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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희 May 09. 2017

존재에 대한 고민을 영상으로 담아내는, 김송미

영상 에세이 <낯설게 하기>의 비하인드 스토리

전 회사 영상팀에 입사했을 때의 일이다.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날, 팀원들이 다 같이 어떤 사람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그녀는 머리에 고프로(카메라)를 달고 있었고,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기 직전인 듯 보였다. 팀원들과 오래도록 인사하는 걸 보니 어디 먼 곳으로 오래 떠나는 것 같았다. 물어보니 얼마 전까지 같이 일하던 영상팀 동료였고, 퇴사 후 <낯설게 하기>라는 영상 에세이를 찍으러 체코로 간다고 했다. 팀원들은 하나같이, 너무 좋은 사람이었는데 더 함께 일하지 못해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그 후로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그녀의 영상이 하나둘 뜨기 시작했다. 힘든 일상 속에 따뜻한 위로가 되는 영상들이었다. 게다가 취미로 만든다기엔 퀄리티가 너무 좋았다. 점점 이 영상을 만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이 영상을 만드는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해졌고, 그녀가 한국에 돌아오기를 몰래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1년 동안의 체코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와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자리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사소한 인터뷰> 178번째 주인공, 김송미




Q. 안녕하세요 송미님(이하 쏭님)! ‘사소한 인터뷰’ 독자들을 위해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일단 지금의 자기소개는 ‘현재’ 저의 상태, 저라는 사람에 대한 소개일 것 같아요. 올해 스물아홉, 아홉수가 되었고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평범하고 일반적이고 싶지만, 스스로에게는 굉장히 특별한 존재이고 싶은 사람입니다. 직업으로는 영상을 만들고 있어요.

쏭님 개인 홈페이지에 있는 프로필 사진

추구하는 것은 사랑, 상쾌함, 단순함, 자유, 주체성이고 경계하는 것은 ‘맥락 없이 멋진 것’이에요. 그리고 2017년, 요즘 키워드는 ‘어떻게 하면 편안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까’예요.

저를 찾는 누군가가 제 홈페이지를 통해 미리 저를 잘 알고 연락해줬으면 하는 취지로, 이런 말도 적어뒀어요. ‘생각보다 그리 써먹을 곳이 없는 사람입니다. 생산적인 일보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그래도 제가 필요하다면 찾아주세요.’


- 이리도 정돈된 답이라니…! 감동이에요(웃음)

좋죠? 사람들이 ‘현재’의 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도록 제 홈페이지에 자기소개를 수시로 업데이트해둬요. 그래서 자기소개가 일주일 뒤에 바뀔 때도 있고 1년 뒤에 바뀔 때도 있어요. 마음속에서 제 상태가 업데이트 될 때마다 적어두고 있어요.


Q. 말씀해주신 자기소개가 커리어보다는 나라는 사람에 더 초점이 맞춰진 것 같아요.

맞아요. 앞서 말씀드린 가치들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도구로 커리어를 사용할 뿐이지, 커리어 자체가 목적은 아니에요.

Q. 그럼 영상이라는 도구는 언제든 바뀔 수 있나요?

네, 꼭 영상이 아니어도 돼요. 제가 추구하는 키워드들을 발현할 수만 있다면 도구는 어떤 것이든 상관없을 것 같아요.

라고 말하지만, 그래도 스무 살 이후부터 한 게 영상이라..(웃음) 사실 체코에서 돌아와서 제일 하고 싶었던 건 카페 아르바이트였어요. 그때 ‘그래, 사람의 쓸모나 돈은 중요한 게 아니야.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자. 그리고 주말에 아주 여유롭게,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자유롭게 살자’라고 생각했었거든요.

하지만 결국 돌아와서도 어딘가에 소속되어 영상 일을 하고 있어요. 영상은 제 평생 밥벌이가 될 것 같네요. 사람은 진짜 이중적인 것 같아요.(웃음)
 
Q. 이건 마치 쏭님 영상 초반에 나오는 제목을 짓는 기분일 것 같은데요. 스스로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진짜 어렵네요. 저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엄청’요. 전 기뻐도 남들보다 엄청 기쁘고, 슬퍼도 엄청 슬프고, 고민이 있어도 엄청 고민하거든요.



