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글 쓰고 향 만드는 사람, 객원필자 전아론이다. 요즘 같은 날에는 계절과 계절 사이에 고여있는 것만 같다. 이미 끝난 겨울의 뒷자락과 헤어지지 못해 미적대는 느낌, 아직 오지 않은 봄을 넘어 여름까지 희망하며 셀프 고문을 하는 기분. 온라인 쇼핑몰 장바구니에 담겨 있던 봄옷은 이미 배송 중이다. 아직 거리엔 꽃 한 송이도 제대로 피지 않았는데.
한 해는 이미 1월 1일에 시작되었다는 걸 알지만, 봄이 찾아오면 이상하게도 새로운 해가 진짜 시작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꽃봉오리만 봐도 설레고 뭔가 기분 좋은 일이 생길 거란 착각에 빠진다. 동시에 지구별 대한민국에 3n년 산 사람으로서 ‘아, 이 봄도 곧 가고 언젠가 또 다음 봄을 맞이할 때가 오겠지.’ 하는 허무도 찾아온다. 이래서 사람들이 봄을 타는 걸까?
계절의 반복을 떠올리며 괜시리 허망한 마음 때문인지, 황인찬 시인이 낸 새 시집 이름이 눈에 확 들어왔다. <사랑을 위한 되풀이> 살짝 반짝이는듯 불투명한 흰색 종이로 싸여진 표지가 시집 이름의 먹먹함을 한층 더하는 것 같았다.
수록된 첫 시 ‘물가에 발을 담갔는데 생각보다 차가웠다 그러나 아무것도 해명된 것은 없다’를 거쳐 ‘생과 물’과 ‘구곡’을 지나 ‘통영’까지 이르렀을 때, 나는 물과 풀과 바다와 바람 사이를 넘나든 기분이었다. 시집에 코를 박으면 여름 냄새가 날 것 같았다. 아직 봄도 오지 않았는데 여름을 펼쳐 들고 있다니. 이것은 지난 여름일까, 앞으로 올 여름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찬장에서 아주 오랫동안 마시지 않았던 술을 찾았다. 생생한 초록색 병이 눈에 띄는 탱커레이 넘버 텐. 어찌나 오랜만에 꺼냈는지 술병 위에 자욱하게 먼지가 자욱하게 낀 게 왠지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의 커버를 닮은 것도 같았다.
탱거레이 넘버 텐은 진(gin)이다. 풀 냄새와 시트러스 향이 앞서는 이 술은, 마티니에도 진토닉에도 잘 어울려 여름에 칵테일을 마실 때 자주 손이 간다. 달지 않고 드라이한 뒷맛, 답답하지 않고 산뜻한 무게감이 매력적이다. 뚜껑을 살짝 돌려 병을 여니 몇 달간 갇혀있었던 탱거레이 넘버텐의 푸릇하고 상큼한 향이 얼굴에 확 끼친다. 오래된 여름 냄새의 문이 열린 것처럼.
잔 가득 달그락거리는 얼음을 채운다. 탱커레이 넘버 텐과 토닉워터를 적당량 섞어 진토닉을 만든다. 이렇게 혼자 마실 칵테일을 만들고 있다 보면, 내가 굉장히 어른이 된 기분이 든다. 이미 어른인데 어른이 된 기분이 든다니. 이상한 말이지만 사실이다. 이제는 여름 방학도 없고, 선풍기 앞에 앉아 “아-아-”하며 울림음을 들을 만큼 남아도는 시간도 없다. 그런 여름을 반복하며 자라난 나는 어디까지 온 걸까? 어쩌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수록시 ‘재생력’을 읽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불안하고 섬세한 영혼의 아이들이 모험을 마치고 일상을 회복하였으며, 앞으로도 크고 작은 모험을 통해 작은 성장을 거듭해나갈 것임을 암시하는
그런 여름의 대단원이다”
_ 재생력 中
그렇다고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에 먹먹하거나 무거운 시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모래 사장에 중간 중간 반짝이는 모래알처럼, 황인찬 시인은 위트와 재치 그리고 귀여움(내 기준)을 시 안에 적절히 배치할 줄 아는 시인이니까. 그 문장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웃게 되는 순간들이 좋다. ‘레몬그라스, 똠양꿍의 재료’ 같은 시처럼 말이다. 물론 반짝이는 모래알인 줄 알았는데 밟았더니 유리 조각일 수도 있으니 조심할 것.
“여름이었고, 밤이었고, 너였고, 무한하게 펼쳐진, 나랑은 무관한 별들이었고, 새콤한 게 더운 날에는 딱이니까
향긋한 파 같은 레몬그라스
쑥갓을 닮은 고수
이 시는 겨울에 생각하는 여름밤에 대한 시,
출출한 밤이 오면 생각나는 시”
_레몬그라스, 똠양꿍의 재료 中
이 시를 펼친 순간, 지금 내가 이 시집을 읽으며 술 마시고 있는 걸 누군가(시인)에게 들킨 것만 같았다. 나름의 화답(?)을 하기 위해, 레몬그라스 대신 향긋하고 새콤한 레몬을 더하기로 했다. 사실 허브, 약초, 솔 향이 강한 다른 진들과 달리 탱커레이 넘버 텐은 시트러스 향이 가장 돋보인다. 칵테일에 잘 어울리는 세련된 진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제조 기법을 바꿨다는 설도 있는데, 난 오히려 반대로 생각한다. 매끈한 시트러스 향 덕분에 언더락으로 마셔도 무리 없을 진이 되었거든.
SNS에 시집을 찍어 올리니 친한 후배에게 바로 메시지가 왔다. “황인찬ㅜㅜㅜ 사랑시 천재ㅜㅜ시집 너무 좋죠ㅜㅜ” 맞다. 감각을 생생하게 끌어올리는 그의 시도 좋지만, 사실 사랑을 이야기하는 그의 문장들이 너무 좋지. 독백하듯, 쓸쓸하고도 의연하게. ‘사랑시 천재’라는 말에 조금이라도 궁금증이 인다면 시집을 직접 찾아보시라 꼭(!) 얘기하고 싶다.
“그때 우리는 사람으로 가득한 여름의 도시를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의 젖은 발이 뜨거운 지면에 남긴 발자국이 금세 사라져버리는 것도 모르는 채로
겨울 호수를 따라 맨발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_ 사랑과 자비 中
일상성을 잃게 된 요즘 같은 시절에는, 지겹게 반복되는 계절의 흐름 속에 누렸던 평범함이 조금 그립기도 하다. 하지만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이 시간은 가리라. 그리고 또 모든 게 도돌이표처럼 느껴지는 날이 올 것이다. 그것은 행복일까, 불행일까. 아마 행복이기도 불행이기도 하겠지. 삶이란 언제나 그런 식이니까 말이다.
“제비들이 창턱에 앉아 뭐라 떠들고 있다
그것이 여름이다
장미가 피는 것을 보며 여름을 알고
무궁화가 피는 것을 보며 여름인 줄을 알고
벌써 여름이구나
그렇게 말하는 순간 지난 여름에도 똑같은 말과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알아차리는 순간 이 알아차림을 평생 반복해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_ 아카이브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