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환절기의 말 많고 고독한 평론가 차우진이야. 온 세상이 꽉 막힌 것 같은 상황에서도 스윽하고 계절이 바뀌는 게, 심지어 날씨가 너무 아름다운 걸 보면 경이롭다는 생각마저 들어. 요즘 같은 날씨에는 어디 좀 멀리 가고 싶기도 하지만 다들 상황이 쉽지 않을 거야. 그래서 괜히 퇴근길에 한두 정거장 미리 내려서 집까지 걸어보거나, 잠시 짬을 내어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거나, 그러는 동안 고양이 한둘도 마주치고 ‘뜨아’도 홀짝거리고 사람들의 바뀐 옷차림도 스캔하고 그러잖아. 그래서 분위기 좀 내보라는 의미에서 일용할 음악을 좀 소개할까 해. 살짝 알려주자면, 내가 요즘 특히 아끼는 곡들을 모았어. 이 음악들이 여러분에게 약간의 위안이라도 되면 좋겠어.
가을만 되면 꺼내는 에바 캐시디는 1996년, 흑색종 암으로 33세의 나이에 요절한 가수야. 생전에는 주목을 못 받았지만 사후에 그의 노래가 BBC 라디오에 나오며 화제가 되었어. 그 노래들을 모아 만든 컴필레이션 <Songbird>는 천만 장 이상이 팔리기도 했지. 에바 캐시디는 미술을 전공했거든. 위키피디아에 에바 캐시디 문서도 없었던 2002년 무렵, 그의 가족들이 만든 기념 홈페이지를 찾아서 이미지 로딩 시간을 기다리며 그의 그림을 감상하던 어느 새벽도 떠오르네. 이 노래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의 라이브고, 음원은 <Live at Blues Alley>라는 제목의 앨범에 수록되어 있어.
상징적인 재즈 레이블인 ECM의 카탈로그는 매우 하드한 것부터 소프트한 것까지 폭이 넓은데, 나는 주로 무난한(?) 솔로 연주를 좋아해. 기타나 피아노 같은 악기의 숨은 잠재성을 끌어내기보다는 그 악기의 고유한 특성에 집중하는 앨범들. 그 중 벤자민 무세이의 <PROMONTOIRE>는 ECM에서 가장 최근에 발매한 피아노 솔로 앨범으로, 섬세하고 아름다운 선율로 가득해. 스트라스부르 국립고등음악원 출신으로 파리국립고등음악원 재즈피아노콩쿠르와 파리-라데펜스 국립재즈콩쿠르에서 상을 받은 연주자야. 루이 스클라비스, 스티브 스왈로우, 나윤선 등과도 협연했는데 이 앨범이 ECM에서 발매한 첫 음반.
싱어송라이터 브라이언 페넬의 솔로 프로젝트. SYML이란 이름은 2019년부터 사용했는데, 웨일스어로 ‘simple’이란 뜻이래. 어릴 때 입양되었는데 나중에 친부모를 찾아보니 웨일스 사람이어서 자신의 뿌리를 찾는다는 의미로 쓰기 시작한 이름. 누구나 자신의 근원이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하겠지. 사랑에 빠진 감정을 물에 대한 공포에 비유한 가사와 사방이 벽으로 막힌 공간과 사방이 뻥 뚫린 대자연에서 각각의 무용수들이 추는 춤이 매우 인상적이야.
팀 베틴슨이라는 호주의 싱어송라이터의 프로젝트야. 2013년부터 앵거스 앤 줄리아 스톤, 네이키드 앤 페이머스, 런던 그래머, 도터 등의 투어 파트너로도 활동했는데 특히(내가 가장 좋아하는 밴드인) 도터의 2016년 미국/캐나다 투어를 함께 했지. 곡 제목인 ‘아야와아스카’는 아마존 원주민들이 주술이나 치료에 사용하는 환각 식물의 이름인데, 참고로 호주에서는 합법이고 캐나다에서는 불법이래. 이 환각제는 의학, 민속학, 종교와 법률에다가 심지어 관광상품까지 여러 문제들이 좀 복잡하게 얽힌 케이스야.
요즘 높은 인기를 얻고 있는 싱어송라이터로, 아빠가 무려 J.J.에이브람스야. 맞아, <로스트>와 <클로버필드>의 떡밥 제왕이자 <미션 임파서블 3>, <스타 트렉: 더 비기닝> <스타트렉: 다크니스>,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를 찍은 바로 그 심폐소생기. 개성적인 음색이 매력적인 노래를 만드는데, 데뷔하기 전에는 유튜브에 브이로그 올리듯이 음악을 발표했어. 그 초기작들도 좋으니 찾아봐. 참고로 99년생.
