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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디트 Oct 07. 2020

혼자서도 잘 먹고 살아요

독립한 지 6개월째 생긴 일

집을 나왔다. 교통사고처럼 갑자기. 여기엔 어떤 핑계도 목적도 없었다. 어떤 생각들은 한번 떠오르면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더 이상은 이 회사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날이나, 너와 헤어져야겠다고 마음 먹은 그날처럼 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독립에는 특별한 이유 같은 건 없다. 집은 회사에서 택시로 20분 거리였고, 엄마 아빠의 간섭이 심한 것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우리 부모님은 어렸을 적부터 내가 어떤 짓을 해도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라며 방관하는 쪽에 가까웠다. 어느날  불현듯 독립을 선언했을 때, 아버지는 섭섭해했고, 엄마는 찬성도 반대도 아닌 애매한 입장을 취했다. ‘그럼 어디 한번 혼자 살아봐’ 쪽에 가까웠다.

이삿짐은 단출했다. 내 몸에 걸칠 것만 빼고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내가 직접 골라 살 생각이었으니까. 마지막 짐을 차에 싣는 내게 엄마는 말했다.

딸, 밥 잘 챙겨 먹고. 배달 음식 너무 많이 먹으면 건강 상해.


엄마는 걱정이 많았다. 워낙 외식을 좋아하는 우리 가족은 배달의민족을 자주 이용하곤 했다. 하지만 독립 3개월 차, 엄마의 걱정처럼 나는 배달의 민족의 ‘귀한 분’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집밥 신봉자가 되어 더 건강히 챙겨 먹으려고 열심히 노력한다.


혼자 살기 시작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릇을 사는 일이었다. 회사 점심시간을 이용해 그릇 가게로 달려갔다. 예쁜 컵이 없으면 물 한잔도 마시지 못할 것 같았다. 혼자 사는 나에게 많은 그릇은 필요하지 않다. 6첩 반상을 차려 먹을 것도 아닌데. 필요보다는 갖고 싶다는 마음으로 산 것들이 더 많다.

그렇다고 뭐 엄청나게 대단한 걸 해서 먹지는 않는다. 요거트는 예쁜 그릇에 담고, 냉동 과일을 그 위에 넣거나 때로는 집 근처에서 산 김밥도 이렇게 예쁜 그릇에 담아내면 근사한 요리가 된다. 예쁜 것들은 날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서툰 손으로 만든 음식을 좋은 그릇에 담으면 한결 더 근사해 보인다. 사진을 찍어 가족 단톡방에 보낸다. 좋은 것을 욕망하는 것이 나쁜 일인가. 좋은 걸 사면, 부지런해진다고 믿는다.

최근엔 김밥에 빠져있다. 김밥이라니 엄청난 요리일 것 같지만, 나는 이제 김밥의 비밀을 안다. 안에 들어가는 게 무엇인지는 크게 상관없다. 중요한 건 김과 단무지 그리고 간장에 조린 우엉이었다. 햇반에 약간의 참기름과 소금을 넣고 비빈 걸 김 위에 올리고 나머지는 모두 선택이다. 셀러리도 넣고 닭가슴살 소시지도 넣고 집에 있는 아무 재료나 넣어도 내가 알고 여러분이 아는 그 김밥의 맛이 난다. 정말이다. 나머지는 조연일 뿐!

좋은 세상이다. 냉동고에 보관했다가, 데워서 먹기만 하면 유명 맛집의 맛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밀키트도 아주 잘 나온다. 이건 김은아 필자도 소개한 적 있었던 연남 소이 밀키트. 모든 것이 다 있는 밀키트를 적당히 끓이기만 하면 근사한 한 끼가 된다. 개당 가격이 7천 원이라 좀 사악하긴 해도, 뚝딱 끓여내면 정말 내가 연남동에 앉아있는 것 같은 맛을 느낄 수 있다.

모든 것이 꼭 소꿉장난 같다. 일찍 일어난 주말엔 빵집에 가서 방금 구운 빵을 산다. 그리고 하나씩 소분해 냉동실에 얼려둔다. 빵이 먹고 싶을 때마다 해동하지 않고 구우면 방금 구운 빵의 풍미가 잘 살아난다. 발뮤다 더 토스터가 있으면 얼마나 더 맛있을까, 생각하며 이것저것 잔뜩 올려 빵을 한입 베어 문다.

혼자 살면서 몇 가지 집착하게 된 게 있다. 제철과일, 맛있는 김치, 싱싱한 채소 같은 것들. 특히 과일은 정말 열심히 챙겨 먹는다. 나는 여름이 좋다. 내가 좋아하는 과일이 많은 계절이니까. 오직 나 한 사람을 위한 에어컨과 선풍기까지 빵빵하게 틀고 콱 깨물어 먹는 여름 과일의 맛이란.

집에 항상 쟁여두는 건 아스파라거스와 닭가슴살 소시지. 닭가슴살 소시지는 짜지 않고 여기저기 활용도가 좋고, 무엇보다 건강식이라는 느낌을 풍길 수 있어서 좋아한다. 제일 속상할 때가 냉장고에 있던 식재료를 버려야 하는 순간이다. 약속이 많고 외식이 많은 날에는 어쩔 수 없이 집안에 채소를 많이 소비하지 못하기 때문에 잘 무르지 않는 것을 위주로 사용한다. 양배추도 아주 좋은 선택이다.

퇴근길에 장을 봐서 냉장고를 두둑이 채워두면 그렇게 마음이 풍족하다. 주말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하는 건 오늘 무엇을 해먹을지 고민하는 일이다. 혼자서 음식을 해먹는 게 이렇게 즐거울 줄이야.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는데, 이상한 기분이다. 혹시 나는 주부가 체질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는다.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 생각하고 직접 만든 음식을 예쁜 그릇에 담에 세팅해서 먹는 게 참 즐겁다. 채소를 썰고, 볶고, 지져서 국적도 정체도 없는 요리를 만들기도 하지만 꼭 소꿉놀이를 하는 것처럼 재미있다.

독립을 하기 전까지는 내 몸에 걸치는 것만 신경 쓰고 살았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몸은 유일하게 내가 모든 것을 컨트롤 할 수 있는 공간이었으니까. 집은 엄마의 공간이고 내 몸뚱아리만이 온전히 내 것이었다. 창피한 이야기기 하지만, 독립하기 전까지 내 방은 엄마가 치워줬다. 이제는 더이상 마법처럼 청소가 되어 있거나, 어질러졌던 물건이 정리 되는 일은 없다. 월 수 금은 쓰레기 버리는 날. 와인으로 들큰하게 취해서 들어오는 날에도 집에 들어오면 택배 박스를 뜯고 정리부터 한다. 나의 엄마가 만약 지금의 나를 본다면, 왜 진작 집에선 이렇게 하지 않았는지 서운해하실지도 모르겠다.

예쁜 것들은 날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서툰 손으로 만든 음식을 좋은 그릇에 담으면 한결 더 근사해 보인다. 나도 우리 엄마처럼 어느새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 사진을 찍어 가족 단톡방에 보낸다. “엄마 오늘은 이걸 해먹었어” “응 우리 딸 잘 해먹고 사네” 엄마 사실 나는 이렇게 잘살고 있어. 나에겐 먹고, 마시고, 세팅하고 새로운 돈 쓸 핑계가 생겼다. 나는 잘 먹고 잘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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