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턴일렉트릭 300B 진공관
안녕. 디에디트의 파고다 공원, 올드리뷰어, 리뷰계의 암모나이트. 여러분이 사지 않을 제품만 골라서 소개하는 객원필자 ‘기즈모’다. 오늘도 디에디트 서버에게 평온한 휴식을 주기 위해 마이너한 주제를 골랐다. 오늘 주제는 ‘웨스턴일렉트릭 300B 진공관’이다.
잠깐, 브라우저 닫기 버튼을 누르지 마세요. 이러다 디에디트 객원필자에서 잘리게 생겼습니다. (갑자기 왜 존댓말인지는 묻지 말기를) 부디 가족의 생계가 달린 택시 기사에게 목적지까지 가며 정치 얘기 듣는다 생각하고 들어주기 바란다. 출발한다.
겨울이 왔다. 겨울이 오면 오디오 마니아들은 오디오를 떠올린다. 계속 말하지만 오디오 마니아들은 무슨 말을 해도 오디오를 떠올린다. 사실 추위로 인해 밖으로 나가기 힘든 겨울은 집에 틀어박혀 오디오를 듣기 좋은 계절이다. 그 중에서도 진공관 앰프는 겨울에 빛을 발한다. 진공관 앰프에서 열이 꽤 나오기 때문이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따뜻하다. 진공관 앰프에 쓰이는 진공관은 다양한 종류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명품이라고 불리는 제품이 있다. 오늘 주인공인 웨스턴일렉트릭 300B(이하 WE 300B)다. 파워앰프에 주로 쓰이는 싱글엔디드 진공관의 왕이다. 크고 우람한 크기와는 달리 출력이 높지 않다. 그래서 파워풀한 음악 보다는 조용한 현 음악이나 클래식 소품, 보컬 음악에 잘 어울리는 진공관이다.
WE 300B는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 1938년 처음 출시됐다가 트랜지스터가 개발되며 점차 수요가 줄어들어 1969년 생산을 중단했다. 이 진공관이 올 12월에 기적적으로 다시 재생산 된다고 한다. 80년 전 디자인과 기술 그대로 재생산되는 경우는 기술의 역사에서 극히 이례적인 경우다. 다만 WE 300B는 1981년 나사(NASA)의 요청으로 재생산을 한 적이 있다. 나사가 진공관을 요청한 것은 우주에서 음악을 듣기 위함이 아니다. 신호증폭용이다. 참고로 나사는 우주선에 진공관이나 인텔 486칩셋을 아직도 사용한다. 나사 사람들이 올드 제품 마니아라서가 아니다. 우주선 전자장비는 고성능보다는 오차가 적고 연산 신뢰성이 더 중요하다. 오랜 시간 동안 검증된 진공관과 486 칩셋은 우주 여행을 좀 더 안전하게 해준다고 한다. 잠시 옆길로 샜다.
이번 WE 300B의 부활은 나사의 요청이 아니다. 음악 마니아들의 수요가 늘어서다. 지난번에 테크닉스 얘기를 하면서도 말했지만 최근 LP 바람이 불면서 덩달아 진공관 앰프 수요가 늘어났다. 확실히 LP와 진공관 앰프는 궁합이 좋다. 잡음이 많이 나고 불안정하다는 단점도 닮았다. 준비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도 비슷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소리가 점점 달라지는 특성도 있다. LP는 바늘이 지날수록 음질이 무뎌지고 진공관은 음악을 들을수록 점점 윤기가 돈다. 윤기가 도는 느낌은 배음의 변화 때문인데 이 얘기는 잠시 뒤에 다시 하도록 하자.
WE(웨스턴 일렉트릭) 은 뭔가 미국 냄새가 많이 나는 이름이다. 맞다. 미국 회사다. 이 회사는 1869년에 세워졌다. 20세기도 아닌 19세기다. WE는 설립 초기에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 만든 백열등을 제조했다. 그리고 전화기를 최초로 발명한 ‘그레이엄 벨’과는 특허분쟁을 하기도 했다. 에디슨과 벨은 디에디트의 다른 기사에서는 잘 나오지 않는 이름이다. 모두가 <보헤미안 랩소디>의 ‘프레디 머큐리’와 ‘퀸’에 열광하는 시점에 낯선 얘기를 계속해서 미안할 따름이다. 그나저나 이 포스트가 어디까지 갈 건지 나도 감이 안 잡힌다. 목적지는 반 정도 남았다.
WE 300B 얘기는 이 정도로 하고 오늘 또 다른 주제인 ‘진공관 오디오는 정말 소리가 좋을까’로 넘어가기로 하자. 왜 아직도 사람들은 진공관 오디오를 찾을까? 그저 옛 것에 대한 향수일까? 아니다. 그것보다 더 명확한 이유가 있다. 진공관은 신호를 증폭시킬 때 왜곡이 발생한다. 진공관에서 발생하는 열과 불규칙한 저항 때문이다. 그런데 이 왜곡이 오묘하게도 듣기가 좋다. 이걸 배음이라고 하는데 배음이 음악의 화음 역할을 한다. 그래서 실제로 녹음되지 않은 소리가 들린다. 엄밀히 말하면 불량품이다. 그런데 이 배음이 현음악처럼 귀에 거슬리는 가는 소리를 두툼하게 만든다. 그래서 굵고 기름진 소리가 난다. 왜곡 덕분에 사람들의 귀에는 편안하고 친숙하게 들리는 거다. 하지만 왜곡이 지나치면 음이 흐려진다. 그래서 적당한 왜곡과 특성에 따라 몇몇의 오디오용 진공관이 특화돼 있다. 300B나 EL34, KT88, 12AX7 등이 대표적이다.
