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안녕, 에디터B다. 요즘엔 친구를 만날 때 안녕하냐는 인사를 내뱉기가 어색하다. 지구 어디에도 안녕한 곳이 없는데, 친구의 사정이라고 별반 다를까. 다들 만남을 자제하며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지만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은 친구를 만나고 있다. 자영업자에 대한 걱정과 함께 그런 만남조차 없으면 주말의 긴 여유를 견디기가 힘들다는 이유로. 대단한 걸 하는 건 아니다. 그냥 삼겹살이나 구워 먹지.
지루할 때는 새로운 취미를 늘려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예를 들어, 요가를 한다거나 브이로그를 찍어본다거나 담금주를 만들어 보거나. 이번에 처음으로 담금주를 만들어보았다. 사실 작년 12월에 담근 거라 ‘이번’이라고 말하기엔 민망하지만 말이다.
인생 첫 담금주다. 소설가 김애란이 <너의 여름은 어떠니>에 쓴 문구가 생각났다.
어떤 음악을 들으면 그곳을 제게 처음 알려준 사람이 생각나요…그런 건 사물에 영원히 달라붙어 버리는 것 같아요.
그의 표현처럼 처음으로 시도하는 모든 것에는 고유한 이름표가 찰싹 붙는 것 같다. 영원히 뗄 수 없는 이름표. 나의 담금주에는 ‘2019년 12월 디에디트’라는 이름이 붙었다.
담금주를 제조한 건 처음이지만 낯설지는 않다. 본가에서 많이 봤다. 마치 담금주 매장처럼 많이도 진열되어있다. 도라지주, 인삼주 없는 게 없다. 담금주를 총괄하시는 엄마에게 요즘 투잡 하시냐고 물었더니, 엄마는 손사레치며 이 정도는 많은 것도 아니라고 겸손히 말했다.
저 많은 걸 언제 다 드실 거냐 하니, 담글 뿐 마시지는 않는다며 깨달음을 얻은 분처럼 말한다. 그냥 그렇게 진열되어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나 뭐라나. 그때는 번거로운 취미 활동이라고 생각했는데, 키트로 만들면 생각보다 귀찮지 않더라.
나는 묘약의 담금주 키트를 주문했다. 병 사이즈가 아담하니 보기에 예뻐서 마음에 들었다. 큰 공간을 차지하지 않아서 부담이 없고, 번거롭게 재료를 살 필요도 없다. 병 안에 건조시킨 재료가 다 들어있다. 내가 할 일은 소주를 사서 채워 넣는 것뿐이다. 손이 많이 가지 않아서 좋았다.
묘약에서는 여섯 가지 종류의 키트를 판다. 애플시나몬, 무화과, 야관문, 인삼, 진저페일 그리고 딸기바질. 이중 인삼주 키트의 가격만 2만 9,000원이고 나머지 키트는 모두 1만 7,000원이다. 기본 용량은 500mL인데 1,000mL로 변경하고 싶다면 인삼주는 2만 원, 다른 키트는 1만 2,000원을 추가로 내면 된다.
사소한 이유지만 귀여운 이름도 마음에 든다. 인삼주의 이름은 ‘어른이 되는 방법’, 야관문은 ‘울근불끈 내사랑’, 무화과는 ‘너의 꽃, 나의 달콤함’이다. 담금주는 어르신들이 좋아할 만한 예스러운 취미라고 생각했는데, 아기자기한 디자인과 네이밍을 보니 그런 편견이 조금씩 사라졌다.
나는 3개만 샀다. 맛있을 것 같아서 무화과와 딸기바질을 샀고, 혹시나 해서(?) 야관문까지 구매했다.
묘약에서 추천하는 숙성 기간이 있었는데, 딸기는 21일, 무화과는 25일, 야관문은 91일이라고 하더라. 세 달이 지났으니 야관문은 기가 막히게 딱 맞게 익었을 타이밍이다. 하지만 딸기와 무화과…? 살짝 걱정이 되지만, 모르겠다. 일단 마셔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셋 중 가장 좋았던 건 딸기주. 뚜껑을 여는 순간에 딸기의 향이 훅! 콧속으로 들어왔다. 희석시키지 않은 상태에서도 마셔봤는데, 뭐랄까 이과도주를 마시는 것과 비슷하다. 알콜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실시간 위치추적이 되는 느낌이다. 한 모금 마셨는데도 술이 확 올라왔다. 여러 커뮤니티를 보니 담금주를 물이나 음료에 희석해서 먹는 분들이 많더라. 나도 산펠레그리노에 섞어 마셨다. 훨씬 좋았다.
묘약이 재밌는 건 담금주를 관리할 수 있는 앱이 따로 있다는 거다. 앱을 실행시켜서 바코드를 입력하면 숙성되기까지 남은 날짜를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묘약 앱의 안정성에 큰 문제가 있다.
담금주를 등록하자마자 강제 종료가 되었다. 구글 플레이스토어 리뷰를 남기려고 가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화가 나 있었다. ‘등록하려고만 하면 강제로 종료가 되는데…’ ‘앱 홍보는 안 하는 게 나을 거 같은데요…’ 다른 담금주 키트 브랜드와 차별화되는 장점인데 제대로 되지 않으니 아쉬웠다.
담금주 여섯 종류를 모두 등록하면 장미주 키트를 준다고 한다. 포켓몬스터 체육관 뱃지 모으는 것 같고 재미있다. 참고로 장미주의 맛이 너무 궁금한데 여섯 병을 다 구매할 생각이 없다면 다른 브랜드 몰에서 구입하면 된다. 장미주 키트를 파는 곳은 여러 군데가 있다.
나는 깜짝 놀랄 만한 선물을 주는 걸 즐긴다. 덕분에 파격적으로 성공하거나 파격적으로 실패하곤 한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기억에 남는다면 (나는) 좋다. 담금주도 인상 깊은 선물로 괜찮은 것 같다. 꼭 묘약이 아니어도 담금주 키트를 판매하는 곳은 많다. 다른 쇼핑몰에는 국화, 깔라만시, 커피, 레몬자몽처럼 묘약에 없는 맛들도 판매하고 있더라.
담금주를 홀짝 마시다 보니 까맣게 잊었던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고1 담임선생님은 수능이 끝나고 어른이 되어 자신을 찾아오면 그때 개봉하겠다며 이맘때 도라지주를 담갔다. 그 선생님은 꽤 무서운 편이라 결국 동창 중 아무도 찾아가지 않았다는 슬픈 엔딩을 들었는데, 아무튼 담금주에는 소주, 맥주와 다른 정겨운 바이브가 있는 것 같다.
소주가 인생의 쓴맛을 연상시키고, 맥주가 젊은이들의 불금을 떠올리게 한다면 담금주는 “경사났네 경사났어, 이렇게 좋은 날, 이 술을 안 마실 수 없지!”같은 상황이 떠오른달까. 나도 인삼주나 하나 담가 볼까. 뭔지 모를, 언제 올지 모를 경사스러운 날을 고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