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6. 세상의 끝에서

쎄 - 피스테라

by 정한결

드디어 피스테라로 향하는 날.

그리 길지 않은 여정이었기에 아침을 먹고 8시가 넘어 여유롭게 출발했다.


쎄를 기점으로 이제 순례길엔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윤슬과 바다 풍경을 한가득 보며 걸었다.

바다 근처라 그동안 본 적 없는 종류의 식물과 꽃을 보는 것도 신기했다.


걷다 해변이 있어 순례길 루트를 벗어나 해변까지 내려가는 일까지 감행했다.

순례자가 걷는 도중 의도적으로 길을 트는 일이 얼마나 엄청난 결심인지는 이곳을 다녀온 사람만이 알 것이다.


중간에 콜라를 마시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걸은 날이 스페인의 휴일이었어서 연 바가 없었다.

다행히 피스테라의 규모 있는 슈퍼 한 곳이 오후 3시까지 열려있어 저녁거리를 살 수 있었다.


알베르게에 들려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쉰 후, 다시 길을 나섰다.

오늘의 숙소엔 도착했지만, 최종 목적지는 도심지에서 3km 떨어진 피스테라 등대였다.


이날 역시 더운 날씨가 이어졌다.

평소 스페인의 더위가 타는 듯한 더위라면, 이 날는 습기가 가득한 찌는 더위였다.

짐 없이 맨몸으로 걷는데도 땀 때문에 몸이 미끌미끌해질 정도였다.


저 멀리 피스테라 등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드디어 최종 목적지의 증표, 0km 비석까지 만났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도 만나지 못했던 숫자였다.

더 이상 서쪽으로는 걸을 곳이 없는,

과거 사람들이 세상의 끝이라고 믿었다던 피스테라에 도착했다.


더운 날씨에 생각을 비우고 걷다가, 300m 표지판을 본 순간부터 마음이 울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0km 숫자를 보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산티아고 입성 때는 실감도 안 나고 멍한 기분이었는데, 세상의 끝까지 걸으니 비로소 끝이 느껴진 모양이다.


피스테라 절벽 끝엔 조개와 더불어 순례자의 상징 같은 신발 모양 조형물이 놓여 있다.

여기 바위틈 사이로 신발을 놓고 간 사람들도 있어서, 맥없이 ‘이 사람들 어떻게 돌아갔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땀에 절었지만 절벽에 앉아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바다 풍경을 보고 있자니 그저 행복했다.

감성에 한껏 젖은 상태여서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 눈물을 왈칵 쏟을 수 있었는데, 데이터가 안 터지는 관계로 강제 불발됐다.


다시 3km를 걸어 알베르게에 도착했고, 씻고 점심 겸 저녁을 요리해 먹었다.

3시까지 문을 열어준 고마운 슈퍼 덕에 쎄에 이어 파스타를 해 먹었다.


순례길에서 만난 한국인들 중 유일하게 피스테라-묵시아행을 택한 나와 YH님.

같은 끝을 바라보지만 YH님은 나보다 산티아고에서 하루 더 머물렀기에 다시 볼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남들이 이틀에 걸을 길을 하루에 끊어버린 덕에 피스테라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피스테라까지 온 기념으로 알베르게 앞에 있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크고 아름다운 버블와플을 사 먹었다.


와플 먹고는 일기장을 챙겨 바다로 갔다.

피스테라 숙소 근처의 바다는 다들 동쪽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서, 예쁜 일몰을 보기 위해 20분 정도를 걸어갔다.


멀리서 봤을 때 고요해 보이는 풍경에 아무도 없나? 생각을 했는데 조금 더 걸어가니 노을을 보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노을만큼 사랑하는, 노을을 보는 사람들.


바다가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윤슬이 반짝반짝한 게 아니라 번쩍번쩍했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YH님과 각자 일기를 썼다.


일몰 때가 다가오니 말도 못 하게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눈에 보이는 해와 붉게 변하는 하늘과

물에 비치는 해의 색깔과 모래에 남는 물자국까지

바다에서 보는 일몰의 모든 걸 사랑해!


세상에 이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있을까? 했다가 없다고 혼자 결론지었다.

세상에 이처럼 아름다운 풍경은 없어!


너무 격하게 아름다운 풍경을 오랫동안 봐서 가슴이 먹먹했다.

이 저녁의 바다만으로 피스테라까지 온 이유가 완성되는 것 같았다.

YH님이 감격해서 ’노을 보러 노을 좋아하는 사람 따라오길 잘했다‘고 말했을 때의 행복감이란!


마지막으로 점점 푸른색으로 변해가는 하늘을 보며 각자의 알베르게로 돌아갔다.

피스테라에서 좋은 풍경을 볼 거란 기대는 했다만, 이 정도를 바라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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