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LIF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 퍼스트 Jun 02. 2017

상처받은 기억에서 벗어나는 방법


앤서니 브라운 쓰고, 그린 <숲 속으로> 


“엄마가 동생 낳아줄까?” 별걸 다 묻는다는 듯 초록이는 두 눈을 똥그랗게 하고 대답한다. “아니. 왜냐하면 난 벌써 동생이 있잖아.”


아이가 말하는 동생은 가끔 만나는 사촌 동생이다. 초록이는 다섯 살, 사촌 동생은 두 살이다. 두 살은 참 귀엽다. 아장거리는 발걸음, 입 안에서 또로록 굴러가는 옹알이, 심지어 떼를 쓰느라 땅에 드러누워 우는 모습까지 귀엽다. 물론 초록이도 여전히 귀엽다. 하지만 귀여움이란 더 작고 여린 것들의 특권이므로 온 가족의 관심은 사촌 동생에게 쏠린다. 이럴 때마다 나는 급하게 초록이 표정을 살핀다. 다섯 살 아이답게 얼굴에는 그 마음이 온전히 드러난다. 눈을 깔고 땅만 보거나 입을 삐죽대기도 하고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울기도 한다.


그런 아이를 보면서, 애정과 관심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마땅히 겪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다가도 혹시 서러운 마음이 상처로 남을까 걱정도 된다. 내가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사진:SanchaiRat/shutterstock.com


갖가지 공포로 밤이 몹시 무서운 나이일 때, 잠들려면 작은 십자가와 동생이 필요했다. 십자가는 작은 종의 손잡이 역할을 하던 것이었다. 나는 외할머니네 집 거실 한쪽에 떨어져 있던 그것을 주워 와서 무서울 때마다 손에 쥐고 잤다. 그다음은 동생이 내 옆에 있어야 했다. 날 지켜줄 수는 없겠지만 그 숨소리를 들으면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십자가와 동생이 있어 밤은 견딜 만했다.


어느 날, 밤에 눈을 떠보니 옆에서 자고 있어야 할 동생이 보이지 않았다. 엄마에게 물어봤지만 모르겠다는 무심함이 돌아왔다. 다른 날보다 십자가를 더 꼭 쥐고 있어야 했다. 아침이 되자 동생은 외삼촌이 깨워서 나갔더니 외삼촌 친구들이 맛있는 것도 사주고 선물도 주고 재미있게 놀아줬다, 고 자랑을 했다. 동생은 애교도 많고 순해서 평소에도 친척들이 참 예뻐했다.


삼촌은 왜 나는 두고 갔을까.


동생 얘기를 듣는 내내 이 생각만 했다. 대답이 너무 쉽게 나와서 머릿속에서 묻고 또 물었다.


사람들은 왜 자꾸 나만 두고 갈까.


엄마가 내 표정을 살피는 그 순간에 나는 열심히 웃었다. 사실 울고 싶었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걸 보여줘야 했다. 동생은 씩씩한데 언니가 또 운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울거나 화를 내면 정말 미운 아이가 될까봐.


이렇게 쓰고 보니 별거 아닌데, 이날의 장면들은 아주 오랫동안 날 괴롭혔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었고 미운 아이가 될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착하고 예쁜 사람이 되려고 했다. 스스로를 다그치는 참 힘든 목표였다.


그러니 혹시 내 아이도 서러운 기억을 안고 긴 시간 힘들어 할까봐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엄마로서 무엇을 어떻게 해줘야 초록이가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까. 행복한 기억만 남겨줄 수는 없을까.


나의 질문에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 <숲 속으로>는 ‘없다’고 대답한다.


혼자 걸어야 하는 길,

<숲 속으로>



소년은 아픈 할머니에게 케이크를 갖다 드려야 한다. 할머니 댁에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멀리 돌아가는 길인데 시간이 엄청 걸리고 또 하나는 숲을 가로질러 가는 지름길이다. 혼자 걸어야 하는 길, 그러니까 홀로 감당해야 할 삶을 앞에 두고 있는 아이에게 엄마는 숲으로 가지 말고 멀리 돌아가라고 당부한다. 세상의 엄마들은 나의 아이가 힘들고 고된 길을 걷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니까.


 


하지만 소년은 어둡고 거친 숲을 선택한다. 거대한 그늘로 다가가는 소년의 뒷모습이 쓸쓸하고 외롭다. 숲을 걸으며 소년은 다른 아이들을 차례로 만난다. 아프고 소리치고 울부짖는, 흑백의 아이들이다. 이 숲에서 선명한 색을 지닌 것은 오직 소년뿐이다. 어쩌면 이 숲은, 그리고 아이들은 소년의 마음속 깊이 담아둔 상처받은 기억들이 아닐까. 상처받은 기억들은 끊임없이 말을 걸고 무엇인가 바라지만 소년은 오히려 묻는다. “하지만 내가 무얼 할 수 있겠어요?” 그렇다. 기억은 선택하고 정리하고 버릴 수 없다. 기억이 떠오르면 그저 기억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럼에도 이 그림책이 위로가 되는 이유는 상처받은 기억도 ‘끝’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행히 소년은 숲을 오래 헤매지 않는다. 따뜻한 할머니의 집이 곧 나타날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할머니의 집도 묵묵히 소년을 기다리고 있다. 드디어 할머니 집을 찾았을 때, 긴 여정의 끝을 알리듯 하얀 눈이 숲을, 상처받은 기억들을 덮는다. “잘 지냈니?” 안부를 묻는 할머니에게 소년은 “네, 이젠 괜찮아요.” 라고 대답한다. 어둡고 거친 숲 속에서 불안하고 힘들었지만 결국 밖으로 나온 소년을, 나도 꼭 안아주고 싶다.


숲을 덮고 있는 하얀 눈은 언젠가 녹을 것이고 상처 받은 기억들은 소년에게 다시 말을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한번 걸었던 숲에서 나오는 일은 조금 더 쉬운 법이고 그렇게 점점 더 나아질 것이다.


오늘 밤, 초록이와 같이 이 그림책을 보며 말해줘야겠다.


“초록이도 이 친구처럼 어둡고 거친 숲에 혼자 남게 되는 일이 있을 거야. 그 숲 속에서 초록이를 괴롭히는 아픈 기억들을 만나게 될지도 몰라. 그럴 때는 우리 집을 생각해. 멈추지 않고 걷다 보면 결국 따뜻한 우리 집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엄마는 집에서 널 기다리고 있다가 네가 돌아오면 꼭 안아줄게. 초록아, 다 괜찮아.”


  Information

 <숲 속으로> 글·그림: 앤서니 브라운 | 역자: 허은미 | 출판사: 베틀북 | 발행: 2004.06.30 |가격 11000원(원제 Into the Forest)


/글·사진:지혜


다른 그림책 이야기 보러가기

매거진의 이전글 평범한 일상이 평범한 나라에서 살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