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혁과 올드 라스푸틴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자기소개라는 걸 하려니 입이 잘 안 떨어지네요(그래서 입 다물고 키보드를 치고 있어요). 저는 서대문구에 사는 31살 김석준이라고 해요. 뭐 하는 사람이냐구요? 평일에는 육첩방 사이즈의 작은 방에서 맥북으로 소설을 쓰고 주말에는 핫플레이스를 투어하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저는 이런 여유로운 삶이 좋지만 어머니는 저를 두고 한량이라고 표현하셨죠.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두 번의 디에디톡을 썼어요. 제가 두 번째 원고를 넘기던 날 에디터H는 저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열심히 글을 쓰면 원고 노예에서 원고 머신으로 승격시켜줄게. 화이팅” 저는 잘 모르겠어요. 노예나 머신이나 둘다 사람은 아닌데 말이죠. 쩝. 그래도 머신이 좀 더 미래지향적이니까 열심히 써서 승격하도록 하겠습니다. 종종 인사드릴 테니재밌게 읽어주세요!
–노예 김석준으로부터–
최근에는 보름달을 보기 위해 옥상에 올라가 밤하늘을 봤다. 그날따라 별이 유난히 더 반짝이는 것 같았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괜히 윤동주 시인이 된 것처럼 별을 헤고 싶어졌다.
그렇게 십 분쯤 청승을 떨다가 내려오니, 지금 이 순간과 가장 어울리는 소설과 맥주를 고르고 싶었다. 김중혁의 <나는 농담이다> 그리고 올드 라스푸틴.
나는 소설 좋아하는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눈다. ‘김중혁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여러분은 어느 쪽인지 궁금하다.
김중혁의 소설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농담’이다. 농담은 김중혁의 소설을 움직이는 연료다. 그리고 오늘 소개할 <나는 농담이다>에서 그런 매력이 더 크게 드러난다. 주인공의 직업이 스탠드업 코미디언이기 때문이다.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뭐야?” 이 소설을 추천할 때마다 우선 이 직업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해야해서 난감했다. 다행히 이제는 전보다 좀 더 편해졌다. “유튜브에 보면 유병재가 무대 위에서 혼자 마이크 하나 들고 말하는 코미디 있잖아. 슬랩스틱 말고 촌철살인으로 웃기는 코미디. 그런 걸 스탠드업 코미디라고 그래.”
농담 속에 뼈를 잔뜩 숨겨둔 책, <나는 농담이다>. 그 책과 어울리는 술로 올드 라스푸틴을 고른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올드 라스푸틴이 임페리얼 스타우트라는 점이 첫 번째 이유.
알코올 도수가 보통의 맥주(5~7%)보다 높으면 맥주 종류에 임페리얼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임페리얼 스타우트인 올드 라스푸틴의 도수는 자그마치 9%다. 맛도 엄청나다. 흑맥주 10병을 약불에 한 달 정도 달이면 이런 맛이 날까? 진한 맛과 독한 도수가 합쳐지니 왠지 대단한 걸 삼키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당연히 벌컥벌컥 마시는 술은 아니다.
쉬워 보여도 쉽게 대할 수 없는 맥주, 그게 올드 라스푸틴의 매력이다. <나는 농담이다>처럼 말이다.
‘아니 에디터 양반, 계속 칭찬만 하는데 도대체 그 소설이 어떤 느낌인지 설명을 해줘야 할 거 아니오’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 이제 진짜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그의 책에서 몇 소절 빌려왔다. <나는 농담이다>에서 주인공 송우영이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는 대목이다.
“하와가 만약에 사과를 안 따 먹었다고 생각해봐요. 그러면 우리는 부끄러움도 모르고 계속 하나님한테 얹혀서 살았을거예요. 신혼집 마련이 힘들어서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데 부모님이 밤마다 “애들아, 자니? 사과 먹었니?” 이렇게 물어본다고 생각해봐요. 끔찍하죠? 우리는 하나님이 화를 낸 덕분에 섹스를 할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섹스할 때마다 이렇게 외치는 겁니다. ‘오, 마이갓!’ ‘하나님, 맙소사’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을 거예요.”
더러운가, 아니면 웃음이 나는가. 김중혁 작가는 사실 이렇게 더러운 농담을 하는 작가는 아닌데, 이번소설에서는 작정하고 19금 유머와 더러운 농담을 많이 써놨다. 그런 검은 농담이 올드 라스푸틴과 꽤 잘 어울린다.
