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옥자는 어땠냐구요?
옥자를 봤다. 사랑스러운 슈퍼 돼지의 이름은 옥자, 어린 소녀는 미자다. 옥자와 미자. 퍽 촌스러운 이름이다. 옥자는 우리 엄마 이름이다. 63년생인 이옥자 여사가 태어났던 당시엔 흔하디 흔한 이름이었다.
디에디트 1주년이던 6월 29일 옥자를 만났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이미 옥자를 봤을 수도 있겠다. 지금 가장 뜨거운 이 영화에 대한 단상을 적어보기로한다.
*이 리뷰는 옥자에 대한 스포가 전혀 없음을 밝힙니다.
옥자를 보고 울었다. 창피하지만 사실이다. 난 원래 눈물이 많다. 세상 모든 일에 쿨한 척하려 노력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옥자는 충분히 재미있는 영화다. 봉준호 특유의 유머코드에 귀여운 동물과 소녀가 나오고 화려한 액션까지. 맛깔스럽게 잘 차려진 밥상이다. 어린 소녀와 단추 구멍만한 눈을 한 하마와 돼지를 교묘히 섞어놓은 이 동물은 어쩜 이리도 사랑스러운지. 이 둘의 우정은 어른들의 욕망때문에 자꾸만 좌절된다. 슬퍼. 쟤네 그냥 사랑하게 두지. 다들 너무 나빴어. 치밀하게 계산된 봉테일의 놀라운 연출력 그리고 틸다 스윈튼과 제이크 질렌할 그리고 변희봉까지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가세했으니, 당연히 꽤 재미있는 영화가 나왔다. 하지만 아쉽게도 딱 거기까지.
옥자는 맛 좋은 냉동 삼겹살같은 영화다. 가성비 좋은 삼겹살을 상추쌈에 마늘, 고추를 넣고, 된장찌개까지 곁들여 먹으니 꽤 근사한 한끼로는 손색이 없다. 하지만 막상 고기 맛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옥자를 보고 이 영화를 삼겹살에 비유하다니 너무한 거 아니냐고? 미안. 하지만 난 삼겹살을 좋아하는걸.
옥자는 선악의 구도가 너무나 명확하다. 내용이 어렵다거나, 보면서 철학적인 질문을 던질 여지는 그리 많지 않다. 한쪽에는 유전자 조작으로 전 세계 축산업계를 장악하고자 하는 대자본 ‘미란도’가 있고, 그 반대편엔 옥자를 강원도 산자락에 방목하고 키우는 미자와 변희봉이 있다. 뉴욕과 강원도로 대비되는 도시와 시골. 닳고 닳은 쇼비지니스를 대변하며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하는 어른, 그리고 옥자를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라고 생각하는 어린 소녀 미자가 있다.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책처럼 흑과 백이 명확한 세계다. 확실한 선악의 구분은 우리에게 도덕적 문제를 제기하지만, 생각할 거리는 던져주지 않는다. 아쉬운 부분이다. 왜냐구? 이미 어른인 우리는 알고 있거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옥자가 그려낸 세상과 달리 회색빛 천지. 그리고 나도 당신도 어쩔 수 없는 회색빛 인간이라는걸.
좀 더 들어가 보자. 옥자와 미자는 이제는 보기도 힘든 아날로그 TV를 손으로 때려가며 보는 산골에 살고 있다. 유전자 조작으로 덜 먹고 덜 싸는 친환경적인 새로운 종을 만드는 시대지만, 영화가 묘사하는 한국은 하나같이 전형적이고 촌스럽다.
놀랍게도 옥자를 통해 봉준호가 그린 한국은 가끔 외국 영화에서 서툰 한국말을 구사하는 ‘한국인역’의 배우를 보는 것처럼 어색했다. 소중하게 허리전대를 메고 다니는 미자, 비정규직 트럭 운전사의 직무태만 모습까지 외국인들은 눈치채지 못했을지 몰라도 우리 눈엔 너무나 어색하고 피상적인 묘사다. 게다가 틸다 스윈튼과 제이크 질렌할은 옥자와 미자에게 시련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단순한 캐릭터로 그려진다.
내가 이렇게 아쉬운 이유는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감독, 봉준호이기 때문이다. 그가 <살인의 추억> 그리고 <마더>에서 그려냈던 미묘하고 복잡한 인간의 군상을 아쉽게도 옥자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물론 전세계에 선보이는 엄청난 자본이 투자된 이 영화에서 과거의 봉준호식 같은 화법을 기대하는 건 순진한 기대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자를 보며 과거 봉준호만이 그려낼 수 있었던 명치를 쑤시는 듯한 그 미묘한 감정들이 그리워 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이건 엄밀히 말하면, 영화 리뷰라기 보다는 지금 내 타임라인을 뒤덮은 옥자에 대한 짧은 단상에 가까우니 이것으로 시작된 수많은 논쟁도 건드리고 넘어보자.
