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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디트 Aug 25. 2020

헛똑똑이가 되지 않으려면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게 된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퍼블리를 위해 남이 쓴 글을 읽고, 주말엔 디에디트를 위해 내가 읽은 것에 대해 쓰고 있다.


이번 달에는 꿈과 현실, 재능과 노력을 함께 이야기하는 책 다섯 권을 골랐다. 책을 읽고 나면 새삼 밸런스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허황된 꿈만 꾸는, 현실에 치이는, 재능의 한계에 부닥친, 노력하다 지친 사람이라면 이 중 맘에 드는 책 한 권을 골라 읽어보시라.


[1]
<관찰과 표현의 과학사>

“딱딱한 제목보다 천문학자들의 열정과 훨씬 더 잘 어울리는 부제: 하늘을 그리다”

21세기의 산업 키워드가 인터넷이라면 16세기는 바다였다. 잘나가는 유럽 국가 사이에서 해상 무역과 식민지 개척이 유행처럼 번졌고, 그에 따라 항해술이 중요해졌다. GPS가 없던 시절 항해술의 핵심은 지나온 길과 나아갈 길을 찾는 것, 그리고 현 위치를 정확히 아는 것이었다. 어떻게? 태양, 별, 달의 위치와 모양을 GPS 삼아. 그것들을 GPS로 활용하려면 멀리서 작은 점으로 반짝이는 별과 달을 정확히 관측해야 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 했던가. 하늘을 볼 수 있을 만큼 성능 좋은 망원경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책은 1609년에 그려진 두 개의 그림으로 시작한다. 토머스 해리엇과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각자 망원경으로 달을 관측하고 그림으로 기록했다. 그런데 똑같은 대상을 그린 것치고는 두 그림이 너무 다르다. 둥글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왜 그럴까?


첫 번째 이유는 ‘관찰의 차이’다. 갈릴레이의 20배율 망원경에 비해 해리엇의 6배율 망원경은 성능이 떨어졌다. 두 번째 이유는 ‘표현의 차이’다. 그림 실력이 뛰어났던 갈릴레이에 비해 해리엇은 눈앞의 사물을 그림으로 옮기는 훈련을 받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림 실력이 비슷한 두 사람이 똑같은 망원경을 사용했다면 똑같은 그림을 그렸을까? 답은 No. 관찰과 표현 모두에 영향을 미치는 세 번째 이유가 있다. 정보의 차이.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정확히 그릴 수 있다. 화가나 만화가들이 괜히 인체 해부학을 공부하는 게 아니다. 갈릴레이는 해리엇보다 달과 우주의 운동원리에 대해 좀 더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고, 이는 그림의 차이로 나타났다.


물론 아는 것이 관찰과 표현을 방해할 수도 있다. 책에는 자기가 아는 것에 대한 확신이 지나쳐서 정확한 관찰과 표현에 실패한 사례도 등장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기 쉽다.


<관찰과 표현의 과학사> 김명호 | 이데아 | 18,000원


[2]
<JOBS: 소설가>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을 어느 순간 연민하게 되죠.
그건 소설 말고 다른 분야가 해내지 못하는 일 같아요.”

소설가는 쓰는(표현하는) 직업이고, 쓰기 위해서는 역시 관찰이 필요하다. 나의 과거를 파고들면 자전적인 이야기가 나올 것이고, 취재 및 자료 조사를 통해 경험해보지 못한 이야기를 쓸 수도 있다. 뭘 쓰든 상상력은 필수다. 똑같이 정확하게 그리는 게 중요했던 17세기 천문학자들과 달리 소설가들은 같은 걸 보고도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과학자의 목표가 ‘정답(또는 오답)임을 증명하기’라면 소설가의 목표는 새로운 답을 제안하기에 가깝다.


<JOBS: 소설가>는 매거진B가 발행하는 단행본 시리즈 중 네 번째 책이다. 그동안 자신만의 철학을 가진 브랜드를 소개해온 매거진B 편집부는 다양한 직업을 가진 여러 사람들에 의해 브랜드가 만들어진다는 걸 깨달았다. <JOBS>가 에디터, 셰프, 건축가, 그리고 소설가의 직업의식에 주목한 이유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쓴 요나스 요나손은 말한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는 끊임없이 고통받으며 살아야 하겠죠. 소설가에겐 작품에서나마 그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정세랑은 읽는 사람의 역할에 주목한다. “소설은 그 자체로 끝나는 폐쇄적인 세계가 아니라 독자가 같이 읽어주기 때문에 자꾸 바깥으로 번져요.” 둘의 말만 봤을 때 소설가는 읽는 사람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직업이다.