PART 1. 체코 워킹홀리데이


Q. 작년 한 해 동안 체코로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온 걸로 알고 있어요. 쏭님에게 오늘 인터뷰가 그 1년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먼저 체코로 떠난 이유는 뭐였나요?

스물한 살 겨울,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어요. 첫 해외 장기 여행이어서 되게 기대했는데, 보름이 지나도록 아무 감흥이 없는 거예요. 저기가 여기 같고 여기가 저기 같고 유럽의 겨울은 또 너무 우울하고. 그러다 하루는 저녁에 프라하 도착해서 짐을 풀고 카를 교 쪽에 갔거든요. 근데 카를 교 반대편에서 바라보는 프라하 성이 동화 속에 나오는 성처럼 멋있더라고요. 그 야경이 왠지 너무 좋아서 몇 시간이고 서서 야경을 봤던 것 같아요. 그리고 막연하고 순수하게 기도를 했어요. 언젠가 여기서 꼭 한 번 살게 해달라고요.

그리고 나서 시간이 많이 흘렀고, 3년 차 직장인이 됐죠. 제가 그 당시했던 일이 남들에게 용기를 주고 동기부여해주는 영상을 만드는 거였는데, 제 안의 소재가 고갈된 거예요. 그러면서 ‘평생 이런 커리어를 이어가고 싶은데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가장 순수했을 때 내가 바랐던 막연하고 낭만적이면서 실현 가능하지 않았던 꿈이 뭐가 있을까’를 생각했는데 갑자기 스물한 살 때의 프라하가 떠올랐어요.

Q. 아, 그래서 체코였군요.

굳이 체코, 프라하를 가고 싶었어요. 도시 분위기 자체가 ‘어른이 되었지만 어렸을 때의 순수함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동화적인 느낌이 있거든요. 뭔가 저의 정서에 부합하는 도시라고 생각했어요.
 
Q. 체코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기 전에 다녔던 회사는 마음에 드셨어요?

만족했어요. 청춘과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회사여서 저와 궁합이 정말 잘 맞았었거든요. 이런 회사에 다닌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자부심이 있었고, 퇴사한 지금도 항상 응원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회사에서조차 매너리즘에 빠지는 저를 보면서, 만약 퇴사하게 되면 더 이상 제 인생에 회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진지하게요.

그리고 1년 뒤에 저는 입사를 합니다. 생계를 이어가야 하기 때문이죠.(웃음) 그래서 사람은 뭔가를 결심했을 때 너무 단호하게 사람들에게 말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그 단호한 결심, 바뀔 수 있으니까요.

- (웃음) 회사 생활이 만족스러우셨군요. 사람들은 보통 현 상태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할 때 여행이라는 카드를 쓰는 것 같던데.

전 그런 마음은 아니었고요. 저에게 낭만을 꿈꿀 수 있는, 모험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쯤 더 주고 싶었어요.


당시 함께 일했던 회사 동료들, 그리고 현장에서의 쏭님


Q.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떠난 여행이었나요? 아니면 에너지를 충전하고 싶어서 떠난 여행이었나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 실망하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는데요. 솔직히 저는 어른의 마음으로, 현실적인 마음으로 목적 다분한 여행을 떠났어요.

제 스스로의 동기부여를 위해 떠난 것도 있었지만, 그 과정을 영상 콘텐츠로 만들고 싶었어요. 그 콘텐츠로 제 커리어에 기념비적인 점을 찍고 싶은 마음도 컸고요. 사람들에게 낭만을 주고 싶었지만 그 이면엔 현실적인 플랜이 있었던 거죠.

Q. 체코에서의 생활은 계획대로 흘러갔나요?

해외 생활이 마음처럼 쉽지 않더라고요. 일단 의식주부터 무너지니까, 한국에서 철저하게 이상적으로 계획했던 것들을 실현하기가 어려웠어요. 커리어적인 계획들도 무너지면서, 나중엔 영상이 커리어가 아니라 오히려 저의 생활을 지탱해주는 ‘마지막 끈’이 됐던 것 같아요.

- 방금 말씀하신 ‘생활을 지탱해주는 마지막 끈’이라는 게 왠지 생계에 관한 건 아닐 것 같아요.

