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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 퍼스트 Oct 19. 2017

친구가 필요해, 어른이니까

거스 고든 쓰고 그린, <허먼과 로지>
노인경 쓰고 그린, <곰씨의 의자> 


서른을 기다렸다. 나에게 서른은, 어른의 나이였다. 번듯한 직장에 반듯한 책상, 까맣게 번쩍이는 차, 모던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집, 백화점 1층에서 구입하는 화장품처럼 향기롭고 세련된 얼굴을 상상했다. 확실하고 안정적인 ‘나의 것’들이 있다면 늘 의연한 어른의 태도가 나올 것이라 믿었다. 세상일에 의연해지고 싶었다. 너무 자주 무섭거나 외롭거나 불안한 내가 싫었다. 이게 다 어려서 그래, 서른이 덜 된 나이를 탓했다. 


그런 믿음을 비웃듯이 서른은 나이 값을 준비할 틈도 안 주고 급하게 달려왔다. 서른이 되던 1월, 나는 산부인과 분만실 침대에서 악을 쓰고 있었다. 직업은 찾는 중이고 작고 낡은 아파트에서 살며 화장은 서툴기만 한데, 엄마가 되었고 엄마가 되었으면 이제 어른이라고 했다. 낯선 책임과 의무 속에서 매일 허덕였다. 내가 겪은 서른, 그리고 어른은 여전히 무섭고 외롭고 불안한 것이었다.   


그래서 친구가 필요해,

<허먼과 로지>



도시에 사는 허먼과 로지도 어른이다. 허먼은 온종일 전화로 물건 파는 일을 한다. 그저 사람들하고 이야기하는 게 좋아서 물건을 못 팔아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니 빽빽한 사무실에서 초록 잎처럼 생기 있는 사람은 오직 허먼 뿐이다. 로지는 레스토랑에서 설거지를 하고 오후에는 노래 수업을 받는다. 재즈 클럽 무대에 서는 목요일 밤을 위해서. 노래는 로지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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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괜찮은 어른 아닌가? 하지만 도시는 ‘이 정도’를 용납하지 않는다. 허먼은 물건을 많이 팔지 못해서 회사에서 쫓겨나고 인기 없는 가수 로지가 노래하던 클럽은 문을 닫는다.


무섭고 외롭고 불안한 어른, 허먼과 로지는 각각 자신의 작은 아파트에서 혼자 불행을 날려보려고 한다. 물론 친근하고 친숙한 가족과 친구가 있겠지만 만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전에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금의 나는 ‘그냥 나’가 아니라 ‘실패한 나’이다. 공감과 위로 대신 더 열심히 살라는 충고가 쏟아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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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홀로 견디던 어느 날, 문득 좋아하던 사탕과 요구르트가 생각나서 거리로 나선다. 어쩌면 답답한 마음을 덜어 줄 친구를 찾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처럼 혼자 길을 걷고 있는 사람, 지금의 나를 ‘그냥 나’로 받아줄 수 있는 새로운 친구, 무섭고 외롭고 불안한 마음을 겪어 본 어른을 만나고 싶어서.


환한 달빛 아래 마주한 허먼과 로지, 이제 그들에게 도시는 완전히 다른 곳이 되었다. 서로가 있어 ‘이 정도’면 살만한 도시가 되길 빈다.


나도 친구가 필요했다. 오래전부터 익숙했던 친구들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왔는데 막상 살아보니 그렇지 않았다. 어른이 되는 방식은 너무 다양했으므로. 삶의 속도와 방향은 서로 달라졌고 예전처럼 같은 길을 나란히 걷기는 어려웠다. 혼자 걸었다. 무섭고 외롭고 불안했다. 새로운 친구가 간절해졌다. 


도와줄 친정이나 시댁이 마땅치 않고 남편의 잦은 야근과 회식으로 온종일 혼자 아이를 돌보는 엄마들과 만났다. 마주 앉아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끼니를 챙겨 먹는 일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위로가 됐다. 같은 처지에 마음 맞는 친구들이 생기다니, 운이 좋았다. 


어릴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고 한다. 배경과 조건을 보지 않고 사람 자체만 보는 유일한 시기라면서. 하지만 나이를 먹고 만난 친구도 진짜 친구다. 배경과 조건이 맞아서, 이것저것 재고 따지며 맺은 관계라 그런지 별 탈 없이 편안하다. 


같은 동네에 살다 보니 소득 수준과 집안 환경이 비슷하다. 다들 수수하고 소소한 일상을 꾸린다. 그러니 아무 때나 집에 드나들어도, 같이 시장을 보며 의도치 않게 생활비를 공유해도 부담이 전혀 없다. 더불어 교육관도 비슷하다. 화려한 사교육에 뒤따르는 화려한 미래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요즘에는 시끄러운 놀이터가 거의 없다던데 이 동네 놀이터는 해가 질 때까지 애들이 뛰어노는 소리로 참 시끄럽다. 엄마가 서로 친구가 되려면 조건 하나가 더 붙는다. 바로 아이의 성향. 엄마와 아이는 ‘세트’라서, 엄마들끼리 아무리 잘 맞아도 아이들끼리 어울리지 못해 매번 싸운다면 그 관계는 유지하기가 어렵다. 다행히 아이들끼리도 죽이 맞아서 큰 다툼 없이 잘 논다. 


무엇보다 ‘어른스러운 어른’들이라서, 참 좋았다.   



어른스러운 어른,

<곰씨의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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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씨는 시집을 읽고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듣는 시간을 좋아한다. 기다란 의자는 곰씨의 평화를 지키는 작은 공간이다. 우연히 곰씨의 의자 앞을 지나가던 탐험가 토끼와 무용가 토끼는 곰씨의 새로운 친구가 되었다. 이 둘은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는다. 그렇게 곰씨의 친구들이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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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이 늘 곰씨의 곁에 있다. 다 함께 즐겁다. 곰씨만 빼고. 곰씨는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마음을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돌려 말하려고’ 아무도 앉지 못하게 의자 위에 눕거나 한 자리만 남겨 두고 페인트칠을 하거나 무거운 바위를 가져오고 새 의자를 만들고 심지어 똥을 싸기까지. 하지만 토끼 친구들은 곰씨의 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끙끙 앓던 곰씨, 병까지 나버렸다.


결국 곰씨는 속마음을 솔직하게 말한다. 가끔은 혼자 있고 싶다고. 그동안 했던 고민이 무색하게 토끼 친구들은 곰씨의 말을 정성껏 듣는다. 그리고 곰씨가 자신과 다름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들을 보며 어른스러운 관계에 대해 생각해본다. 솔직하게 거절할 수 있는 용기, 착한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믿음,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는 태도, 세상 모든 마음은 내 마음과 똑같지 않다는 배려를 갖춘 사이.

곰씨와 토끼 사이, 즐거운 ‘지속’을 기대해도 되겠다.


서른이 훌쩍 넘었고, 어른이 되었다. 여전히 무섭고 외롭고 불안하지만, 여전히 친구들이 있어 다행이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우리’가 되어 서로의 마음을 달래며 살고 있다. 참 고맙다.  


 Information

<허먼과 로지> 글: 거스 고든 | 역자: 김서정 | 출판사: 그림책공작소 | 발행: 2016.09.30 | 가격: 13,000원
<곰씨의 의자> 글·그림: 노인경 | 출판사: 문학동네 | 발행: 2016.09.23 | 가격: 12,800 원 



/글·사진: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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