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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희 May 02. 2023

사랑하는 남편의 육아휴직을 기록하다

한 인간을 키운다는 것, 한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
나는 그런 것들에 자신이 없었다.
늘 평범함보다는 특별함을 동경해왔지만 언젠가부터 내가 무시하던 평범한 가정, 평범한 삶, 평범한 인간을 만든다는 것이 오히려 대단하고 특별한 일처럼 느껴졌다.

“벅차게 행복하고 즐거울 거야.”
특별한 여정에 대해 무지한 나에게 그는 늘 말했다.
내가 눈을 반짝이며 나의 커리어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는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와 나중에 어떤 운동을 같이 하고 싶은지 신나서 이야기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는데 그에게 ‘좋은 아빠’가 되는 것이란 멋진 사업가, 훌륭한 리더, 유쾌한 친구가 되는 것만큼이나 소중한 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꿈꾸던 아가를 만난 그는 다시 오지 않을 영우의 어린 시절을 함께하고 싶다며 망설임 없이 육아휴직을 냈다. 한집에 살며 본 영우 아빠의 벅차게 행복하고 즐거운 1년 반의 여정을 함께 나누고 싶다.


오늘의 주인공이자 나의 육아 전우 John Lee, 그리고 우리 집 보물 영우




<사소한인터뷰> 독자들을 위해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해.


1년 반 동안 영우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서 아주 행복한 영우 아빠 John입니다.


원래 인터뷰를 시작하며 스스로를 한 마디로 표현을 해달라고 하는데, 오늘은 육아 기획인 만큼 특별히 우리 영우를 한 마디로 표현해 줄 수 있을까?


참 어려운데 ‘존 주니어’로 할게.


본인의 주니어가 생겼을 때 기분이 어땠어?


처음에 영우가 태어났을 때 정말 신기했어. 그 순간을 오랫동안 상상해왔는데 막상 병원에서 딱 봤는데 너무 웃긴 거야. 감자같이 생겼었잖아. 울지도 않고 눈 감고 가만히 있는 감자.(웃음) 어떤 사람들은 그 순간이 감동적이고 울컥했다는데 난 마냥 웃기더라.


나의 고생을 모르고 감자 같다고 낄낄대다니



Part 1. 너의 모든 순간


영우의 아가 시절을 함께 하며 어떤 순간이 가장 행복했는지 궁금해. 4개월부터 22개월까지 찍었던 수만 장의 사진 중 베스트 3장을 뽑으며 그 대답을 대신해 볼까?


한 장 한 장에 담긴 사소한 모든 순간이 소중해서 어렵네. 그래도 굵직하게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아보자면, 첫 번째는 영우 처음 걸을 때지. 한참 걸음마 뗄 때 초보 운전처럼 ‘초보 걸음’이라고 인쇄해서 등 뒤에 붙여가지고 사진 찍었잖아. 그때가 귀여워서 기억에 많이 남아.


막 걸음마를 뗀 아가는 약간 춤추는 티라노사우루스처럼 걷는다


두 번째는 영우랑 처음 같이 눈 맞았을 때 둘이 찍은 사진이 멋지게 나와서 마음에 들었어.


세 번째는 영우 처음 어린이집 보낼 때, 생각보다 덩치가 컸는데 아기띠를 하고 있으니 좀 웃겼어. 어린이집 적응에 한 달 정도 걸렸는데 첫날은 20분, 다음날은 30분, 그다음 1시간, 2시간 어린이집에 있는 시간을 늘려갔었어. 그러다 낮잠도 자고 오고, 드디어 3시 반까지 있다 온 날이 기억에 남아.


모든 게 처음인 영우 덕분에 우리도 모든 걸 새롭게 보게 된다


육아를 하면 집안일부터 요리, 기저귀 갈기 등 다양한 일을 하는데 개인적으로 뭐가 제일 힘들었어?


화를 안 내는 게 제일 힘들었어.(웃음) 육아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지치고 힘들잖아. 진짜 참기 힘든 순간들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화를 내면 어떻게 해. 그 순간을 못 참았다가 부부 관계에 금이 가는 건 정말 피하고 싶었어.


스트레스는 쌓이는데 아이한테 화낼 수도 없고 열심히 일하고 온 배우자한테 화낼 수도 없으니 게임으로 풀었어. 잠깐 눈 붙일 시간도 부족했지만 무리해서라도 했던 것 같아.


혹시 ‘내가 육아를 잘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은 없었어?


어렸을 때부터 워낙 아이를 좋아하고 예뻐해서 그런 걱정은 전혀 없었어. 영우 태어나기 전에도 아이 있는 집에 가면 아이랑 놀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곤 했거든. 그리고 동생이랑 다섯 살 차이인데, 동생이 아기일 때 새벽에 우는데 부모님께서 안 일어나시길래 직접 분유 타서 먹였던 기억도 있어.