한편 소설 쓰기의 의미를 ‘나’에서 찾는 이들도 있다. 마르크 레비에게 글쓰기는 “어린 시절을 간직하게 해줄 인생의 파트너를 찾는 일”이다. 정지돈은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제가 좋아하는 방향의 글을 열심히 쓰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 여긴다. 책 후반부에 등장하는 가와카미 미에코의 말은 소설에 대한 거리감을 확 좁힌다. ‘나도 한 번 써볼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누군가가 마음 가는 대로 적은 글을 다른 누군가가 마음 가는 대로 읽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매거진B 편집부 | 매거진B | 19,000원


[3]
<일꾼의 말>

“학교에서 ‘일 잘하는 법’을 배울 수 없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돼”

<JOBS>는 이제 겨우 네 개의 직업을 다뤘을 뿐이다. 국내에만 최소 12,000개 이상의 직업이 존재한다. 사실 셰프나 소설가 같은 특정 직업 몇 개 빼고는 대부분 직장인으로 뭉뚱그려진다. 보통 이 직장인들은 무슨 일 하시냐는 물음에도 ‘그냥 직장 다녀요’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다. 인사팀도, 마케팅팀도, 기획팀도, 운영팀도, 홍보팀도. 무슨 일을 하든 간에, ‘직장에 소속되어 (돈을 벌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절실하고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은 <직장인의 말>이 아니라 <일꾼의 말>이다. 직장인과 일꾼은 뭐가 다르기에? 간단하다. 직장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직장, 일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일. 직장생활을 하지 않는 프리랜서 일꾼은 말할 것도 없고, 직장에 속해 있는 사람이라도 직장보다 일을 더 중시한다면 그는 스스로를 ‘직장인’이 아니라 ‘일꾼’으로 여길 것이다.


일꾼 40명의 짤막한 에피소드를 담은 이 책의 주제는 무슨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일하느냐다. 40명은 경력도 분야도 스타일도 다르지만 각자 일꾼으로서의 철학을 가진 사람들이다. 일꾼의 말 속에 담긴 철학이란,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일잘러가 따로 있고, 일못러가 따로 있어? 어떤 일을 하느냐에 따라 똑같은 사람도 일잘러가 되었다가, 어느 순간에는 일못러로 비춰지지. 그 사람의 능력 문제가 아니라 어쩌면 처한 상황의 문제일 수도 있는 건데 말이야.”


나의 직장 퍼블리는 ‘일꾼들을 위한 플랫폼’이다. 어떤 콘텐츠를 만들어야 ‘일꾼 고객’들에게 도움이 될지 고민하면서도, 동시에 한 명의 일꾼으로서 나의 일을 고민한다. 나는 괜찮은 일꾼인가?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던데. 고민이 좌절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는 함께 고민하는 퍼블리의 일꾼41, 일꾼42… 덕분이다. 그래, 자기 머리 좀 못 깎으면 어때? 서로 서로 깎아주면 되지. 책 속 일꾼16은 이렇게 말한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너의 손을 필요로 한다는 건 엄청난 힘이야.”


<일꾼의 말> 강지연, 이지현 | 시공사 | 13,000원


[4]
<생애최초주택구입 표류기>

“집 없는 독자로서 저자의 ‘주택구입’이 배아플 법도 한데, 도리어 응원하게 된다.”

일꾼들은 집 사기 어려운 세상, 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집값이 치솟고 있다. 내년 2월 지금 사는 곳의 계약이 끝나 이사를 해야 하는 나는 뉴스를 볼 때마다 불안에 휩싸인다. 결국은 아예 부동산 관련 뉴스를 외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번엔 무사히 이사할 수 있을까?


