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D로 컨셉에 매몰되지 않기
마케팅을 사랑하고, 현재 6년째 마케팅으로 밥벌어 먹고 있는 나는 컨셉 하나는 끝장나게 잘 뽑을 자신이 있었다. 소비자들이 애타게 원하지만 아직 시장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없는 깔쌈하고 트렌디한 컨셉을 2년 후 창업하게 될 내 개인 카페를 위해 정할 생각에 처음부터 한껏 부풀어있었다.
그랬던 내가, 일년 넘게 컨셉이란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컨셉팅은 정말 번지르르한 생김새로 계속해서 나를 끌어당겼다. 컨셉팅을 하는 멋진 나, 크리에이티브하고 진취적인 나, 세상에 나오지 않은 새로운 컨셉을 창작해내는 나. 마치 컨셉을 고안하고 있다고 말하면 내가 대단한 무언가를 해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실상 까보면 아무것도 진행되고 있지 않았는데 말이다.
물론 이 컨셉이라는 작업에 중독된 이유는 그저 나의 위선적인 욕망때문만은 아니였다. 컨셉이라는 것은 정답과 기준이 없는 일이기 때문에 경계없이 늘어지려면 한없이 늘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나마 마케터로 5-6년간 직장을 다니며 쌓은 안목 덕분에 안좋은 아이디어는 안좋다고 직감적으로 분류할 능력이 있었지만, 좋은 아이디어는 계속해서 "더 좋아보이는" 아이디어로 바꿔치기 당했다.
내가 직장에서 했던 마케팅 일을 통해 나는 컨셉팅에도 크게 두 부류가 있다는것을 깨달았다. 첫번째 부류는 이미 어느정도의 방향성과 조건들이 주어진 후, 이걸 소비자들에게 가장 매력적으로 보이게끔 컨셉을 잡는 일이다. 내가 직장에서 했던 컨셉팅은 대부분 이런 부류였다. 뷰티 회사에서 재직중이기에 보통 내가 받은 컨셉팅 조건들은 이미 개발된 어떤 제품의 특징들을 살려서 가장 쉽게 소비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컨셉을 짜는 일이었다. 이런 컨셉은 짜는 방법은 다양할 수 있겠지만, 결론적으로 컨셉의 핵심요소들은 내가 바꾸거나 정할수 없기에, 그 핵심 요소들의 당위성을 내가 판단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판단한 권한이 없었겠지.
이렇게 회사에서 배운 컨셉팅은 방향성과 핵심 요소들은 이미 정해진 최종지이고, 그 최종지에 어떻게 도달할지만을 가장 멋진 아이디어들로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카페 창업을 위해 해야하는 컨셉팅은 2번째 부류에 속한다. 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컨셉팅.
처음 맨 윗단에서부터 어떤 핵심요소, 즉 소비자가 마지막에 느끼는 엔드 베네핏을 줄건지부터 정해야했다. 카페는 당연히 커피를 마시러 오는 곳이지만, 이 카페가 다른 카페들이 줄 수 없는 또 다른 가치를 줄 수 있느냐 없느냐가 너무 중요했다. 그저 남들보다 더 맛있는 커피-정도로는 내 성에 차지 않았고, 내가 카페에 애정을 갖게된 계기인 "공간"을 활용한 컨셉팅이 강한 중심을 잡아주길 바랐다.
이때부터 나는 컨셉팅의 늪에 빠졌다. 한가지 컨셉을 만들고, 이 컨셉에 푹 빠져 오랫동안 디벨롭 시켰다. 그러다보면 나는 어느새 이 컨셉에 질려버리게 되었고, 이보다 훨씬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새로운 컨셉을 떠올려냈다. 물론, 그 컨셉 또한 깊게 파고들다보니 더 수익성이 좋아보이는 다른 컨셉도 떠오르게 되었고, 이런 방식으로 계속해서 내 컨셉들은 마무리 지어지기도 전에 새로운 컨셉으로 탈바꿈 당했다.
이렇게 애정을 갖고 작업하던 컨셉 서너개가 흩어져버리자 컨셉팅에 대한 피로도가 높아졌다. 가장 큰 문제는, 이제는 새로운 컨셉을 만드는 것 조차도 너무 큰 장벽이 생겨버렸다는 점이었다.
어차피 좋은 컨셉을 만들고 디벨롭 시켜봤자 또 새로운 컨셉이 나타나 이 노력이 헛수고로 돌아갈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 사이클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정말 정말 무조건 최고인, 그 무엇도 이길 수 없는 최강의 컨셉을 떠올려내야한다는 강박이 생겼고, 그 강박은 내 창의성을 말라 비틀어버렸다.