생계라기보다 당시 삶 전반을 지탱해준 것 같아요. 맨 처음엔 저도 영상이 생계가 될 줄 알았어요. 초반에 영상을 업로드하면서, 돈도 벌고 유명해질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오기도 했고요. 그래서 솔직히 ‘그래, 내가 원하던 그림이 이런 거였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그중 몇몇 기대에 응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사실 일주일에 하나씩 영상을 만들어낸다는 게 생각보다 굉장히 고된 일이거든요. 개인 작업만 해도 일주일이 빠듯한데, 제가 거기다 돈 버는 일까지 받아버린 거예요. 욕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몇몇 분들께 실망을 끼칠 때도 있었고 저도 사람에게 실망할 때도 있었어요. 제가 감당할 수 없는 큰 기회들 속에서 과부하가 많이 걸렸던 것 같아요.

Q. 과부하 속에서 주로 어떤 생각을 많이 하셨나요?

요즘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욕심이 많아도 되거든요. 근데 욕심이 많으면 그걸 감당할 수 있을만한 엄청난 실천력과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그때의 저는 욕심만큼 끈기와 노력이 따라주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한테 왔던 좋은 기회들을 스스로 차버리기 시작했어요. 욕도 많이 먹었지만, 모든 걸 감당하며 하나씩 내려놓았죠. 좋은 기회가 밀물처럼 들어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스스로에 대한 괴로움이 너무 컸어요. 나중에는 그 괴롭고 힘든 마음들을 <낯설게 하기>에 풀었어요. 유일하게.


당시 쏭님의 마음을 잘 담고 있는 영상 한 편


Q. 밖에서 제가 보기엔 진짜 실천력, 노력이 대단해 보이거든요. 그리고 실제로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런 말 많이 들으실 것 같은데.

음, 안 그래도 엊그제 친구에게 부지런하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요. 제가 워낙 자기 기준이 높은 사람이라, 스스로 실천력이 뛰어나거나 엄청 성실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Q. 그럼 언제 스스로가 부지런해 보여요?

‘잘 부지런’한 게 뭘까 생각해보면요. 단순히 잔뜩 쌓인 일들을 피상적으로 해치우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오히려 한 가지 일을 성실히 오랜 시간 반복적으로 하는 게 ‘잘 부지런’한 것 같기도 해요. 잘 부지런하려면 '방향성'이 필요한 거죠.

근데 과거의 저는 여러 일들을 산만하게 벌여놓고, 그걸 해결해나가면서 스스로 부지런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 모습을 칭찬해주는 사람들의 말을 너무 믿기도 했고요. 요즘 그런 것에 대해 반성하는 바가 있어서, 이제는 스스로가 인정할 수 있는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 한 가지 방향을 정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예술적 성향이 강한 사람들은 피상적이에요. 경험하고 싶어 하거든요. 끊임없이 궁금한 게 생겨요. 분명히 지금 하는 일도 처음에 마주했을 땐 너무 흥미로운 일이었는데 그걸 해결해 나가는 과정, 원하는 것에 도달하는 과정은 지루하죠. 그 중간에 흥미로운 게 생기면 또 갈아 타요. 그럼 평생 피상적인 거예요. 본질이라는 단어는 너무 거창해 보여서 안 좋아하긴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본질”에 가까이 가지 못해요.

이제는 스물아홉이 됐으니 저의 단점을 직시하고 어느 정도 현실적인 부분에서는 개선하려고 노력해요. 예를 들어 저의 장점 중 하나가 ‘호기심이 많다’는 건데요. 자칫하면 이게 ‘유아적이고 피상적이다’는 단점으로 바뀔 수 있거든요. 그래서 예전엔 일을 하는 과정에서 지루함을 느낄 때면 ‘지루해, 다른 걸 찾아봐야겠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래도 견뎌’라는 생각을 해요.



PART 2. 영상 에세이, <낯설게 하기>


Q. 처음 <낯설게 하기>를 기획할 땐 어떤 것들을 카메라에 담고 싶으셨어요?

회사에서 찍는 연출된 영상들 말고 정말 자연스러운 것들, 정말 살아있는 것들을 담고 싶었어요.  그리고 제가 추구하는 감정들(사랑, 상쾌함, 단순함, 자유, 주체성)에 이르는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찍고 싶었어요. 아이의 웃음이라든지, 노부부가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이라든지, 아니면 회사에서 느끼지 못했던 계절의 흐름, 계절의 아름다움 등 사람의 삶을 살만하게 만드는 것들을 있잖아요. 그런 것들을 극대화해서 찍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런 영상들을 묶어서, 매몰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제가 찍은 영상은 세상의 아름다움의 극히 일부지만요.

