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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디트 Oct 06. 2020

나는 글로 OO을 배웁니다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게 된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퍼블리를 위해 남이 쓴 글을 읽고, 주말엔 디에디트를 위해 내가 읽은 것에 대해 쓰고 있다.


이번 달에 고른 책들은 가르침(혹은 배움)이라는 키워드로 연결되어 있다. ‘책으로 OO을 배웠어요’라는 문장이 우스갯소리가 된 세상이지만, 난 여전히 뭔가를(누군가를) 알아갈 때 책을 길잡이 삼는다. 시작은 반이고, 책은 늘 믿을 만한 시작이다.


[1]

<빌 캠벨, 실리콘밸리의 위대한 코치>


“멘토는 지혜를 전수해주지만 코치는 자신의 소매를 걷어붙이고 손에 직접 흙을 묻힌다.”

가수 윤상에게는 ‘뮤지션들의 뮤지션’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강수지의 ‘보라빛 향기’와 러블리즈의 ‘Ah-Choo’는 각각 1990년과 2015년에 발표된 노래다. 가요 팬들뿐 아니라 뮤지션들도 세대 구분 없이 그의 음악을 좋아한다. 아니, 좋아할 뿐 아니라 음악 활동의 길잡이로 삼는다. 그러려면 우선 음악을 잘해야겠고, 음악을 대하는 태도 또한 훌륭해야겠다. 이 정도는 되어야 ‘뮤지션들의 뮤지션’ 자격이 있다.


이 책의 주인공 빌 캠벨은 ‘리더들의 리더’다. 구글, 애플, 아마존, 트위터, 페이스북 등 실리콘밸리의 리더들은 소속과 관계없이 그를 좋아한다. 아니, 좋아할 뿐 아니라 리더십의 길잡이로 삼는다. 실리콘밸리는 물론 풋볼팀 코치, 컬럼비아 대학교 총장, 심지어 미국 부통령 앨 고어까지 빌 캠벨의 코치를 받았다. 이름값만으로도 ‘리더들의 리더’ 자격은 충분해 보인다. 근데, 그는 왜 리더가 아니라 코치로 불릴까?


리더의 첫 번째 관심사는 성과다. 성과를 내기 위한 팀을 짜고, 경우에 따라서는 성과를 위해 팀을 희생시킬 수도 있다. 코치의 첫 번째 관심사는 팀이다. 팀원들을 제대로 코치하여 좋은 팀을 만들면 성과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그래서인지 여느 실리콘밸리 리더십 책과 달리 이 책에서는 숫자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빌 캠벨의 업적은 매출, 기업가치 등이 아니다. 그의 코치를 받고 리더들이 조직한 팀, 그리고 팀원들이 리더에게 갖게 된 신뢰, 이런 것들이야말로 코치 빌 캠벨의 성과다.


스티브 잡스, 래리 페이지, 제프 베조스 등 그의 코치를 받은 리더들에 비하면 빌 캠벨의 명성은 보잘것없어 보일 정도다. 그러나 빌 캠벨의 기준대로라면 그는 이들을 훌쩍 뛰어넘을 만큼의 성공을 거뒀다. “나와 함께 일한 사람들이나 내가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을 준 사람 중에서 훌륭한 리더로 성장한 사람이 몇 명인지를 세어봐.”

  

<빌 캠벨, 실리콘밸리의 위대한 코치> 에릭 슈미트 등 | 김영사 | 17,800원


[2]
<짧게 잘 쓰는 법>


“명백히 작위적인 언어의 조종이야말로 여러분의 진정성을 납득시키는 도구입니다.”

분명 쓰기 전엔 뭘 써야 하나 막막했는데, 막상 쓰다 보면 문장이 술술 저절로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글을 쓰고는, 착각에 빠진다. ‘나한테 재능이 있나? 오늘 드디어 그분이 오신 건가?’ 아니다. 관성 때문이다.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전거처럼 통제 불가능한 상태로 완성된 글은 결코 ‘잘 쓴 글’이 될 수 없다. 기껏해야 ‘빠르게 쓴 글’ 정도일 뿐이다.