옥자는 넷플릭스에서 제작비 600억원을 전액 투자한 넷플리스 오리지널 영화다. 이 영화를 보는 방법은 두 가지다. 넷플릭스를 가입하거나, 혹은 비멀티 플렉스 극장에서 보거나. 국내 3개 대형 멀티 플렉스의 옥자 보이콧으로 극장과 거실에서 동시에 개봉하려던 넷플릭스의 야심은 어쩐지 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영화 배급의 큰 어깨들이 외면한 옥자를 작은 영화관들이 보란듯이 걸기 시작한다. 그래서 현재 작은 극장들이 옥자를 통해 새롭게 조명받게 되는 웃지 못한 상황이 연출됐다. 그동안 폭력적이기까지 했던 배급사의 횡포가 이번 옥자 보이콧으로 터져나온 것이다. 지금 아무 영화 예매 앱을 켜보자. 영화를 가장 많이 보는 시간인 주말 저녁에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영화는 고작 3-4개다. 아무리 보고 싶어도, 시간이 안맞아서, 혹은 너무 멀어서볼 수 없는 영화가 허다하다. 옥자는 현재 전국 111개 스크린에서 누적 관객수 8만 명으로 전체 박스오피스 4위를 기록하고 있다. 기이한 광경이다. 아, 물론 아까 말한 바 같이 이건 넷플릭스의 의도가 전혀 아니었겠지만.
이상하다. 솔직히 난 더 많은 사람들이 넷플릭스를 통해 옥자를 보고 싶어할 거라고 생각했다. 집에서 편하게 볼 수 있는 데 왜? 게다가 아직 넷플릭스를 가입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한 달 무료 체험 신청을 통해 공짜로 옥자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재미있는 점은 이제부터다. 스마트폰과 노트북 등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기기를 통해 넷플릭스를 볼 수 있는 시대지만,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건 여전히 큰 화면과 빵빵한 사운드다. 이건 넷플릭스가 발표한 글로벌 넷플릭스 사용자 현황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스마트폰으로 넷플릭스를 시작한 비율이 30%, PC가 40%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결국 70% 사람들이 스마트TV로 넷플릭스를 본다는 통계를 내놨다. 결국 영상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기기는 TV란 결론이다.
옥자는 돌비 비전과 돌비 애트모스 사운드로 창작자(옥자의 경우 봉준호 감독)에게 새로운 캔버스를 마련하는 한 편, 소비자들에게는 영화관을 능가하는 경험을 가능케 했다. 영화는 이차원의 예술이다. 화면으로 기차가 들어오는 장면을 보고 혼비백산했던 영화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관객은 영화를 지켜보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3D, 혹은 4D를 시작으로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듯한 생생한 사운드까지 더해지며 이제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영화 장면 한가운데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이 경험은 내 집 거실로 스며들어 이제는 영화관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돌비 비젼 HDR 기술 발전으로 이제 영화관보다 더 좋은 화면을 내 집에서도 즐길 수 있다. 또한 돌비 애트모스 사운드로 인해 좌우 뿐만 아니라 위 아래의 면이 더해졌다.
얼마 전, 애플 홈팟 기사에서 에디터H는 애플이 우리의 거실을 점령하기 위해 음악이라는 트로이 목마에 시리와 홈팟을 심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변기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드라마를 즐기다 방에서 노트북으로, 거실 TV로 이어서 드라마를 즐길 수 있다. 넷플릭스는 영상 컨텐츠 제작자이면서, 큐레이터다. 다양한 플랫폼을 활용해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영상을 볼 수 있도록 밥상을 차려냈다. 하지만, 넷플릭스가 그리는 미래는 어쩌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좀 다를 수도 있다. 옥자가 영화관과 넷플릭스에서 동시에 개봉을 하면서 노린 건, ‘집 vs 영화관’이 아니라 ‘집 or 영화관’을 추구한다고 보는 게 맞다. 우리는 영화와 VOD가 동시에 개봉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치열한 싸움이다. 영화관이 아니면 안 되는 시대가 아니라, 집에서도 영화관에서도 원하는 컨텐츠를언제든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플랫폼은 결국 플랫폼이다. 어디서 볼 것인지는 선택의 문제다. 플랫폼이 아니라 결국은 어떤 영상 컨텐츠를 가지고 있는냐의 싸움으로 넘어가고 있다.
친구가 내 옥자 평을 물어왔다. 아마 이 기사를 클릭한 사람들은 아마 이게 가장 궁금할거다. 그래서 옥자를 보라는 거야 말라는거야? 영화 추천은 언제나 어렵다. 꽤 많은 영화를 추천해봤지만, 성공 확률은 절반 정도 밖에 되지 않더라.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지만 할 건 해야지. 이제 말씀드릴게요. 오래 기다렸죠. 긴 글 읽느라 고생했어요. 제 점수는요 3.5점. 가성비 좋은 고깃집이었지만, 딱 거기까지. 죽기 전에 꼭 다시 가봐야할 집인지는 의문이 남네요. 하지만 옥자와 미자는 충분히 사랑스러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