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통주 문배술
포르투로 한 달 살기를 결정한 뒤, 에디터H도 모르게 나 혼자 정한 비밀 프로젝트가 있다. ‘포르투에서 우리나라 전통주를!’ 솔직히 말해 촬영 장비만으로도 2개의 캐리어를 꽉 채운 버거운 상황에서 술까지 챙기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더라.
단 한 병의 술을 가져가야 한다면 무엇이어야 할까. 몇 병의 전통주가 머리 위에 둥둥 떠다닌다. 정말 힘들게 골랐다. 거친 경쟁률을 뚫고 포르투까지 온 승자를 소개한다.
오늘 소개할 문배술은 여러모로 의미가 깊다. 남북정상회담 공식 만찬주니까. 그것도 한두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말이다. 혜안은 부족했지만 운이 좋았다. 여행용 캐리어에 문배술을 담을 때만 해도 이렇게 성공적으로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지고, 다시 한번 문배술이 공식 만찬주가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행여라도 깨질까 조심스럽게 포장한 문배술은 도착하자마자 캐리어에서 꺼내 냉장고에 잘 모셔뒀다. 서울에서 온 귀한 몸이니까. 완벽한 안주가 나타나면 꺼낼 생각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짬뽕 파스타를 앞에 두고 우리는 그날임을 직감했다. 오늘이다, 오늘. 문배술을 따야 할 날이.
냉장고에서 막 나온 문배술이 뽀얗게 몸을 가렸다. 감히 말할 수 있다. 문배술은 전통주계의 평양냉면이다. 거센 평양냉면 열풍에 숟가락을 얹어보겠다는 얄팍한 수가 아니라, 내 주장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일단 출신이 평양이다. 문배술은 고려 왕건 시대부터 평양 일대에서 제조되었던 증류식 소주로 무려 천 년 넘게 이어온 술이다. 실제로 태조 왕건에게 진상되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아쉽게도 다른 전통주와 마찬가지로 슬픈 역사 때문에 명맥이 끊겼지만 이기춘 명인이 재현해 90년대부터 판매를 시작했다.
증류한 술은 병에 담아 1년 정도 추가 숙성을 거친다. 본래 알코올 도수 40도가 정석이지만 요즘 저도주 트렌드에 맞추기 위해 23도와 25도의 낮은 도수로 선보였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알코올 도수 40도짜리 문배술을 꼭 한 번 마셔보고 싶다.
맛도 모양도 아름다운 술이다. 늦은 저녁(포르투의 해는 9시가 넘어야 진다) 한 상 뽀지게 차리고 문배술을 한 잔 따른다. 맛이 은은한 것도 평양 냉면과 꼭 닮았다. 강하지 않은 맛은 음식에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다. 맵고 짜고 강한 단맛은 우리를 게으르게 한다. 무언가를 느끼게 하지 않아도 단맛인지 짠맛인지 단번에 안다. 하지만 은은한 맛은 방심하면 느낄 수 없다. 혀의 모든 감각을 곤두세우고 집중하면 안개가 걷힌 듯 맛과 향이 다가온다.
문배술의 담백한 맛은 흡사 선비 같다. 수수와 조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제법 향기롭다. 이 향이 무엇인지 확신이 없어 여기저기 찾아보니 문배나무의 향기란다. 아쉽게도 내가 문배나무의 향을 모른다. 그저 내가 아는 선에서 설명해보자면 아직 껍질을 깎지 않은 큰 배에서 나는 싱그럽고 약한 풋내를 느낄 수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문배술은 충분히 향기롭지만 절대 위스키처럼 자기주장이 강한 편이 아니라는 거다.
문배술은 우리나라 전통주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잘 보여준다. 투명한 병은 모던하면서도 세련되다. ‘한식 혹은 전통주의 세계화’ 같은 촌스러운 소리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라이스 와인으로 부르는 막걸리도 물론 좋지만, 우리가 진짜 소개해야 할 건 이토록 세련되고 기품 넘치는 술이 아닐까.
우리는 포르투 이층집 테라스에서 짬뽕 파스타와 문배술을 기울이며 서울을 그리워했다. 달이 훤한 밤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때를 추억하는 지금은 포르투가 그리워진다. 아무래도 난 자꾸만 지금이 아닌 먼 곳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