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7. 또 만나, 나의 까미노

피스테라 - 묵시아

by 정한결

세상의 끝 피스테라에서 또 다른 끝 Muxía(묵시아)로 향하는, 44일의 까미노 대장정의 막을 내리는 마지막 날이 밝았다.


길을 떠나며 바다를 비추는 핑크빛 일출을 봤다.


첫날 들었던 Magnificent.

Who compares to You? Who set the stars in their place

Who compares to You? You who bring the morning light


44일간 걸으며 해가 지고 별이 뜨고 또다시 해가 뜨는 모습을 수도 없이 봤고, 이 아름다움에 대해 얼마나 많이 되새겼던지!


첫날 피레네 산맥에서 듣고 눈물을 흘렸던 노래가 의도치 않았지만 마지막 날 또 랜덤 재생되어 나왔다.

이게 바로 순례길 위의 수미상관.


10km 지점에서 도나티보 바도 발견했다.

오늘 28km의 거리를 걸어야 했기에 중간에 화장실을 무조건 가야 했는데, 운 좋게 도나티보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마지막 날의 길까지 아름다웠다.

하늘에 뜬 대왕 구름도 아름다웠다.

이때까진 이게 엄청난 비의 전조라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왕구름이 점점 먹구름이 되어가더니 저 멀리서부터 천둥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실시간으로 먹구름에게 쫓기며 걷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못해서 엄청난 양의 비와 맞닥뜨렸다.

설상가상으로 거의 찢어지긴 했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던 우비도 산티아고에 버리고 온 상태였다.

비를 막아줄 건 방수가 잘 되지 않는 바람막이뿐이었다.


번개가 칠 때 나무 아래 있는 건 금물이라고 듣긴 했지만 허허벌판에 비를 피할 곳 하나 없는 까미노에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얼마나 비가 많이 오고 번개가 많이 쳤던지, 까미노 마지막 날 번개를 맞아 죽는 상상까지 했다.


도저히 그치지 않을 것 같던 빗줄기도 잦아들고, 드디어 다시 길을 떠날 수 있었다.

전혀 buen(좋은)이 아닌 길 상태였지만, 여전히 순례자들은 Buen Camino하고 인사를 건넸다.

이쯤 되면 광기가 정신을 지배한다.


신발도 ‘젖는’ 수준을 진작에 벗어나 있었다.

맨발로 진흙을 밟는 듯 철벅철벅하는 소리가 났다.

더 이상 걸을 내일이 없다는 점이 감사했다.


마지막 날은 28km의 장거리에 길마저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었다.

발에서 불이 나는 듯했다.


폭우가 거짓말이었다는 듯 날이 개이고 묵시아 초입부에 도착했다.

압축해서 말하지만 정말 정말 힘든 날이었다.

컨디션, 날씨, 장비의 상태 중 하나도 정상인게 없었다.


묵시아 표지판을 확인하곤 쓰레기통이 보일 때마다 허물 벗듯 낡은 장비들을 하나씩 벗어재꼈다.

나는 시작 때부터 남들이 쓰던 장비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모두 소생 불가로 낡은 상태였다.


마지막 날 식사는 가방에 있던 불닭볶음탕면이 되었다.

라면은 있지만 마지막 식사를 ‘라면’만으로 끝낼 수 없었기에 동네 슈퍼에서 계란과 쌀까지 샀다.


발을 질질 끌며 약 7시간 만에 오늘의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사리아에서부터 뜯어지기 시작한 신발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불과 한 달 전에 산토 도밍고에서 산 신발이었는데, 세상 모든 피로를 담고 있었다.


비를 쫄딱 맞은 덕에 가방에 있던 모든 물건이 다 쫄딱 젖었다.

여권마저 흠뻑 젖어 칸마다 휴지를 끼워 넣고 말렸다.

비에 젖은 옷들을 보며 다시 한번 이게 마지막이라서 감사하다는 생각을 돼 내었다.


마지막날 묵은 묵시아의 알베르게는 수프를 주는 곳이었다.

빨래를 하고 있는데 주인분이 갑자기 와서 밥을 먹었냐고 물으시더니 끌고 가서 수프를 주셨다.


빠에야 같은 수프 마감 후엔 귀여운 별모양 파스타가 든 수프가 준비됐다.

여기서 배불리 먹어 슈퍼에서 사 씻어놓은 쌀을 알베르게 주인분께 쓰시겠냐고 여쭤봤더니 엄청나게 고마워해주셨다.

순례길에선 더 많이 받은 건 나인데 주는 사람들이 더 크게 고마워한다.


나보다 늦게 숙소에 도착한 YH님도 만났다.

알베르게에서 준 수프를 먹었지만, 여기에 각자의 불닭볶음탕면과 샌드위치를 곁들(?)였다.

까미노 종료를 알리는 탄수화물 파티였다.


쉬다 해가 질 때쯤 묵시아 등대로 향했다.

나와 YH님 둘 다 마지막날 제대로 고생을 해서, 미련 하나 없이 행복만 만끽할 수 있는 상태였다.

다른 사람들이 산티아고를 밟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겠지?


묵시아도 피스테라같이 0km 비석이 있다.

섭섭한 마음 없이 시원함만 가득한 엔딩이었다.


절뚝거리며 바다가 가까이 보이는 곳으로 내려가 하염없이 마지막 하늘과 바다를 감상했다.

원래 일기예보라면 저녁에 왔을 비가 낮에 그렇게나 쏟아진 거였다.

낮에 있는 대로 고생을 했지만 이 풍경을 보고 있자니 낮에 비를 맞은 게 가치 있다고 느껴졌다.


대서양이랑 맞닿은 서쪽바다라 파도 힘이 엄청났다.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첫 구절이 생각나던 자연의 소리가 함께했다.


바다만 보느라 몰랐는데 고갤 돌리니 반대쪽 하늘이 핑크빛이었다.

해가 완전히 진 후에 더 예쁜 노을쇼가 펼쳐졌다.


이 풍경이 묵시아까지 온 모두에게 주어지는 게 아닐 텐데.

이틀 연속 너무 예쁜 풍경들을 봐서 끝의 끝까지 온 나의 이유가 온전히 채워졌다.


'순례길 마지막 날'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에 걸맞는 풍경이었다.

자연이란 뭘까?

매일같이 이런 말도 안 되는 풍경이 지구상 최소 한 곳에서 펼쳐진다니.

끝까지 고민했던 피스테라 - 묵시아 행 덕에 평생 기억에 남을 장면을 인생에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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