Q. 실제로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세요?

반쯤은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대중적으로 성공하진 못했지만, 가끔 몇몇 편을 보면 제 마음도 행복해지니까요. 그리고 그 따뜻함이 영상을 보는 사람들에게도 느껴졌으면 좋겠어요. 물론 제 영상에도 연출된 부분이 있기 때문에 거짓은 있겠지만, 이 장면들만큼은 거짓이 없어요. 저 아이는 진짜 행복해서 웃고 있고, 저 두 사람은 진짜 사랑하는 사이거든요. 진실된 장면에서 오는 분명한 에너지가 있을 거라 생각해요.


프라하의 자연스러운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인터뷰이


Q. <낯설게 하기> 영상을 보면서 한국에서 찍었다면 거리에 있는 사람들 표정이 그렇게 자연스럽진 못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유럽에선 그냥 촬영해도 자연스레 응해주나요?


약간 눈치를 보면서 카메라를 스윽 올렸을 때 상대가 시익 웃어주면 찍어도 된다는 제스처로 생각하고 동의를 구하지 않고 자연스레 찍어요. 유럽 사람들 자체가 카메라를 별로 의식하지 않기도 하고요. 제가 여자여서 사람들이 별로 경계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어찌 보면 큰 혜택이죠. 

또 여행을 하다 보면 그 사람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그 사람과 그 사람을 둘러싼 풍경이 너무 대단한 장면이라고 생각될 때가 있거든요. 그럴 땐 그 사람에게 꼭 양해를 구해요. 되게 오랫동안 찍거든요. 그렇게 제발 거기에 계속 있어 달라고 해서 찍은 컷들도 있어요. 그런 컷을 건질 땐 일주일의 우울함이 다 날아가요. ‘내가 굉장히 의미 있는 무언가를 남겼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Q. 아직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어요?

세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첫 번째는 봄에 벚꽃이 피었는데 제가 공원 벤치에 앉아있었거든요. 굉장히 예쁜 원피스를 입은 한 여자와 잘 차려입은 한 남자가 데이트를 하는 것 같았어요. 둘이 공원을 한 바퀴 돌 때만 해도 손을 안 잡고 있었거든요? 근데 한 바퀴를 더 돌고 제 앞으로 올 때 왠지 카메라를 들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몰래 들었거든요. 근데 제 곁을 지나갈 때 진짜 둘이 손을 잡았어요. 이건 제 상상인데요. 그 둘은 커플이 아니었는데 처음 손을 잡고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 제가 그 모습을 영상으로 담았던 것 같아요. 그때 굉장한 희열이 있었어요.

두 번째는 룸메이트의 친한 친구가 프라하에 놀러 온다고 해서, 그 둘에게 그때 마침 기획하고 있던 영상 출연 부탁했어요. ‘봄과 여름 사이의 계절’을 ‘썸 타는 연인’에 비유하고 싶어서 둘이 연인인 척 연기해달라고 했죠. 그때만 해도 그냥 친구였는데, 지금 두 친구는 예쁘게 만나고 있어요. ‘이게 사랑일까 우정일까’ 고민하던 차에 마침 제가 연인 연기를 제안했던 거예요. 그리고 제가 그 순간을 영상에 담은 거죠.


'썸 타는 연인'의 모습을 담은 영상(공원에서 찍은, 손잡는 찰나도 1분 9초쯤 나온다.)


세 번째는 까를로비 바리 영화제에 갔을 때 찍었던 영상이에요. 마지막에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장면이 너무 좋아요. 그 장면에선 모든 감정이 진실해요. 박수를 치고, 아이와 엄마가 춤을 추고, 연인이 키스를 하고, 공연이 너무 신난 나머지 사람들이 무대 위로 뛰쳐올라가 춤을 추고.. 그런 모습을 다 담았어요. 그때 너무 행복했어요. 그런 순간은 정말 저도 모르는 사이에, 기가 막힌 타이밍에 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 너무 소중해요. 이건 제가 만들 수 있는 타이밍이 아니니까요. 마침 카메라를 들었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해주는 우연. 진짜 짜릿해요.