<짧게 잘 쓰는 법> 저자인 벌린 클링켄보그의 표현은 좀 더 직설적이다. “저절로 나오는 문장은 여러분이 받은 교육의 잔재입니다. 어른을 모방하고 싶은 욕망, 놀랍도록 구조적으로 엉성하고 시시한 문장으로 채워진 주위의 흔해빠진 글들의 유산입니다.”


혼란스러운가? 그럴 수 있다. 여러 글쓰기 책에서 “짧게 써라” 다음으로 자주 나오는 조언이 “일단 막 써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글쓰기 울렁증을 가진 사람들에게 일단 막 쓰라는 조언은 분명 효과적이다. 혹시 당신이 잘 써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글 한 편 완성하기도 어려운 사람이라면, 이 책은 권하지 않는다. ‘일단 막 쓰는 법’, 일단 막 써서 ‘글 한 편을 완성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책도 많으니 서점을 둘러보시기를.


하지만 이 책은 그냥 ‘짧게 쓰는 법’도 아니고 <짧게 잘 쓰는 법>이다. 교과서로 따지면 ‘수학의 정석 심화 편’ 내지는 ‘성문종합영어’다. 3번으로 다 찍고 엎어져 자던 학생을 어르고 달래 80점 이상 받게 해주는 게 시중의 글쓰기 책들이라면, 이 책의 저자는 100점을 목표로 90점 받던 사람을 다그친다. 스스로 글 좀 쓴다 자신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짧게 쓰는 법> 벌린 클링켄보그 | 교유서가 | 15,000원


[3]
<공부란 무엇인가>


“명료한 문장을 쓰는 사람은 농담 또한 엄한 데로 흐르지 않고 타깃을 정확하게 공략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신문 대신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는 요즘 세상에, 칼럼으로 스타가 되기란 실버버튼 따기보다 어렵다. 그 어려운 걸 해낸 사람이 있다. 2년 전 ‘추석이란 무엇인가’로 명절 잔소리 대처의 새 패러다임을 연 김영민 교수다. 그의 글은 여전히 그 빛을 잃지 않았으니, 평온한 추석 연휴를 위해 꼭 한 번씩 읽어보시기를.


<공부란 무엇인가>는 이후 김 교수가 낸 여러 권의 책 중 세 번째다. 그의 ‘짧게 잘 쓴’ 글을 좋아하는데, 이번 책도 기대에 부응한다. 정확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엉뚱하면서도 날카롭다. 칼럼 모음집이라 그런지 글 한 편의 분량도 길지 않아 출퇴근길에 읽기 딱 좋았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이 책을 읽다가 소리내어 웃어버렸다(80쪽). 책 읽다 현실 웃음이 터지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스마트폰으로 해당 페이지를 찍어 인스타 스토리에 올렸다. 몇 분 만에 회사 동료의 DM을 받았다.


“이거 무슨 책이에요? 제 취향ㅎㅎ” 팔로워 몇 없는 SNS에서의 리액션은 언제나 반갑다.
“<공부란 무엇인가>요! 다 읽고 나서 빌려드릴까요?”
“제목 들으니까 호감도가 짜게 식었는데…ㅋㅋㅋㅋㅋ” 답장을 보고 갈아탄 버스에서 한 번 더 소리내어 웃었다.


이게 바로 ‘공부’의 현실이다. 김 교수는 묻는다. 공부란 무엇인가? 이젠 답할 수 있다. 생겼던 호감마저 짜게 식어버리게 하는 마법의 단어, 그게 바로 ‘공부’라고요! 맨 앞장에 저자의 친필로 추정되는 문구가 적혀 있다. “배우는 사람은 자포자기하지 않는다.” 처음엔 멋진 문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따져 묻고 싶다. 자포자기하게 만든 건 누굴까요? 언제부터 우리는 짜게 식었을까요?


<공부란 무엇인가> 김영민 | 어크로스 | 16,000원


[4]
<여명기>


“이 모든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될 거대한 서사의 프롤로그다.”

