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파스 엔젤맨, 너 좀 맛있다?
지금 한국엔 나 혼자다.
에디터H는 날 버리고 미국으로 떠났다.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날 거라 생각했는데 아주 잘 있단다. 흥. 있을 땐 조금 성가시더니 없으니까 허전한 이 기분은 혹시… 사, 사랑인가?
오늘은 H가 없는 외로운 서울 하늘 아래서 청승맞은 추억팔이나 해볼까.
작년쯤이었나? 사는 게 재미가 없었다. 매일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일상에 염증을 느낀 우리는 새로운 모임을 만들기로 한다. 멤버는 우리 둘. 일단, 근사한 이름부터 만들자. 맥북 어때? 앱등이인거 티 내냐고? 오해다. 맥북은 맥주와 책(book)의 합성어니까. 경리단, 해방촌을 전전하며 술과 함께 책을 읽자는 취지였는데, 사실 ‘북’보다는 ‘맥’에 집중했다.
얼마 전, 에디터H의 집에 모여 각자의 맥북으로 개미처럼 각자의 업무에 집중하고 있을때였다. 문득 바로 옆 창문으로 시선이 머물렀다. 하늘이 예쁘더라. 해가 질까 말까하는 오후였고, 매일 밤 붉은 노을이 피던 때였다. 다 마시고(?) 살자고 하는 짓이다. 지금 당장 맥북을 덮고 옥상으로 나가자. 중단되었던 맥북(beerbook)의 부활이다!
읽지 않고 책장에 묵혀둔 책과 냉장고의 맥주를 꺼내들고 당장에 옥상에 자리를 잡았다. 아, 씹을 거리가 없으면 심심하니까 안주는 벨큐브.
냉장고에 있던 맥주는 볼파스 엔젤맨 헤페바이젠. 라투아니아에서 왔다. 뉴욕타임즈가 발표한 맥주 순례 시 꼭 들러야 하는 나라엔 독일, 벨기에 그리고 라투아니아가 있었다. 라투아니아는 독일과 벨기에와 어깨를 겨룰 정도로 수준급의 맥주가 있는 곳이다.
일단 크다. 보통 수입 캔맨주가 커봤자 500mL 정도인데 568mL라는 용량은 정말 혜자스럽다. 이 애매한 용량은 유럽의 파인트를 기준으로 했다.
맥주 상단엔 황금색 호일이 둘러져있다. 난 그리 깔끔한 편이 아닌데도 캔맥주를 마실 땐 늘 손가락으로 입구를 훔쳐내고 마신다(분명 내 손가락에 세균이 더 많았겠지만). 마시는 사람을 생각한 세심한 배려다. 게다가 무언가를 뜯는 과정은 길어질 수록 좋은 법이다. 난 새 거가 좋아.
거품은 꽤 풍성하다. 예술을 해보겠다고 부산을 떨어서 사진에선 잘 표현이 되지 않았는데, 잔에 따르면 마치 머랭같은 거품이 봉긋하고 솟아 올라온다. 단단한 거품이 입술을 스쳐 입안에 들어올 때의 황홀한 기분이란! 향은 더 인상적이다. 어떤 한 가지가 튀어나오는 것 없이 밸런스가 좋은 화사한 향을 낸다. 기포가 샴페인처럼 촘촘해서 목넘김도 부드럽다. 양이 많아서 더 꿀꺽꿀꺽 마시긴 했다. 단단한 거품부터 우아한 향, 촘촘한 탄산까지 입안에서 느껴지는 ‘질감’에 많은 신경을 썼단 느낌을 주는 맥주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맛있다 이거 꽤.
책을 몇 장 넘기다가 맥주를 마시고, 알딸딸한 기분으로 웃고 떠들다 보니 하늘이 내 얼굴처럼 붉어졌다. 알찬 하루였다. 그래 이날 좋았지.
에디터H야, 빨리 한국 와라.
나 심심하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