Q. 영상에 사람을 많이 담으시는데 정작 본인은 별로 안 나오는 것 같아요. 혹시 이유가 있나요?

제가 영상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아서요. 오히려 제 주변에 숨겨져있는 괜찮은 사람들을 한 번쯤 영상으로 주인공처럼 만들어 주고 싶어요. 이 사람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사람들이 잘 모를 때 더욱요. 사소한 것부터 얼마나 대단하고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지 담고 싶어요. 제가 좋아하는 사랑스러운 사람들은 꼭 자기 스스로 주인공이 잘 안 돼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주인공 만들어주는 겸손한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 특성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주인공을 시켜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저는 영상에 얼굴을 굳이 드러내지 않고도 제 자신을 잘 드러내는 사람이에요. 저의 존재감에 대해 스스로 잘 알고 있고, 그걸로 충분해요.

Q. 그런 존재감은 어디서 느껴지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저의 존재에 대해 건성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늘 깊이 고민하고, 그때그때 제 감정을 존중해주는데요. 그런 스스로에 대한 존중이 바탕이 돼서 저라는 사람의 존재감이 나오는 것 같아요.

근데 또 자기 검열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너무 자기애에 빠지면 안 된다.’ ‘스스로에 대한 애정으로 나의 단점까지 합리화시키진 말자.’ 이런 생각도 항상 해요. 건강한 자신감을 갖고 싶어요. 나한테도 좋고 남한테도 이로운 자신감이었으면 좋겠어요. 너무 자신감이 센 것도 별로예요. 스스로에겐 좋은데 남에겐 나름 상처가 되는 자신감의 형태도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아까 자기소개할 때 ‘남들 속에선 평범하고 싶은데 스스로에겐 특별한 존재이고 싶다’고 이야기한 것 같아요.


체코에서 밤새 편집 중인 인터뷰이


Q. 매주 한 편씩 발행한 걸로 알고 있는데, 쓰고 싶고 찍고 싶은 것들이 없을 때나 하기 싫을 때는 어떻게 하셨나요?

그냥 ‘나라는 인간이 1년 동안 일주일에 하나씩 만든다.’ 이걸 해보고 싶었어요. 설령 드문드문 진실되지 않아도 일주일에 하나씩 무언가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보여주고 싶었고, 해내고 싶었어요.

좀 인위적인 방법일 수도 있지만 굉장히 책을 많이 읽었어요. 그리고 무작정 카메라를 들고 원하는 장면이 올 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사람이 규율을 정해놓지 않으면 느슨해지거든요. 스스로의 규칙을 정해놓고, 주변 사람들에게 선전포고를 하면 쪽팔려서라도 하게 돼요. 그 힘이 대단해요. 그리고 소수지만 제 영상을 기다려주고 봐주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도 느꼈어요.

이 부분은 약간 종교적일 수 있지만, 제가 크리스천인데 모든 일들이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는 여지가 있는 것 같아요. 너무 힘들고 포기하고 싶을 때 갑자기 ‘이 영상 덕분에 살아가고 있다’는 장문의 편지가 와요. 주로 저와 같은 상황에 처한, 해외에 계신 분들께 위로가 됐던 것 같아요. 그럼 만들게 되죠. ‘어휴 이번 주에는 휴재해야겠다’ 싶었는데 갑자기 제 눈앞에 글감이나 장면이 튀어나온 적도 있어요. 신기하죠. 저의 노력에 20-30% 정도의 운이 따라줬던 것 같아요.


구독자분들께서 보내주신 편지와 선물(왼쪽은 한국에서, 오른쪽은 헝가리에서 왔다)
<여름 예고편>에서 영감받아 그린 '그림' 선물(왼쪽)과 직접 찍은 사진 위에 캘리를 넣어 보내주신 선물(오른쪽)



PART 3. 아홉수



Q.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낯설게 하기>를 꾸준히 이어가고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이름은 <낯설게 하기 시즌 2 - 아홉수>라고 살짝 바꾸셨더라고요. 요즘엔 어떤 고민들을 영상에 담고 계세요?

요즘 제 감정의 화두를 영상에 담아요. 올해 아홉수가 됐는데요. 지금이 서른이라는 낯선 나이, 미지의 세계로 가기 전의 특수한 시기라고 정해놓고, 기념비적으로 기록해두고 있어요. 저의 혼란들을.