진공관 앰프의 단점도 있다. 아니 엄청 많다. 특히 파워앰프의 경우 열을 받기 까지는 배음이 별로 없어 이상한 소리가 난다. 그래서 진공관 앰프는 음악을 듣기 전에 먼저 켜고 10~30분 정도 달궈둬야 한다. 예전에는 그 시간에 LP도 고르고 턴테이블 세팅도 하고 담배도 피우고 커피도 한 잔 했지만 현대 오디오가 그랬다가는 그 시간에 제조사 홈페이지에 악플로 도배를 하고 소송을 걸었을 거다. 수명도 짧다. 열이 많이 나고 전력 소비도 큰 진공관은 수명이 그리 길지 못하다. 특히 앰프가 안정적이지 못하면 진공관도 쉽게 고장 난다. 옛날에는 고장 나면 고쳐서 쓰거나 그냥 그러려니 했지만 요즘 오디오가 그랬다가는 A/S 센터에서 멱살잡이로 시간을 보냈을 거다.
또 백열전구처럼 열이 많이 난다. 그래서 방에서 듣고 있으면 서서히 더워진다. 방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가면 가족들이 싫어하니 문도 닫아둬야 한다. 지옥이다. 추울 때 진공관 앰프를 샀다가 여름이 되면 손해를 잔뜩 보고 파는 게 오디오 마니아들의 숙명이다. 소리가 다 좋은 것도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현음악이나 조용한 발라드는 듣기 좋지만 싱글엔디드 파워앰프는 빠른 음악은 쥐약이다. 파워도 약할뿐더러 음악은 빨리 진행되는데 뒤늦게 배음이 도착해 사이키델릭한 음악으로 바뀐다. 따라서 진공관 앰프의 소리가 무조건 좋다는 것은 편견이다. 음악적 특성과 앰프 특성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진공관 앰프 소리가 좋다는 편견이 생긴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추측된다. 하나는 진공관 앰프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그저 진공관 앰프가 비싸니 소리도 좋겠거니 하는 편견을 가지게 된 경우다. 또 하나는 초창기 트랜지스터 램프가 나왔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트랜지스터는 진공관에 비해 아주 저렴하다. 100원짜리도 있다. 이처럼 저렴한 부품으로 앰프를 만들 수 있어 저가형의 조악한 제품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그러다 보니 전반적인 품질이 진공관 앰프보다 못했다. 그래서 굳어진 편견이 지금까지 내려온 경우다. 지금은 대부분의 트랜지스터나 디지털 앰프가 더 정확하고 뛰어난 음질을 가졌다.
그러나 부정확하고 단점도 많지만 진공관 앰프는 여전히 쓰인다. 기타리스트들은 기타 소리에 특성을 가미하기 위해 기타 앰프에 진공관을 즐겨 쓴다. 청각이 퇴화돼 날카로운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나이 든 음악 마니아들에게 따뜻하고 편안한 진공관 소리는 최후의 안식처다. 반대로 어린 시절 부모님과 들었던 추억 속에 남아 있는 소리를 찾기 위해 진공관 소리를 찾기도 한다. 꼭 그런 특수한 케이스가 아니더라도 턴테이블과 진공관 앰프로 음악을 듣는 경험은 특별하다. 아날로그 턴테이블의 고요한 회전, 바늘이 바이널을 지날 때마다 들리는 친숙한 잡음, 추운 겨울 방안을 따뜻하게 덥히는 진공관의 희미한 불빛과 진공관에서 나오는 따스한 열기는 음악 감상을 청각만 아니라 시각, 촉각으로 느끼게 해준다. 이는 현대 오디오에서 느낄 수 없는 공감각적인 경험이기도 하다.
최신 기술은 항상 과거의 유산이다. 초당 40억 회의 연산이 가능한 인텔 칩셋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진공관이 나온다. 진공관은 ‘에디슨 효과’라는 당시까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새로운 발견에 의해 태어났다. 기술이 혁신을 계속하는 동안 필요가 없어진 진공관은 그 자리에 멈췄고 멸종될 위기에서 예술과 만나 끝내 오늘날까지 살아 남았다. 여기에는 100년 전에 인간이 발견해 낸 기술과 혁신이 화석처럼 새겨져 있다. 그리고 우리는 진공관을 통해 우리의 조상이 들었던 음악을 비슷하게 재현할 수 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진공관 앰프는 시대를 뛰어넘는 타임머신 같은 마법이다. 지루한 얘기 듣느라 고생했다. 여기까지다. 이제 목적지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