컨셉이 없는 카페란 나에겐 아이덴티티, 브랜딩, 방향성 모두 없는 빈 깡통같은 카페로 느껴졌기 때문에, 다른 카페 창업 준비를 위한 작업들도 모두 중지되었다.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내내 머리 싸매고 고민하며 악순환으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고민들을 숱하게 하며 직장생활을 하던 나는 뜻밖의 생각의 전환을 만나게 되었다. 회사에서 컨셉을 열심히 짠 제품과, 그렇지 않고 내 성에 차지않는 평범한 컨셉을 짠 제품, 이렇게 두개의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 중 여러 상황들로 인하여 열심히 컨셉을 짠 제품이 아닌 평범한 컨셉을 지닌 제품에 더 힘을 주어 투자하게 되었고, 더 다양한 방식들로 세일즈, 피알, 이벤트 등 밀어붙였다. 그 결과, 그저 평범해보였던 그 컨셉은 클래식하게 자리잡았고 오히려 쉽고 직관적으로 소비자들의 마음속에 각인되어 큰 성과를 보았다.
이때 느낀것은 어쩌면 정말 중요한 일은 (내가 짠 컨셉들이 모두 다 좋은 아이디어들이라고 가정하였을 때) 어떤 컨셉을 고르느냐보다 이 컨셉을 어떻게 풀어나가고 계속해서 확장하느냐라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시점에선 최선을 다해 최고의 컨셉을 정해야했기에, 나는 여전히 갈피를 못잡고 있었다. 그때 나의 카페 창업의 사외이사 역할을 맡고 있는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남자친구인 윤성은 꼭 최고인 컨셉 1개를 처음부터 만들려하지말고 마음에 드는 컨셉을 여러개 동시적으로 만들어볼 것을 제안했다.
이렇게 하면 나는 이 컨셉이 더 좋은 컨셉으로 인해 파괴될 걱정없이 일단 가장 좋은 컨셉 후보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후에 이 여러 컨셉들을 동시적으로 비교해보며 어떤 컨셉이 가장 내 카페에 적합할지를 고민해보는 것이 더 좋은 방안 같았다. 나는 그의 통찰력에 감탄하며 기쁜 마음으로 컨셉 10가지를 적어내려갔다.
하지만 컨셉작업은 어디까지 해야 충분하다고 정의하기가 힘들었기에, 이 컨셉 작업은 몇달동안 진척없이 그저 여러개의 컨셉들을 흩뿌려놓고 조금씩 살을 보태기만했다. 너무 늘어지는 작업속도에 카페 창업 준비 전체에 대한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었고, 이때 나는 또 다시 윤성의 도움으로 개발자들이 사용한다는 D.O.D. 시스템을 이용하여 컨셉팅을 매듭지을 수 있게 되었다.
윤성은 개발자인데, 개발자들은 설계와 분류, 기록 등의 체계적인 일들을 하는 데에 도가 터있는 편이라 내가 큰 도움을 받고 있다.
D.O.D. = DEFINITION OF DONE
즉, 완료하였다라는 것에 대한 정의를 구체적으로 해둠으로써 어디까지 해야 진정 컨셉팅이 끝났는지를 측정할 수 있게 해주는 장치이다.
모호하고 방대한 "컨셉"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정의해두고, 그 컨셉을 완료하기 위해 해야하는 일들을 또 세부적으로 정의하는 일이다. 각 정의한 것들에 대한 완료 시점까지 정하면 된다.
나는 아래와 같이 D.O.D.를 정했다.
<컨셉의 D.O.D. 정의>
이것을 기준으로 세부적인 인테리어, 메뉴, 브랜딩, 홍보를 해나갈 수 있을 정도로 구체화된 "컨셉"을 만들 시, 컨셉을 완료했다고 정의한다.
<컨셉 완료를 위한 D.O.D. 정의>
“컨셉”은 아래 항목들을 충족시켜야 한다.
- 이 카페에서만 얻을 수 있는 소비자의 엔드 베네핏이 무엇인지
- 누굴 위한 엔드 베네핏인지 (타겟)
- 어떻게 그 엔드 베네핏을 전달할건지 (계획, 대략적인 구상)
- 공간, 메뉴, 서비스, 그 외 (굿즈, 이벤트, 온라인, 배달 등)
- 이 엔드 베네핏이 시장 수요가 있을지 (차별화)
<컨셉 완료를 위한 D.O.D. 세부적인 타임라인 정의>
가장 마음에 드는 3가지 컨셉을 정하여 아래와 같이 브리프를 작성한다.
5월: 1차적으로 간단한 줄글로 3개 컨셉의 주요 내용을 작성한다.
6월 : PPT 형식으로 각 컨셉에 대한 실브리프를 작성한다.
7월 : 3가지 컨셉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피드백을 받는다.
8월 : 최종 확정된 컨셉으로 마무리 다듬기를 하고 컨셉을 확정한다.
이 가이드라인을 따라서 차근차근 나의 컨셉을 만들어 나갔고 검증했고, 마무리지었다. 준비한다는 것 자체에 빠져 평생 준비만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처음 느끼게 해준 컨셉팅, 정말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애정담아 생명을 불어넣을 컨셉이 정해졌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가 또 다른 챌린지들을 맞이할 수 있게 됨에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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