근데 실제로 해보니 생각보다는 힘들더라. 다행히 우리 옆 동에 부모님이 사셔서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는데, 1년 정도 지나고 돌아보니 ‘나 혼자 했으면 큰일 났겠다’하는 생각이 들었어.


실제로 아이를 맡아 키워보니 어떤 게 상상하던 것과 달랐어?


매일같이 똑같은 공간에서 똑같은 루틴으로 사는 것. 처음엔 설레고 부푼 마음을 가지고 시작했는데, 변화 없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 똑같은 하루하루를 보내니 점점 지치더라. 밖에 나가기도 어렵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다는 걸 해보기 전엔 잘 몰랐어. 나중엔 몸도 아프고 정신적으로도 힘들어져서 부모님께 자주 SOS를 쳤어.


드라마를 보면 엄마가 아이 키우다 ‘내 인생은 뭘까’ 허무해하는 장면이 나오잖아. 예전에는 전혀 이해 못 했는데 직접 키워보니까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고 공감되더라. 좋아하는 일을 하며 달리다가 갑자기 육아에만 매여있고, 그 사이 친구들은 쭉쭉 치고 나가는 상황을 겪으면 괜히 아이가 원망스럽고 힘들겠구나 싶었어.


Best 3에는 들지 못했지만 대체로 영우가 웃기게 나온 사진을 좋아한다. 아빠한테 애를 맡기면 안 된다는 말이 이래서 나온 걸까.

    


Part 2. 아빠가 하는 육아휴직


육아휴직을 쓸 때 어려웠던 점이 많았는데 그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고 싶어.


당시 다니던 회사에서 남녀 통틀어서 내가 처음 육아휴직을 쓰는 사람이었어. 그전에 아무도 육아휴직을 쓴 적이 없다 보니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부담됐어. 어떻게 말을 꺼내야 될지, 만약에 회사에서 안된다고 하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도 많이 하고 육아휴직 제도에 대해 엄청 공부했지.


다행히 팀장님께 처음 이야기했을 때, 나를 잘 아는 분이다 보니 감사하게도 “너 이거 안 해주면 퇴사할 거지?”라고 농담도 하시며,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밀어주셨어.


내가 육아휴직을 처음 쓴 후로 육아휴직을 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에게 고맙다고 연락이 왔었어. 길을 뚫은 것 같아서 뿌듯한 마음이 들더라. 회사 생활하며 만든 어떤 계약보다도, 육아휴직 문화를 만들고 갔다는 데 더 큰 자부심을 느껴.(웃음)


아빠가 육아휴직을 하면 엄마가 했을 때와 다른 점이 있을까?


대부분 엄마들이 키우다 보니 어디 가도 끼기가 애매하고, 아빠랑 아기랑 둘만 있으면 바라보는 게 좀 다르긴 해. 예를 들어 낮에 아기랑 둘이 카페에 있으면 사람들이 신기하게 쳐다보는 게 느껴져.


차도 오늘 인터뷰 오는 길에 지하철을 탔는데, 아빠 혼자 유아차를 끌고 가는 거야. 아빠가 머리 세팅도 하고 멋있게 입고 혼자 유아차를 끌고 가는데, 나도 모르게 ‘주말인데 엄마는 어디 갔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신기하게 보고 있었어. 그 모습이 익숙하지 않은 나를 발견하고 ‘나 되게 옛날 사람인가’ 싶더라.(웃음)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그림이긴 해.


엄마는 힘들 때 조리원이나 문화센터에서 만나는 엄마들과 친해져서 어울리는데, 아빠는 같이 만날 수 있는 아빠가 없잖아. 물론 어린이집에서 만난 엄마들과 반갑게 인사도 하고 키즈카페도 몇 번 갔지만, 엄마들끼리 친하게 지내는 느낌으로 어울리긴 힘들어.


내 친구 중에 남자 육아휴직자가 있었다면 집에 아이 데리고 놀러 가서 육아도 같이 하고 우리끼리 놀기도 했겠지. 그런 게 없으니까 좀 무료하고 외로울 때도 있었어. 어디 놀러 갈 데도 없고 맨날 집에만 있으니까.


육아하는 아빠들이 점점 많아지긴 하지만 아직도 엄마들이 많이 하긴 해. 그래서인지 여전히 ‘그래도 애는 엄마가 키워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고 생각해. 왜냐하면 인터넷에 정보가 너무너무 많아. 모르면 배우면 되는 거고, 뭐 엄마라고 처음부터 잘하는 거 없어.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잖아.


