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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디트 Jun 07. 2019

식전주의 귀족, 릴레 블랑

소개합니다! 복숭아와 오렌지향이 흐르는 리큐어, 릴레 블랑!

안녕, 맛있는 술만 골라서 여러분들에게 추천하는 알콜의 요정 에디터M이다. 작년 7월 성글었던 여름이 짙게 무르익어 갈 무렵,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식전주(A.K.A 아페르티보) 아페롤을 소개한 적이 있다. 부르펜 맛이 났던 어른들의 해열제. 진득하고 오렌지빛이 돌던 영롱한 술 말이다. 혹시 못 봤다면, 그 기사를 먼저 보고 오는 것도 좋겠지.



올해는 여름이 조금 일찍 찾아왔다. 아직 6월인데! 물색없이 울어대는 아이폰의 폭염주의보 알람을 어이없이 쳐다보다 문득 이 술을 소개해야겠다 싶더라. 이번에도 역시 아페르티보다. 아니, 프랑스에서 왔으니 아페르티프라고 해야겠지. 식전주의 귀족, 혈관에 보르도의 혈통과 향긋한 복숭아와 오렌지 향이 흐르는 바로 릴레 블랑이다.



“식전주? 아니 빈속에 술을?
안주도 없이 좀 섭하네..”


반주의 나라 한국에서 식전주는 아직은 생소한 개념일 수 있다. 하지만 길어진 만큼 늘어지는 한여름의 오후 가볍게 홀짝이는 아페르티보는 얼마나 근사하고 황홀한지! 쌀쌀달콤한 맛은 지루했던 시간을 총천연색으로 물들일 수 있다. 정말이라니까.


마침 얼마 전부터 이 릴레 블랑이 이마트에 풀렸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맛만큼은 디에디트 에디터들이 보증한다. 근데 그래서 이 술이 뭐냐고?


릴레 블랑은 와인을 베이스로 한 리큐르다. 기본 베이스는 와인. 와인에 다양한 맛을 내는 것을 첨가한 것이다. 이렇게 와인을 베이스로 한 리큐어를 베르무트(vermouth)라고 한다.


*여기서 잠깐! 에디터M의 TMI*


리큐어(Liqueur)는 우리나라 말로 하면 혼성주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위스키, 럼, 브랜디 등 증류한 술에 과일이나 과즙 약초 향신료 감미료 등을 섞을 술을 말한다. 리큐어, 리큐르 모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주세법에서 리큐어라고 규정하고 있으니 일단 리큐어라고 외우자. 미국에서 술을 파는 가게를 말하는 리커스토어의 리커(Liquor)와 또 다른 단어니까 헷갈리지 말 것.


리큐어는 그 나라만의 주세법에 따라 다르게 분류되기도 하고, 또 ‘다양한 증류주에 다양한 것을 섞은 것’이라는 굉장히 애매한 정의 때문에 심지어 우리나라의 과일소주와 담금주도 이 리큐어의 범위에 들어간다. 사실 리큐어는 위스키, 맥주, 보드카처럼 명확한 성격의 술 외에 ‘기타 나머지’를 지칭하는 술이라고 해도 해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정리하자면 “엥? 이 술은 종류가 뭐예요?” 했을 때 명확하지 않은 술은 그냥 다 리큐어다라고 생각하면 얼추 80%는 맞는다.


[해외에도 뱀술이…]


리큐어의 스펠링이 복잡한 이유는 역시 라틴어에서 왔기 때문이다. 녹다 녹이다 라는 뜻의 ‘liquefacere’에서 나온 말인데, 그 이유는 몇백 년 전 사람들은 증류한 알콜에 각종 향료와 향초, 심지어 고기까지 섞는 괴랄한 레시피(혹은 실험)를 만들어 냈거든. 왜냐고? 실제로도 몇몇 리큐어는 의사가 처방을 하고 사람들은 이를 약으로 마시기도 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산삼이나 뱀 따위를 넣은 술을 가지고 어르신들이 “이게 다 약이여 약”이라며 마시던 것을 상상하면 되겠다. 실제로 유럽에서도 말라리아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키니네를 넣은 리큐어가 흔했다. 지금 소개하는 릴레도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키니네를 넣은 레시피를 유지해왔다.


약으로도 마셨지만, 식전, 식후, 그리고 잠자기 전에도 마신다. 식전주를 아페르티프, 식후주를 디제스티프 그리고 자기 전에 마시는 술을 나이트캡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쓰니 하루종일 술만 마신 것처럼 보인다면 사실. 진정한 술꾼은 시간과 이유를 가리지 않는 법. 우리나라에서는 리큐어를 가장 흔하게 칵테일 재료로 소비한다. 바 뒤쪽에 깔린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수많은 술들 중 많은 부분이 리큐어라고 볼 수 있다.



