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조종자와 희생양

by 아빠나무

<환자 보고서>

환자 개요 : 23세 여성. 대학 재학 중. 신체적으로 건강. 무난한 성격이나, 약간 소심함. 주눅 든 모습.

호소 : 우울하다. 분노가 치밀지만 표현하지 못한다. 가슴이 답답하다.

특징 : 자신도 왜 이렇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고 표현함. 뚜렷한 심리적 외상은 없었음. 고등학생때와 달리, 대학 생활 중 여러 가지 대인관계 갈등이 발생함. 이 원하지 않는 대인관계 갈등을 자신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 주된 고민이었음.

면담 후 : 대부분의 대인관계 갈등에 특정 인물이 관여되어 있다는 부분이 확인됨.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 일하다 보면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은 오지 않고, 반대로 그들로 인해 고통받은 분들이 와서 치료받는 경우가 많다. 대놓고 폭력, 착취를 하는 경우는 이런 분들이 도망치기라도 하거나 쉼터에서 도움을 받게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일명 '감정 조종자'에게 감정을 조종당한 사람들은, 왜 자신이 힘든지도 모른 체 답답함만을 가지고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온다. 오늘은 이 감정 조종자에 대하여 알아보자.


먼저 감정 조종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자. 글쓴이가 감정 조종자라고 이름 붙인 이 유형의 사람을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자기애적 성격 경향'이 있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인정해주기를 바란다. 자기 주변에 늘 많은 사람이 있기를 원한다. 그래서 자기가 뭐라도 되는 양 행동한다. 발정기에 수컷 새가 자신을 부풀리듯이, 자신을 부풀린다. 그래서 이들은 자존심이 조금이라도 상할 수 있는 상황에 매우 민감하다. 다른 사람의 인정과 인기가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연스럽게 주변을 깍아내리고, 자신을 떠받치는 용도로 사용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높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준다. 오랑우탄이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해 자기보다 약한 오랑우탄을 괴롭히고, 패배를 인정하게 만드는 모습이다.


이 감정 조종자들이 악의를 가지고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게 어쩌면 더 무서운 일이다. 이들은 '당연히' 남들의 우러름과 좋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런 행동을 한다. 이들은 처음에는 매력적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호감을 느끼게 된다. 소심한 사람들에게는 가끔 우상이 되기도 한다. 감정 조종자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심적으로도 불편하다. 이런 상태가 되면,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에게 '역할'을 하게 만든다. 즉, 연기를 강요당하는 것이다. 본인도 모르게 말이다. 그들의 비위를 맞춰주는 부하가 되기도 하고, 인상적인 패배를 통해 그들을 띄워주는 라이벌이 되기도 하며, 그들의 잘못을 뒤집어쓸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알게 모르게 이런 역할을 수행하게되면서, 감정이 조종당하게 된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4명으로 이루어진 집단이 있다고 해보자. 감정 조종자는 빠르게 2명을 포섭한다.(포섭자라고 하자.) 1명은 보통 희생양이 된다.(낙오자라고 하자.) 감정 조종자는 포섭자들과 하하호호 시간을 보낸다. 자연스럽게 한 명이 낙오한다. 이 낙오자 덕분에, 감정 조종자는 더 높은 사람이 된다. 대놓고 괴롭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에 급이 나누어진다. 낙오자는 별다른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아랫사람이 된다. 시간이 지나서 포섭자 중 한 명과 감정 조종자의 갈등이 생겼다. 감정 조종자는 낙오자에게 손을 뻗는다. 낙오자는 자신을 구원해서 높은 사람으로 만들어 준 감정 조종자에게 감사하며, 배신한 포섭자를 아랫사람으로 만든다. 감정 조종자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아도, 이전에 낙오자였던 사람이 알아서 배신한 포섭자를 징벌한다. 그리고 감정 조종자를 찬양한다. 집단의 그 누구도 감정 조종자에게 반항할 수 없는 시스템이 만들어진다. 이제 모두의 미래는, 감정 조종자가 부여하는 '역할'을 연기 해 나가는 것이다. 미묘한 감정들이 이렇게 조종당한다. 감정 조종자는 계속해서 높은 사람으로 그 집단에 군림한다.


참으로 어렵다. 그 누구도 잘못은 없다. 감정 조종자들의 행동은, 그들 나름으로는 살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들이 이전에 겪었던 심리적 고통을 그렇게 보상받고 있는 것이다. 유치하지만, 확실한 보상이다. 희생양이 된 사람들은 법적으로 따질 것이 없다. 도덕적으로도 애매하다. 크게 희생당했냐?라고 한다면 또 그렇지도 않다. 하지만 답답하다. 힘들다. 심지어, 죽을 것 같다.


이 감정 조종자들에게서 벗어나기는 매우 어렵다. 감정 조종자가 당신 주변에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면, 가능한 피해라. 피할 수 없다면, 그 집단에서 고립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자신이 위로받을 수 있는 다른 집단이다. 직장에서 당하고 있다면 가정에서, 대학 동기에게 당하고 있다면 어려서부터 있었던 친구들이 예가 되겠다. 다른 집단에서 위로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집단에서 관계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필요한 것만 할 수 있게 된다. 직장이면 일만 하면 되고, 대학에서는 공부만 하면 된다. 그래서 대인관계가 넓은 사람이 유리하다. 대인관계가 좁다면? 다른 위로받을 거리를 찾아야 한다. 그것도 없다면? 어쩌겠는가. 지금이라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지. 고통받는 그대들아, 건투를 빈다.




환자 보고서에 표기한 환자는 완전히 가상 인물임을 밝힙니다.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photos/xb2DaEeX8j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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