친구와 영화를 보던 만화가 앨리슨 벡델은 새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영화의 주인공은 항상 남자지? 영화 속 여자들은 왜 항상 주인공의 애인이거나, 애인이 되고 싶어 하거나, 헤어진 애인이거나, 혹은 아무 말 없이 웃고만 있을까?’ 그는 세 개의 조건을 걸고, 이 조건을 통과하지 않는 영화는 ‘남성 중심적인 영화’로 분류하자고 제안한다. 바로 이 ‘벡델 테스트’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1)이름을 가진 여자가 둘 이상 등장하고, 2)그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며, 3)대화 소재가 남자(연애)가 아니라면 통과!


당장 최근에 본 영화를 떠올려보라. 놀랍게도 이 간단한 조건을 통과하는 영화가 몇 개 없다. 그저께 유튜브로 본 히치콕의 1946년작 <오명>도, 어제 극장에서 본 놀란의 2020년작 <테넷>도, 올해 한국영화 기대작이었던 <반도>,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살아있다>, <사냥의 시간>까지…


단편 만화 모음집 <여명기>가 ‘로맨스 없는 여성 서사’라는 컨셉으로 기획된 건 그래서다. 이 책에 실린 12개의 이야기 속에 남자 주인공이 구해주기만을 기다리는 비련의 여주인공, 주인공 발목을 잡는 ‘민폐녀’, 스토리 흐름과 무관하게 튀어나오는 속옷 노출 한 컷 같은 건 없다. 대신 동료의 입 냄새를 대신 걱정해주는 직장인,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참전 여성, 지구 멸망 후 다른 여성과 연대하여 생존을 모색하는 소녀에 이르기까지 지금껏 본 적 없는 여성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설정부터 새롭고, 또 재밌다. 라미란이 여성 정치인으로 등장하는 영화 <정직한 후보>를 재밌게 봤다면, 이 책 또한 당신의 취향일 확률이 높다.


<여명기> 팀 총명기 | 위즈덤하우스 | 32,000원


[5]
<처음부터 진실되거나 아예 진실되지 않거나>


“정중히 사전 질문지를 보내고, 서너 시간 녹취해서는 이런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없다.”

올봄부터 매달 이 지면에서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하고 있다. 소개글을 쓰는 시간과 책을 고르는 데 드는 시간이 얼추 비슷하다. 그만큼 책 선정이 간단치 않다. 일단 글을 써야 하니 어느 정도는 내 취향이어야 한다. 독자들의 구경하는 재미를 생각하면 장르도 다양해야 하고. 한 출판사의 책을 여러 권 소개하는 건 찜찜하고. 또 이미 너무 유명한 책은 ‘굳이 나까지?’ 싶어 제쳐둔다. 공들여 고른 책 다섯 권을 모아놓고 보면 그것만으로 뿌듯해진다. '다양하게 잘 골랐네.'


제목이 긴 이 책(이하 긴)은 앞서 소개한 <짧게 잘 쓰는 법>(이하 짧)과 여러 가지로 대비된다. ‘짧’은 작법서고, ‘긴’은 인터뷰집이다. ‘짧’은 글 잘 쓰는 기술을 다루고, ‘긴’은 글 잘 쓰는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짧’은 행갈이 하나까지 철저히 통제되어 있고, ‘긴’은 인터뷰 중 끼어드는 돌발상황까지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짧’은 철저히 글이고, ‘긴’은 철저히 말이다.


짧게 잘 쓰인 글이 작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고 했던가. 정돈되지 않고 길게 이어지는 말 또한 작가의 마음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유명 잡지와의 인터뷰가) 제게 큰 의미라고 한다면, 전 하염없이 나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가 되기 때문이에요. 기자가 날 취재하러 오지 않으면 어쩌지? 기자가 날 싫어하면 어쩌지? 다음 작품이 혹평을 받으면 어쩌지? 이렇게 되면 전 어떤 존재가 될까요?”


이래서 텍스트가 지루하고 단조로운 형식이라는 말에 동의 못하겠다. 다음 달에 소개할 다양한 다섯 권을, 나는 이미 고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진실되거나, 아예 진실되지 않거나> 데이비드 립스키 | 엑스북스 | 2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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