있다는 것.
내게 이 마을 이론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관계 유지 에너지가 제한되어 있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인간관계라는 것에는 서로에 대한 안부를 확인하고 기념일을 챙겨주며 주기적으로 만나 관심을 공유하고 배려하는 등의 관계 유지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조차 상대적으로 관계 유지가 쉽다고 느낄 뿐 더 세심하게 관계 유지 에너지를 쓸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연애를 하게 되면 상대에게 모든 관심을 쏟느라 다른 친구와 가족들에게 소홀해지는 경우가 많은 데 그런 사실이 관계 유지 에너지의 유한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반대로 연애를 하면서도 친구들과의 관계에 쓰던 에너지의 양을 그대로 유지하는 바람에 연인을 서운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고 말이다.
나는 초등학생 때 만난 친구에게 자주 스트레스를 받았다. 반은 사이좋게 놀았지만 반은 싸우고 울면서 헤어졌다.
고등학생 때는 나를 챙겨 주면서도 은근히 따돌리는 한 친구 때문에 다른 친구들까지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친구들은 자연히 환경이 바뀌면서 곧 내 마을에서 자취를 감췄다.
내 머릿속의 마을에 들어갈 수 있는 정원이 많았다면 나는 저 친구들과의 관계까지 모두 유지하려 애썼을 것이고 계속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그들 때문에 너무 많은 관계 유지 에너지를 소모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는 관계에 투자해 온 시간과 에너지가 아깝다는 이유로 어떻게든 관계를 유지해 나가려 애쓰는 바람에 다른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일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보조를 맞추느라 나 자신이 희미해져 갔을 것이다.
다행히 저 친구들이 내 마을의 전부는 아니었고 제대로 자리를 내준 것이 아니었기에 빈자리를 남겨둘 수 있었다. 그리고 빈자리를 남겨둔 덕에 스무 살이 되어서 인생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이후 지금까지 맺었던 관계를 돌아봤다.
학교에서 만난 관계는 우연히 한 반이 되었거나 같은 공간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는 이유로 친해진 사이였다. 학교에서 같은 취향을 가진 친구를 만나는 건 순전히 운에 가까운 것 같다. 대부분 학교생활을 공유하며 친해졌기에 그 생활이 끝나니 더 이상 공유할 부분이 사라졌다.
만나면 추억 감상으로 시작해서 추억 감상으로 끝났다.
그 사이 사회생활을 하며 달라진 모습이 적응되지 않기도 했고 그런 서로에게 새로운 관심을 갖고 이해할 여력이 없기도 했던 것 같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만큼 관심사가 많이 달랐고 공유할 것이 옛날이야기와 사회생활에 대한 하소연뿐이었기에 언젠가부터 더 이상 그런 친구들과의 만남이 즐겁지 않고 끝없이 이어지는 푸념과 추억 씹기에 지쳐갔다.
물론 여전히 좋은 친구들도 있고 그 친구들은 계속 관계를 이어 가지만.
만났을 때 부정적이고 소모적인 대화만 오가는 관계와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관계, 한쪽이 일방적으로 희생하고 착취당하는 관계는 정리를 고려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정원이 정해져 있는 머릿속 마을을 소중하고 아름다운 관계로만 채우면 삶이 달라지지 않을까?
인생은 길고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다.
마을 이론은 친구의 수보다 관계의 거리와 깊이가 중요하다는 알프레드 아들러의 말과 함께 내 좁고 깊은 인간관계에 위로를 건네준다.
그렇게 용기를 얻어 언제 어디서 만날지 모를 소중한 인연을 위해 내 머릿속 마을에 아직 빈자리를 남겨 놓고 있다. 깊이 생각하고 신중하게 정원을 채우겠다고 다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