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요의 숙소에 묵었다
안녕. 디에디트의 파고다공원, 올드리뷰어. 객원필자 기즈모다. 오늘은 여러분이 사지 않을 마이너한 제품 리뷰 대신 감성적인 공간을 준비했다. 사실 나는 제주도에 꽤 오래 살았다. <제주도 절대가이드>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그래서 오늘은 제주도 얘기를 해보려 한다.
제주도를 생각하면 누구나 그림 같은 바다를 떠올린다. 나도 그랬다. 제주의 바다는 언제나 힐링이 되는 풍경이었다. 겨울만 빼고. 겨울의 바다는 그놈의 힐링을 운운하기에는 너무 습하고 거세다. 예로부터 삼다도라 불릴 정도로 바람이 거센 제주의 겨울은 특히나 가혹하다. 잘 세팅한 머리도 1초 만에 망나니 머리가 되고 온몸은 딱딱하게 얼어붙는다. 그래서 제주 겨울 여행은 바다보다는 숲이 좋다. 육지보다 높은 기온 덕분에 산책하기도 좋고 새소리와 숲에서 나는 향기가 마음을 어루만진다.
제주도 도순동에 위치한 ‘도순돌담집’에서 이틀을 지냈다. 도순돌담집은 제주도의 버려진 집을 개조해서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로 만드는 독특한 프로젝트인 ‘다자요’의 결과물이다.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와디즈’를 통해 성공적으로 펀딩에 성공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도순돌담집은 숙박을 위해 지은 집이 아니다. 그렇다고 숙소로 적합한 집을 힘들게 골라 매입한 공간도 아니다. 제주도의 흔하디흔한 ‘보통집’을 리모델링해서 만든 공간이다.
필요가 없어 쓰지 않는 빈 집을 10년간 공짜로 빌리고 대신 리모델링을 무료로 해준다. 집주인은 필요 없는 집을 멋지게 고칠 수 있고 ‘다자요’는 그 집을 이용해 10년간 숙박료를 받을 수 있다. 빈 집 때문에 활기가 없어진 마을로서도 숙박업소로 다시 태어난 빈 집 덕분에 마을이 활기를 띠게 된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프로젝트다.
그래서 겉모습은 그저 제주도에 흔하디흔한 가옥이다. 전통적인 초가집도 아니고 돌집도 아니다. 슬래브지붕과 회벽으로 이뤄진 평범한 외양이다. 대신 내부가 덜 춥고 흙먼지도 없다. 외떨어진 숲 속도 아니다. 제주도의 따뜻한 남쪽(중문과 서귀포 사이) 평화로운 마을에 위치해 있다. 조용한 동네지만 주변에 집들이 많기 때문에 밤에도 쓸쓸하지 않고 안전하다. 마당이 꽤 넓어서 저녁에 바비큐를 해 먹어도 크게 주위에 폐를 끼치지 않는다.
인상적인 것은 마당이다. 몇백 평은 될 정도로 상당히 넓다. 마당에는 온갖 나무들과 허브가 심어져 있어 바람이 불 때마다 향기가 지나간다. 또 아침이면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깰 수 있다. 동네 한가운데 있는 스테이지만 마치 숲속에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마당에는 온갖 나무와 허브가 심어져 있고 도순돌담집 주위는 온통 귤밭이 감싸고 있다. 한두그루가 아니다. 수백 그루의 귤나무가 집을 아늑하게 두르고 있다. 옛날 제주도 마당 넓은 집에는 집집마다 텃밭처럼 귤밭이 있었다. 귤나무는 조경 역할도 하고 방향제 역할도 하고, 간식도 되고 소득원이 되기도 했다. 텃밭에 있는 귤나무로 아이들을 대학까지 보내는 집도 있었다고 한다.
도순돌담집을 이용하면 이 귤을 원 없이 따 먹을 수 있다. 귤가위와 안전장갑까지 잘 마련돼 있다. 특히 귤이 익어가는 10월 말부터 이듬해 2월 까지는 밥 대신 귤만 먹어도 될 정도로 귤이 주렁주렁 열린다. 귤은 배만 부르게 하는 게 아니다. 익어가는 향기도 좋다.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특유의 귤향기가 오감을 자극한다. 요즘은 제주도 관광지에서 귤따기 체험이 인기다. 가족이 귤따기만 체험해도 몇 만 원이 나가는데 도순돌담집에서는 공짜로 귤따기 체험이 가능하다.
내부를 보자. 전통 가옥은 집안이 넓지 않다. 천장도 낮다. 그래서 벽을 다 없애고 원룸 형태로 만들었다. 천장도 뜯어내어 서까래가 드러나게 했다. 벽을 페인트로 다시 칠하고 마루만 다시 깔았다. 너무 밋밋하니 간접 조명으로 포인트를 줬다. 하지만 호텔처럼 세련된 공간은 아니다. 모든 것을 다 뜯어내는 게 아니라 살릴 것은 최대한 살리고 재활용했다. 버려진 집을 재생한다는 원래 취지에 맞는 리모델링이다.