Q. 한국이라서 ‘자연스러운’ 모습을 영상으로 담는 데 어려움이 좀 있을 것 같기도 해요.

그렇죠. 유럽과 달리 사람들을 찍기가 쉽지 않아요. 다들 카메라를 싫어하고 피하거든요. 카메라를 드는 게 과하게 실례인 것 같기도 하고 변태로 오해받을까 봐(웃음) 요즘엔 ‘나를 더 많이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낯설게 하기 시즌 2 - 아홉수>가 자주 연재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근데 생각해보면, 유럽 자체가 기본적으로 관광지라 도시를 걷는 것 자체가 이벤트이기 때문에, 누군가 뭔가를 찍는 게 그렇게 낯선 풍경은 아니에요. 그래서 유럽 분들은 생긋 웃으면 화답을 해주시는 경우가 많아요. 그나마 요 근래 한국에서 촬영하기 수월했던 때를 꼽자면, 벚꽃 피었을 때! 그 상황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이벤트잖아요. 다들 카메라를 준비해오고 카메라에 담길 준비도 되어 있어요. 그럴 땐 사람들 마음이 굉장히 열려있죠.

Q. 일과 개인 작업을 병행해 보니 어떠세요? 힘들진 않으세요?

너무 힘들어요. 한동안 영상에 질려버릴 정도로, 체코에서 제가 찍고 싶은 영상은 다 찍은 것 같아요. 그래도 뭔가 이걸 멈추면 안 될 것 같다는 욕심에 근근이 이어가고 있어요.

사실 지금 시간은 충분해요. 한국에 돌아와서 주 3일만 근무할 수 있는 곳을 구했거든요. 주 4일은 제 개인 작업을 하자는 취지로 그런 건데, 요즘 계속 잠만 자고 있어요.(웃음) 그리고 개인 작업을 할 때만 되면, 시험기간처럼 온갖 책이 다 재밌어 보여요. 한 달에 영상 한 편이라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너무 힘들어요.

Q. 삶에 ‘나만의’ 작업을 할 시간이 꼭 필요하다고 느낀 건 언제부터였어요?

제가 늘 하는 ‘자기 존재에 대한 고민’에서 파생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한국은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을 너무 많이 줘요. 출근길만 봐도 그래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서 그 지옥철을 타고 모두가 같은 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잖아요. 그런 걸 보면 ‘그들의 삶과 나의 삶이 다를 바가 뭐지’, ‘내 삶의 존재 이유가 뭐지’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어요. 딴짓을 하거나 내 존재에 대해 생각할 여유도 없이 ‘그냥 다 같은 길로 가야 한다’는 느낌도 받고요. 근데 그 상황 속에서도 늘 나여야만 하는 이유가 필요하잖아요. 그런 갈급함에서 파생된 프로젝트가 <낯설게 하기>예요. 늘 그걸 고민했으니 너무 자연스럽게 시작된 것 같아요.

Q. ‘에세이’라는 건 진짜 나의 이야기를 하는 건데, 남들에게 어디까지 솔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재밌는 질문 같아요. 일단 저는 대중적인 에세이를 쓰는 사람은 아니에요. 근데 대중적으로 에세이 잘 쓰는 사람들은, 굉장히 솔직해요. 자극적인 자기의 마음까지 다 드러낼 줄 아는 것 같아요. 근데 저의 에세이에는 저의 최상의 모습과 최악의 모습이 없어요. 자극적이지 않죠. 그래서 별로 재미없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이해할 것 같아요. 솔직함에서 오는 원초적인 자극은 없으니까요. 예를 들어 네이트 판을 보고 있을 때의 희열은 절대 못 느껴요.

- 최악의 모습을 담지 않는 이유가 있나요?

너무 고통스러울 때는 그 고통을 견디기도 힘든데, 뭘 글 쓰고 영상 찍고 편집을 해요. 그땐 내가 나를 잘 달래고 위로해줘야죠. 그런 것까지 스스로에게 엄격하게 강요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저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걸 영상에 담아서 그 사람에게 잔인하게 굴고 싶지 않아요. 예전에 읽었던 에세이 중에 이혼한 아내에 대해 객관적으로 쓴 에세이가 있었어요. 그 사람의 날 것을 보는 거니까 되게 재밌거든요. 근데 제가 그 작가였다면 ‘이 글을 그 사람이 보면 어떤 기분일까’를 고려했을 것 같아요. 그냥 기본적으로 전 그런 걸 의식하는 사람이에요.