남자든 여자든 다 할 수 있고, 나는 오히려 남자가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해. 육아는 체력전이거든. 몇 시간 동안 안고 있는 것뿐 아니라 아이에 맞춰 몸을 숙였다 일으켰다를 반복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야. 엄마는 출산한지 얼마 안 돼서 회복이 필요한 것도 있고, 아빠가 체력적인 면에서 훨씬 어드벤티지가 있지. 심지어 요리도 요즘 남자들 다 잘하잖아. 스스로 지레 못한다고 생각하는 게 큰 것 같아.


신생아 때는 거의 하루 종일 안고 있는데 이게 진짜 쉽지 않다


육아휴직을 고민하고 있는 아빠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쓰면 진짜 후회 안 할 거예요. 아이가 커가는 순간들을 생생히 함께할 수 있어요. 아이가 처음 걷는 순간, 처음 아빠라고 말하는 순간, 어린이집을 마치고 “아빠” 하며 반갑게 달려와 안기는 순간 등 하나하나 저는 다 기억해요.


그리고 아마 잊지 못할 거예요. 육아휴직이 끝나고 다시 일을 하니까 그 순간을 다 함께하지 못하는 게 너무 아쉬웠어요. ‘이제부터는 첫 1년 반 동안만큼은 못 보겠구나’ 싶더라고요. 모든 아빠들이 꼭 한번 느껴봤으면 좋겠어요. 그건 돈으로 살 수 없는 감정이에요. 아이가 태어났을 때는 그런 감정이 없었는데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놀고 돌보며 느끼게 된 것들이에요.


단 몇 개월이어도 좋아요. 저처럼 1년 반을 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짧은 시간이라도 한번 느껴봤으면 좋겠어요.


반대로 육아휴직은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아빠들에게도 화끈하게 한 마디 남겨줘.(웃음)


그게 참 어려워. 왜냐하면 육아휴직을 쓰라고 많이 얘기하는데 대부분 쓰기가 어려운 게 현실이거든. 커리어를 중시하고 지금 회사에서 높이 올라가고 싶은 사람들도 있잖아. 그런 경우 육아휴직을 쓰는 순간 좌천되고 아직도 어려운 점이 많아서 말을 함부로 못하겠어.


다만 회사에 진짜 뼈를 묻을 생각 아니고 나중에 이직할 생각이 있다면, 언젠가 올 이직 시점을 조금만 당겨서 지금 아이가 어렸을 때 같이 몇 개월이라도 살아보라는 말씀은 드리고 싶어.


회사에서 수십 년간 있어도 느끼지 못할 벅찬 감정들을 많이 느끼게 되고, 그 경험이 아이와의 관계뿐 아니라 배우자와의 관계에도 굉장히 좋은 영향을 많이 미친다고 생각해요. 여성들의 일과 삶에 걸친 고민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육아휴직 안 했으면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 같아요.


영우가 크면 선물로 주겠다며 매일 한 문장씩이라도 쓴 육아일기




평소 많이 고민해 봤을 것 같은데, 영우에게 어떤 아빠가 되고 싶어?


아이가 고민이 있을 때 함께 고민하고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나에게 아버지는 늘 어려운 존재여서 아버지와의 대화 주제는 언제나 한정적이었어. 고민이 있어도 아버지한테 얘기를 못했지. 그래서인지 나는 영우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함께 나눌 수 있는 아빠이고 싶어.


마지막으로 스무 살이 된 영우에게 한 마디 남기며 인터뷰를 마무리하려 해.


세상은 절대 만만치 않지만, 네가 그 힘든 과정을 이겨나갈 수 있게 아빠가 많이 도와줄게. 그리고 최대한 즐길 수 있도록 아빠가 많이 도와줄게. 같이 재밌게 놀자.


영우야, 엄마 아빠의 찬란한 순간을 기억해 줘.


“문장은 독자를 어딘가로 데려가야 한다.”
김지수 기자님의 인터뷰에서 본 문장이다.
이번 육아 기획 인터뷰를 쓰며 이 글은 어디로 향해야 할지 생각했다.

육아라는 것이 나도 다 알 수 없는 여정이기에 조심스러웠다.

다만 혹시 육아를 삶의 선택지 중 하나로 두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오늘의 주인공처럼 누군가에게는
어렵지만 신비롭고 벅찬 경험이라는 것을 나누고 싶었다.

한 인간을 키운다는 것, 한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은 여전히 두렵다.
하지만 그런 두려움을 가진 사람이라서, 나의 불완전함을 늘 의심하는 사람이라서 어쩌면 좋은 엄마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치열하게 평범하면서도
모든 순간 특별한
엄마와 아빠의 여정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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