집안 중앙은 마룻바닥까지 뜯어내고 카펫을 깔았다. 가족이나 친구끼리 모여 밥도 먹고 대화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바닥이 주변보다 낮기 때문에 여기에 앉아 있으면 아늑한 느낌을 준다. 다만 부엌이나 침대로 들어가는 부분에 턱이 있어 불편함은 있다.
오픈 된 침실은 평범하지만 편안하고 매트리스는 적당한 탄성을 가지고 있다. 고급스러움보다는 실용성에 중점을 뒀다. 도순돌담집은 보일러가 따로 없고 히터와 전기열선 바닥 난방을 한다. 제주도 남쪽은 겨울에도 그다지 춥지 않기 때문에 두 가지 난방장치로 충분하다.
부엌도 고급스러움보다는 실용성 위주다. 예쁘고 불편한 게 아니라 필요한 모든 게 다 구비되어 있다. 기본적인 양념은 물론이고 식용유, 참기름, 간장까지 구비되어 있고 식기도 넉넉하다. 제주 맛집을 찾아 스마트폰에만 몰두하다가 도순돌담집에 오니 갑자기 밥을 해 먹고 싶어진다. 스마트폰도 내려놓게 된다. 근처 마트에서 바비큐 거리를 사오게 만드는 부엌이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제주도 토종 유정란이 네 알 들어 있다. 도순돌담집은 파면 팔수록 감동의 연속이다. 청와대 행정관을 해도 될 정도로 기획력이 뛰어난 호스트다.
이 계란으로 다음날 아침에 식빵 맛있기로 유명한 서귀포 ‘채점석 베이커리’에서 식빵을 사다가 계란 토스트를 해 먹었다. 발뮤다 토스터와 더 팟을 안 쓰고 그냥 가기에는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떨어진 빵가루는 다이슨 청소기가 맡았다.
카페 가기도 아깝다. 아는 사람은 다아는 ROK 그라인더에 비브레 드리퍼, 텀블러까지. 물론 원두와 각종 차 종류도 빠짐없이 구비되어 있다. 핸드드립은 어려울 게 없다. 원두를 그라인더에 갈아서 드립퍼에 넣고 뜨거운 물을 적당히 부으면 된다. 유튜브에 다 나와 있다. 도전해 보자.
화장실 역시 실용과 깔끔을 테마로 만든 공간 같다. 모든 것이 넉넉하게 구비되어 있고 불편함이 없다. 수건도 12개나 구비되어 있다! 남이 빨아주는 수건은 얼마나 사치스러운가.
이 화장실 측면에는 문이 있다. 이 문을 열고 나가면 욕조가 나온다.
도순돌담집의 백미는 욕조다. 귤 밭 가운데 욕조가 있다. 귤향기를 맡으며 거품목욕을 즐길 수 있다. 손만 뻗으면 귤을 잡을 수 있기 때문에 간식까지 먹으며 즐길 수 있다. 야외 욕조야 이제 흔하디 흔해졌지만 귤을 먹으며 목욕을 할 수 있는 곳은 처음 본 듯 하다.
주변은 벽과 귤밭으로 잘 둘러져 있기 때문에 누가 훔쳐볼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수건 한 장으로 잘 두르고 욕조까지 가면 된다. 눈 오는 날에 다시 오고 싶다. 눈을 맞으며 따뜻한 욕조에 누워 차가운 귤을 까 먹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여행을 가면 주로 호텔이나 리조트, 펜션 등을 골랐다. 대규모 객실이 있어 예약도 쉽고 편의 시설도 있고 수영장이나 게임룸 등을 이용하기도 좋다. 하지만 어느 순간 여행이 규격화되는 느낌이었다. 똑같은 30평대 아파트에 살다가 여행을 가도 비슷한 구조의 공간에서 비슷한 서비스를 받으며 비슷한 음식과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 민박이라는 대안이 있기는 했지만 민박은 분위기나 청결 상태, 편의성이 천차만별이고 제대로 된 예약 시스템을 갖춘 곳도 드물었다.
그래서 에어비앤비나 스테이 같은 숙소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규격화된 숙박업소가 아니라 호스트의 개성과 그 지방의 특성이 묻어 있는 숙소들이다. 도순돌담집은 좀 더 진보된 형태의 새로운 스테이다. 지역 특성을 살리고 지역을 재생한다는 메시지도 좋지만 스테이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각종 편의시설을 편집증적으로 구비해 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도순돌담집은 늦가을부터 초봄까지 제주도를 여행하는 여행객들에게 잘 맞는 숙소다. 중문과 서귀포 사이에 따뜻한 도순동에 위치하고 있어 추운 계절에도 10~15도가 넘는 기온을 유지한다.
귤은 10월이면 익기 시작하고 이듬해 2월까지는 따 먹을 수 있다. 귤이 익어가는 귤 밭에서의 특별한 하룻밤. 도순돌담집에서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