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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디트 Sep 02. 2020

쌉싸름하고 달콤해, 르 떵 데 헤브

안녕. 나는 글 쓰고 향 만드는 사람, 객원필자 전아론이다. 요즘 나는 9월에 나올 다음 에세이 책 작업과 가을을 위한 다음 향수 작업을 동시에 하고 있다. 조향을 하다 보면 장미나 자몽처럼 친숙한 향들도 많이 만나지만, 낯선 향도 많이 접하게 된다. 일전에 리뷰를 썼던 베르가못 향수만 해도 그렇다(지난 콘텐츠는 여기!). 대부분의 한국 사람은 베르가못 생과를 접해볼 일이 없으니까….


꽃향기도 마찬가지다. 장미처럼 흔한 꽃도 있지만, 살면서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꽃의 향료도 많다. 은방울꽃(흔히 뮤게라고 한다)은 조향을 시작하고 나서야 꽃시장에서 운 좋게 만나 실제 향을 맡아볼 수 있었다. 헬리오트로프라는 꽃도 얼마 전 지방의 한 식물원에 갔다가 처음 만나봤다. 진짜로 꽃에서 바닐라와 초콜릿 느낌의 향기가 나다니…. 너무 좋아서 삼십 분 동안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르떵데헤브

그런 의미에서 내게 ‘죽기 전에 꼭 실제 향을 맡아보고 싶은 대상’을 묻는다면 바로 오늘 이야기할 향수 Le Temps des Reves(르 떵 데 헤브)의 메인 노트인 비터 오렌지 나무의 꽃을 뽑을 것 같다. 비터 오렌지 나무의 꽃을 수증기 증류 방식으로 오일을 만들면 네롤리, 앱솔루트 방식으로 향료를 만들면 오렌지 블라썸이라고 부른다.


하나의 꽃인데 향을 뽑아내는 방식에 따라 이름이 다른 것이 신기하다고? 이게 끝이 아니다. 비터 오렌지 나뭇잎으로는 페티그레인이라는 향료를 만들고, 과일로는 비터 오렌지 오일을 만든다. 정말이지 버릴 곳이 하나도 없는 향기로운 대상인 것이다! 다만 이 나무를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만나볼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픈 사실인데…. 괜찮다. 향수로 만나면 되니까.

세상에는 다양한 네롤리 향수가 있지만, 구딸파리의 르 떵 데 헤브는 네롤리를 처음 접하는 사람도 그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 장점이다. 첫 향에서는 쌉싸름한 그린 노트가 풍성하게 퍼진다. 고급스러운 시트러스인 베르가못과 비터 오렌지 나뭇잎인 페티그레인의 향이 조화롭게 섞여 있기 때문이다. 얼핏 느껴지는 스파이시함은 푸르른 탑노트의 인상을 좀 더 신선하고 싱그럽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곧바로 희고 달콤한 오렌지 블로썸의 향기가 피어나기 시작한다. 꽃잎이 서서히 펼쳐지는 것처럼 우아하고 부드러운 향이 내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느낌이 아주 인상적이다. 흰 꽃의 농후함은 유지하면서도, 앞선 그린 노트의 향이 이어지기 때문에 답답하거나 무거운 느낌 없이 화사하게 느껴진다.

복잡미묘한 향의 전개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언제 써도 좋을 법한 향수로 만들어준다. 샌달우드와 화이트 머스크로 은은하게 남는 잔향 또한 편안하고 향기롭다. 르 떵 데 헤브의 향을 맡을 때마다, 향수의 본고장인 그라스에서 조향사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됐다는 아닉구딸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오렌지 블라썸, 그 꽃이 가득한 그라스에서 향을 만들고 있을 그녀의 모습을.

사실 아닉구딸에 대해서 오랫동안 오해해왔다. 조향사가 되기 전, 피아니스트와 패션모델을 거쳤다는 이유만으로 부유한 집안에서 곱게 자란 이미지를 멋대로 상상해버렸달까. 알고 보니 실제 그녀의 삶은 훨씬 강렬했다. 열여섯에 유명 피아노 콩쿠르에서 1등을 하며 피아니스트로서 성공적인 시작을 한 것은 맞지만, 열여덟에 피아노를 그만두기로 하고 런던으로 떠났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삶도 쉽지 않아서, 런던의 가정에 입주하여 간단한 집안일을 해주는 대신 영어를 배우고 숙식을 해결했다고 한다.

그랬던 그녀가 운명처럼 유명 포토그래퍼와 친구가 되며, 패션 모델로 활동을 시작했다. 사진을 몇 장 찾아봤는데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미인이었다. 하지만 화려한 삶은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화가이자 앤티크 딜러였던 남편과 결혼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이혼하고, 야심차게 오픈했던 자신의 앤티크 매장도 문을 닫게 됐다. 게다가 불행은 혼자 오는 것이 아니라, 아닉구딸은 이혼 후 자신이 유방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갓 태어난 딸 까밀과 거의 파산에 이른 경제 상황뿐이었다.

얼마나 절망적이었을까. 그녀의 괴로움은 감히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컸으리라. 그런데도 그녀는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우연히 찾아가게 된 프랑스 향수의 도시, 그라스에서.

조향은 수없이 실패를 거듭해서 하나의 완성을 이뤄내는 일이다. 나 또한 그것을 종종 자조적으로 이야기하고, 가끔은 반복되는 실패가 괴롭기도 하다. 하지만 뒤집어보면 그것은 실패를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이 되어주기도 한다. 이 모든 실패가 모여 마지막엔 하나의 완성작이 된다는 조향의 본질은, 인생의 여러 힘든 순간을 마주할 때 힘이 되어준다. 실패가 실패로 끝나지 않는 게 조향이다. 어쩌면 아닉구딸 또한 그 부분에서 새 삶을 살아갈 큰 힘을 얻지 않았을까.

그녀는 세상을 떠난 지 오래이지만, 향수와 브랜드는 지금도 살아남아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향기와 좋은 기분을 전해준다. 동양의 한 여자인 나에게 그라스를,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비터 오렌지 나무와 네롤리를 꿈꾸게 한다. 향기가 하는 일은 이토록 대단하다. 오래 이어진 코로나19와 사회적 거리두기 생활 때문에 우울감과 무기력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르 떵 데 헤브를 권하고 싶다. 쌉쌀하면서도 달콤한 이 향기가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주는 신선한 환기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이 글은 아모레퍼시픽의 유료 광고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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