그래도 딱 한 번, 싫어하는 사람을 담았다던 그 편


- 그럼 최상의 모습은요?

희한하게 너무 행복한 순간도 담지 않게 돼요. 예를 들어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땐, 이걸 영상으로 찍으면 대박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카메라를 들이미는 순간, 아무리 자연스럽다고 해도 인위적인 부분이 생기거든요. 그럼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감정을 100%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카메라를 과감히 안 가져가요. 

이 지점에서 저는 정확히 성공할 수 없어요.(웃음) 왜냐면 창작하는 사람은 자기감정을 120% 써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위대한 창작자가 될래? 인간으로서의 삶을 더 존중할래?’라고 물으면, 전 후자인 것 같아요.




Q. 앞서 말씀해주신 자기소개 조금 녹아있기도 한데, 앞으로는 어떤 삶을 살고 싶으세요?

추구하는 모든 가치(사랑, 상쾌함, 단순함, 자유, 주체성) 중에 사랑을 첫 번째로 썼잖아요. 음, 이 이야기가 ‘20대 후반의 여성이 결혼을 하고 싶다’는 식의 뻔한 이야기로 흘러가지 않았으면 하는데요. 전 사랑을 찾고 싶어요. 어딘가에 있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존재가 좀 더 온전해질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에게 채워지지 않는 애정을 갈구하지도 않을 것 같고, 더 이상 스스로가 쓸모 있어야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 같아요. 누군가의 사랑을 받으면 그런 걸 멈출 것 같아요.

Q.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전전 인터뷰이의 릴레이 질문을 묻고 싶어졌어요. 가장 최근 연애에 별점을 매긴다면? 별 5개 만점에 몇 개인가요?

저한테 좋은 사람은 아니었는데, 진짜 사랑했어요. 진짜 사랑했지만 자존심이 상해서 별점을 줄 수가 없네요.(웃음) 혹여나 그 사람이 이걸 보고 있을까 봐. 그냥 이렇게 적어주세요 “부디 네 말대로 네가 진심으로 어른스러운 사람이 됐다고 생각하면 당당하게, 술 한 잔 하자. 그리고 술은 네가 사.”(웃음)

Q. 다음 인터뷰이에게 릴레이 질문을 하나 남겨주세요.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내가 생각해도 창피한 ‘저급한’ 취미가 있다면?

Q. 이 질문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거 아시죠?(웃음) 그에 대한 본인의 대답은요?

저급한 취미 아주 많죠. 이 매체에 담을 수 없을 만큼요.(웃음) 매체에 담을 수 있는 버전으로 이야기하자면, 눈 뜨자마자 연예 기사를 아주 즐겨 읽다는 것? 연예인에 아주 관심이 많거든요. 오늘은 남주혁과 이성경이 사귄다는 소식을 보고 왔어요. 그런 사람이 사람들과 밥 먹을 땐 김훈 선생님의 시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사람이 이렇게 이중적이에요.(웃음)

Q. 묘비명을 남긴다면 뭐라고 남기고 싶으세요?

‘따로 또 같이 잘 살았다.’
개인적인 행복도 중요하지만, 사람들과 같이 이루는 행복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요.



인터뷰 도중 인터뷰이는 이런 말을 했다. "오만하게 들릴 수 있지만 '<낯설게 하기>는 나만 할 수 있는 거겠다'라는 자부심도 있어요. ‘나같이 대단한 사람 아니면 못해’가 아니라 ‘나같이 이렇게 생각 많은 인간 아니면 누가 하겠어?’라는 자부심."

맞다. 인터뷰이처럼 '깊이 고민한 끝에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는' 생각이 많은 사람 아니면 누가 할까. 스스로의 가치와 능력을 믿고 당당히 여기는 그 마음이 멋있었다.

믿기 위해선 알아야 한다. 스스로의 가치와 능력을 믿기 위해선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것'들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흘러가는 생각들을 얼마나 정리하며 살고 있을까. 가끔은 흘러가는 나를, 나의 감정과 생각들을 조금 더 깊게 들여다 봐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쏭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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