요즘 날씨에 무척 잘 어울리는 이병우의 연주곡. 솔로 2집인 <혼자 갖는 茶 시간을 위하여>의 수록곡인데, 언제 들어도 좋은 앨범이야. 그나저나 요즘 초등학교 운동장에도 태극기가 펄럭이는지…? 라떼는 오후 4시 쯤의 학교 운동장에 혼자 남아 태극기를 보면서 멍 때리곤 했거든. 응? 따였냐고? 아니면 어릴 때부터 아싸? …그게 뭐 내 잘못이겠니? 그들이 나빴던 거지. 그냥 혼자 있는 게 좋았어(훗).
올해 6월에 발매된 곡으로, 유이세라는 싱어송라이터가 작사, 작곡, 노래, 연주를 모두 혼자 했어. 거의 정보가 없다고 해도 좋은데, 다른 곡들도 궁금해지더라고. 관조적인 태도와 독백 같은 가사, 약간의 우울이 적절한 비율로 섞인 곡이라고 생각해.
2005년, 인기 미드 <원 트리 힐>에 삽입되면서 엄청 유명해진 노래야. 이들은 1999년에 데뷔해서 2012년까지 활동하다가 해체했어. 하지만 최근, 그러니까 2020년 4월에 “Winterstorms”라는 신곡을 발표하면서 다시 활동을 시작했길래 오랜만에 찾아 본 노래. 몽롱하고 매가리 없는 이 분위기가 여전히 좋은 걸 보니 내 인생 도대체 어쩔…
2000년에 데뷔한 밴드로, 현재는 라이언 오닐의 솔로 프로젝트로 남아 있어. 피아노를 배경으로 현악 사운드가 몇 겹으로 중첩되면서 스펙트럼처럼 펼쳐지는 소리의 풍경이 장관이야. 지나치게 감상적인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거대하게 느껴지는 스케일이 영적인 분위기도 만들지. 그래서인지 <그레이 아나토미>, <트와일라잇 사가: 브레이킹 던>, <뱀파이어 다이어리> 같은 드라마에 소개된 적도 많아.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뭐 이런 중2병 같은 생각을 전혀 부끄럽지 않게 해주는 브금이야.
쁘띠 비스킷은 프랑스의 99년생 디제이 메흐디 벤젤로운의 솔로 프로젝트야. 쁘띠 비스킷이라니. 예쁘기만 하고 맛은 없을 것 같은 인상이지만, 사실 이 이름은 할머니가 비스킷을 구워주면서 자기를 부르던 애칭이었대. (귀여워… +_+) 2018년 코첼라 무대에 초청된 걸 기점으로 세계 곳곳에서 공연을 펼치려고 했지만… 코로나 때문에 스포티파이와 유튜브 중심으로 활동 중이야. 젊은이답게 사운드 곳곳에 건강한 활기가 넘치네.
삼화고속 알아? 버스 파업과 경영문제로 악명이 높았던 회사지만, 라떼는 서울에서 인천으로, 인천에서 안산으로 타고 다니던 버스였어. 지금은 빨간색 1500번 광역버스로 제일 유명할지도… 아직도 나는 밤 11시 무렵 삼화고속 창 밖으로 보이던 캄캄한 소도시 풍경이 선명해. 20대의 나는 장래의 내가 어디서 뭘할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삼화고속 말고 2호선 전철 타는 삶을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올댓의 이치원(변상원)과 리듬파워의 보이비가 함께 부른 곡인데 구월동이라니, 낯익은 이름이 나와서 반가웠지 뭐야.
기타리스트 양진한의 싱글. 9월 17일에 발표된 곡이야. “물고기는 홀로 헤엄쳐 나아갈 결심을 했다”는 소개글처럼 미래, 자립, 기대, 설렘, 두려움 같은 감정들이 얽혀 있어. 나이가 많든 적든, 경력과 경험이 많든 적든 우리 모두 사실은 매 순간 설레고 두렵고 용감하고 비겁하고,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을까? 다 듣고 나면 약간 위로 받은 기분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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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절기는 보통 매우 직관적인 상징으로 쓰이지만, 이 전환의 감각은 늘 새로운 것 같아. 여기에서 저기로 점프하는 기분이 되니까. 이 계절에 누군가는 풍선처럼 부풀어 오를지도, 혹은 또 누구는 어쩔 줄 모른 채 길가에 서 있을지도 모르지만, 대체로 거기가 어디든 여러분이 발 딛는 곳에서 부디 뭔가를 찾길 바라. 가을이야, 조금만 천천히 걸어도 꽤 좋은 계절.
� P.S. 매주 수요일 밤에 ‘밤레터’라는 제목의 이메일 텍스트 라디오를 보내고 있는데, 유튜브 채널에 그동안 [디에디트]에서 소개한 플레이리스트도 모아뒀으니 뭐 궁금하면 한 번 보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