지방 출신에게 이사는 귀찮고 궁색한 일이다. 2005년 대학 입학할 때 서울로 올라온 후, 지금 살고 있는 성북구 투룸에 오기까지 이사를 열 네 번 했다. 뭐가 뭔지도 몰랐던 학교 기숙사, 기숙사 룸메이트와 함께 구했던 낡은 투룸, 누우면 발이 닿는 원룸, 한 달만에 끝난 친척 집에 얹혀 살기, 급하게 구해 비가 새던 옥탑방, 반찬이 늘 똑같았던 하숙집…. 아, 디에디트처럼 힙하고 세련된 매체에서 이렇게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았는데.


그래서 이 책이 놀라웠다. 사실 저자의 서울살이 자체는 열 네 번의 이사 못지않게 귀찮고 궁색하다. 살(buy) 집이 아니라 살(live) 집을 마련하는 과정이 원래 그렇다. 내가 가진 돈을 헤아려보고, 몇 개의 조건을 포기하고, 다시 헤아려보고, 읍소를 해보지만 여의치 않아 몇 개의 조건을 또 포기하고. 심지어 저자는 혼자가 아니라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기에 더 많은 것을 헤아리고 포기해야 했다. 그럼에도 이 책의 문장들은 구질구질하지 않았다. 매물을 둘러보고 하나하나 따져보는 대목은 실용적이고, 집주인과 매매가격을 협상하는 대목은 긴장감 넘치고, 어렵게 얻은 나만의 방에서 여자친구와 밥을 해먹는 대목은 달달하다. 꾸준히 다양한 매체에서 글을 써온 경험이 빛을 발한 것이리라. 그리고 외부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중심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저자의 태도 또한 좋은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됐을 것이다.


물론 책이 아무리 좋아도 내 고민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나 역시 저자처럼 휘둘리지 않고 차분히 새 집을 구해야 할 텐데. 내가 자기 중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부동산 시장이 하루속히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기를 바라는 수밖에.  

<생애최초주택구입 표류기> 강병진 | 북라이프 | 14,000원


[5]
<당신과 나의 안전거리>

“(운전 + 소설) x 에세이 = 면허학원 등록”

주택 구입이 빠를까, 면허 취득이 빠를까. 나는 차에 딱히 관심이 없다. 아니, 차가 무섭다. 택시보다 지하철을 선호하고, 어쩌다 승용차 조수석에 앉으면 초긴장 상태가 된다. 서너 달에 한 번씩, 차를 운전하다 어딘가에 부딪치는 꿈을 꾼다. 당연하게도 아직 면허가 없고, 딸 생각도 없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시금치를 싫어하는 아이들도, 시금치를 잘게 다져 리조또로 만들어주면 맛있게 잘 먹는다고 한다. 그렇게 몇 번 맛을 들여 놓으면 그냥 시금치에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내게 이 책은 시금치리조또다. 본인의 운전 경험을 잘게 다져 읽는 맛이 있는 에세이 29편으로 완성했다.


에세이의 감칠맛을 내는 건 저자가 재밌게 읽었던 소설들이다. 저자는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이나 선택들을 운전자의 입장에서 재해석한다. 예를 들면,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는 것이 힘들었던 소녀의 이야기를 도로 위 안전거리에 빗대어 얘기하는 식이다. 레이먼드 챈들러, 찰스 부코스키 등 유명 해외작가의 대표작을 다수 번역한 저자의 이력을 알고 있던 터라, 그가 언급한 소설 리스트에 더욱 믿음이 갔다. <스토너>, <깡패단의 방문> 등 평소 읽고 싶었던 소설 얘기가 나올 때면 집중력이 더 높아졌다. 그렇게 책 한 권을 다 읽다 보니 ‘면허를 따긴 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전이 두려운 이유는 평소 성향과 관련이 있다. 통제할 수 없는 변수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나에게, 도로는 변수 덩어리다. 앞차, 옆차, 뒷차와의 안전거리를 스스로 결정할 수가 없다. 이쪽에서 아무리 거리를 두려고 해도 그쪽에서 더 빠른 속도로 다가오면 피할 도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변수가 도로에만 있나? 어차피 100% 통제할 수 있는 일은 어디에도 없다. 결과를 알려면 우선 믿고 뛰어들어봐야 하듯, 운전 역시 믿고 도로 위로 나가봐야 하는 것 아닐까. 이 책을 계기로 면허 딸 생각이 들었던 것처럼, 인생은 원래 알 수 없는 것이니.  


<당신과 나의 안전거리> 박현주 | 은행나무 |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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