리큐어들은 하나같이 자기 주장이 강하고, 하나하나 흥미로운 이야기보따리를 품고 있기 때문에 한마디로 규정하기가 참 거시기하다. 대표적인 리큐어 몇 개만 예를 들자면 베일리스, 칼루아, 말리부, 압생트, 예거밤에 마시는 예거마이스터… 등등. 지금까지도 무엇을 넣었는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비밀의 레시피라거나(영업비밀) 혹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이 꼭 끼어 있어서 찾아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설명이 너무 길어졌지만 리큐어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달콤쌉쌀하고 독한 술 정도로 이해하면 대충 맞다. 자꾸 어렴풋이 설명해서 미안하지만 자세하게 설명하다 보면 하루종일 떠들어도 부족하다.



위의 TMI에서도 잠깐 언급하긴 했지만 원래 릴레 블랑의 이름은 키나 릴레였다. 지금과 맛은 거의 비슷하지만 키니네 성분을 메인으로 해서 훨씬 쓴맛이 강했다고 한다. 114년 전에 단종이 되었으니 맛본 적이 없어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다 1986년 100년이 넘어 이어져 온 키니네 성분을 대폭 줄이고 이름도  릴레 블랑으로 바꾸면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릴레 블랑은 아페르티프의 귀족이다. 물론 투명한 병도 복숭아 속살을 닮은 색도 물론 참 고와서 귀족이라고 불리기에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릴레 블랑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프랑스 보르도 지역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릴레 블랑의 85%를 보르도에서도 가장 좋은 와인이 만들어지는 남쪽 Podensac 지방에서 생산된 와인을 베이스로 하고 여기에 시트러스 리큐어 그리고, 설탕에 절인 오렌지와 꿀, 소나무 등등을 넣어 오크통에서 12개월 동안 숙성한다.




정말이지 훌륭한 식전주다. 아니 사실은 에디터H의 말처럼 훌륭한 디저트 술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알코올 도수는 17%로 꽤 높지만 워낙 달콤해서 높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얼음을 가득 담은 리델 잔에 릴레 블랑을 가득 따라서 마시면 쉽고 빠르지만 우아하고 근사한 아페르티프가 된다. 오렌지 슬라이이스를 한 조각을 더해주면 싱그러움이 두 배가 된다. 그냥 마셔도 좋지만 집에 오렌지가 있다면 꼭 추가해서 마시는 것을 추천한다.



릴레 블랑은 뜨거운 햇살을 피해 그늘 아래서 마시는 게으른 낮술이 최고라고 믿지만 제임스 본드처럼 즐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릴레 블랑은 제임스 본드의 첫사랑의 이름을 딴 칵테일로도 유명하거든.


[이미지 출처: 007 카지노 로얄]

영화 <007 카지노 로얄>은 제임스 본드가 아직 살인 면허를 받기 전, 이제 막 007이라는 코드명을 받고 일을 시작하는 때를 그리고 있다. 영화 속 큰 판돈이 걸려있는 카드게임이 무르익어가는 순간 드라이 마티니를 주문했다가, 바로 취소한 뒤 이렇게 말한다.


Three measures of Gordon’s, one of Vodka, half a measure of Kina Lillet, shake it over ice. and add a thin slice of lemon peel


고든스 진과 보드카 그리고 릴레, 그리고 얼음을 넣어서 흔든 뒤 레몬 슬라이스를 더한 칵테일이다. 한국어 자막에서는 릴레를 그냥 백포도주로 번역해서 좀 아쉽긴 하지만. 여하튼 즉석에서 생각나는 대로 조합한 이 칵테일이 퍽 마음에 들었던 본드는 과음하다 악당이 술에 독을 타는 바람에 죽을 위기를 간신히 넘긴다.


[이미지 출처: 007 카지노 로얄]

더 재미있는 건, 제임스 본드의 놀랍도록 느끼한 작업멘트다. 카드게임에서 이긴 본드는 축하 파티에서 또다시 이 칵테일을 주문한다. 그리고 이 칵테일의 이름을 베스퍼(극 중에서 본드와 사랑에 빠지는 여자 이름, 에바 그린이 연기한다)로 붙인다. “뒷맛이 씁쓸해서?”라고 붇는 베스퍼의 물음에 본드의 대답은 “아니, 한번 맛 들이면 딴 건 못 마시지”라니. 그 이후의 이야기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도록 하겠다.



한니발 렉터가 즐겨 마시는 술도 바로 릴레 블랑이다. 한니발은 인육으로 멋진 6코스를 만든 뒤, 이를 와인과 함께 즐기지 않을 땐 릴레 블랑을 보드카와 얼음을 섞은 뒤 오렌지 필을 얹어서 마시곤 했다. 살인 면허가 있는 제임스 본드와 식인을 하는 한니발 렉터가 즐겨 마시는 술이라니, 어째 우아한 술이라는 내 의도와 다르게 좀 그로테스크해진 것 같지만 둘 다 취향만은 그 누구보다 좋으니까.


정말 괜찮은 술이었다. 에디터M의 이름을 걸고 강력추천! 사실 리뷰를 쓰는 와중에도 계속 홀짝이는 바람에 벌써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조만간 또 이마트를 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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