맥주병에 그려진 수염이 긴 아저씨가 바로 라스푸틴이다. 풀네임은 그레고리 라스푸틴, 17세기 러시아에서 실존했던 인물이다. 재작년에 최순실이 한국의 라스푸틴이라고 각종 뉴스에서 소개되면서, ‘최순실 맥주’라는 웃픈 별명을 달고 판매량이 급증하기도 했다.
라스푸틴은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수도원을 전전하며 보잘 것 없는 생활을 하던 그는 어느날 최면술을 수단으로 하는 신흥종교를 만든다. 그런데 그 기술이 꽤 먹혔는지 금세 전국구 유명인이 된다. 그 소문은 러시아의 귀부인들과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까지 흘러갔다. 말빨이 얼마나 좋았던 걸까. 사기꾼 라스푸틴은 황제와 황후의 신임을 얻어 권력을 조종하는 비선 실세가 된다. 혹자는 라스푸틴의 무엇(?)이 굉장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끝은 비참했다. 그는 독이 든 빵과 와인을 먹고, 총을 맞고, 철퇴로 두들겨 맞아 강에 버려져 익사했다. 어째 처음부터 끝까지 믿기 힘든 이야기다.
<나는 농담이다> 역시 믿기 힘든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표지에는 달과 우주비행사가 그려져 있지만, 이 소설은 SF소설은 아니고 우주에 대한 소설도 아니다. 우주에서 돌아오지 못한 “어떤 사람”과 주변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은 두 명이다. 낮에는 컴퓨터 수리기사를 하고 밤에는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는 동생 송우영. 우주비행사가 되어 우주에 갔다가 실종된 형 이일영. 하지만 둘은 살면서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배다른 형제다. 그런 둘을 이어주는 건 어머니의 편지다.
소설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던 송우영은 박스에 가득히 담긴 편지 뭉치를 발견한다. 누구에게 받은 편지인가 보니 받은 편지가 아니라 보내지 못한 편지였다. 송우영은 보낸 이의 이름을 읽어본다. “이일영?”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지만 누군지 바로 알지 못한다. <나는 농담이다> 송우영이 이일영에게 편지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형이 지구에 두고 간 형의 사람들을 마주하는 이야기다.
스토리 못지않게 칭찬하고 싶은 부분은 편집 방식이다. <나는 농담이다>는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송우영이 편지를 돌려주는 이야기, 우영의 스탠드업 코미디, 형 이일영이 우주에서 혼자 떠드는 말.
세 이야기는 시각적으로 다르게 편집되어있다. “관제센터, 들리나”로 시작하는 형의 파트에서는 흰 종이가 아니라 까만 종이에 흰 글씨로 인쇄되어 있다.
덕분에 형의 음성일기는 마치 우주에서 벌어지는 스탠드업 코미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지상에서 벌어지는 동생의 스탠드업 코미디와 우주 속 형의 코미디는 마지막으로 갈수록 농담 속에 진심을 드러내며 마음을 울컥하게 한다.
그중 몇 번이나 다시 읽은 부분이 있다. 산소량은 줄어들고 구조대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형은 혼잣말을 시작한다. 자살 캡슐을 챙겨왔어야 했다는 후회, 자살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면 목을 밧줄에매고 중력을 느끼며 죽고 싶다는 소망 그리고 마지막 말이 하이라이트다. “아직 기내산소량은 충분하다. 최대한 멀리 나가 보겠다. 어차피 지구로 돌아가긴 글렀으니 최대한 먼 곳까지 나가 볼 생각이다.”
형이 지구와 반대편으로, 깜깜한 우주로 헤엄치는 순간을 상상하면서 나는 올드 라스푸틴을 한 모금 더 마셨다. 꿀꺽. 우주를 삼킨 것 같은 묵직한 바디감, 이게 바로 흑맥주의 매력이다.
처음에 나는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을 ‘김중혁을 좋아하는 사람’과 ‘아닌 사람’으로 나눈다고 했다. 그리고 이건 맥주 취향에서도 적용되는 얘기 같다. 밖에서 친구와 맥주를 마실 때면 어떤 친구는 라거의 청량감이 최고라 하고, 다른 친구는 에일이 바로 어른의 맛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흑맥주를 좋아한다고 하는 사람은 잘 못 본 것 같다. 내 주변사람들만 그런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난 흑맥주가 좋다. 청량감 있는 라거가 식도를 지나 내장기관을 건드리며 “야야 뭐해, 놀자, 카톡, 카톡, 카톡” 시끄럽게 내려가는 술이라면, 흑맥주는 조용하고 무게감 있게 내려가며 딱한 마디만 할 것 같은 술이다. “나와. 놀자”
Contributing editor : 김석준(@summer_edi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